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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세계는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게 찾아온 자유와 행복.
올바른 판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세계는 이렇게 조화롭고 아름답고,
나는 그저 거기에 있기만 해도 된다.
본문 66쪽.
스물네 살 때 페미나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에쿠니 가오리에게 글은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세토우치 자쿠초는 편집자였던 아버지를 통해 얼굴만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그녀에게 "쓴다는 건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열심히 써서 궤짝에 한가득 모아놓고 시작하라(57-58쪽)"는 말을 해 주었다. 그 후 삼십 년이 지난 지금은 활발하게 활동하며 사랑받는 작가가 된 에쿠니 가오리. 그녀에게도 글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아 영화를 보며 기분전환을 했던 날이 있고, "이런 글을 무심히 쓸 수 있게 되려면 대체 뭘 지나왔어야 하는 것일까(59쪽)"라며 감탄을 하게 만드는 우상도 있다.
일기, 편지, 추억 회상, 단편 소설, 독서노트, 수상소감, 추천도서 목록, 여행 노트, 글로 쓴 먹방 등 지난 세월 잡지와 책에 실린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크게 세 파트로 -읽기, 쓰기 그리고 그 주변- 나누어져 있다. 인생을 바꾼 책, 서점에서 우연히 신간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작가들, 여행과 음식 이야기를 읽는 동안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의 공간으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도피인 동시에,
혼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연습이기도 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 사물을 보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의, 간단한 연습이기도 했다.
본문 101쪽.
가장 첫 번째 글의 제목은 무제인데, 작가가 어느 날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환자의 몸 안에 "스노보드가 한 개 걸려 있다(11쪽)"고 말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소형 보트와 비행기, 금귤베리 등등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총 102페이지에 달하는 차트에 들어가는 것들이 전부 환자가 쉰이라는 나이가 되는 동안 "온 몸으로 주워모았다(17쪽)"고 한다. 그러자 환자는 안심하며 "어쩔 수 없다. 나는 소설가니까(18쪽)" 라며 진찰실을 나온다. 첫 장을 읽을 때만 해도 진짜 큰 병 때문에 병원에 갔나 보다 하고 걱정하면서 읽었는데 마술적 사실주의 요소가 들어간 아주 재미있는 도입부였다! 너무나 신선하고 놀라웠고, 재미도 있었기에 나는 순식간에 한 챕터를 다 읽어 버렸다.
쓰다 막힌 원고를 내버려 두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전투하듯이 글을 써 내려간 어느 2009년 10월의 일기라던가,
한밤중에 서재 책장 위에 담아둔 잡동사니 박스가 덜커덩거려서 봤더니 그 속에서 짜리 몽땅한 지우개들이 옹기종기 내려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이다. 지우개들의 움직임을 사랑스럽게 묘사한 글이 너무 마음이 들어서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소설 《도쿄타워》에서 받았던 인상과 달리 몽글몽글한 문장이 많았다. 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 때 놓칠세라 끌어안았던 따끈따끈한 보온팩이 생각났다. 이 책에는 그림책과 동화 작가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해외 동화를 번역했다는 작업 이야기, 어린이 서적 전문 서점에서 대형서점엔 없는 단 한 권의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쓴 글을 읽으니 그녀의 동화 사랑이 납득이 갔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사람 자체에 동화와 어울리는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그녀가 쓴 동화「눈사람 유키코雪だるまの雪子ちゃん」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글자에는 질량이 있어,
글자를 쓰면 내게 그 질량만큼의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
가령 내가 안녕이라고 쓰면,
안녕이라는 두 글자만큼의 구멍이 내게 뚫려서,
그때껏 닫혀 있던 나의 안쪽이 바깥과 이어진다.
본문 52쪽.
에쿠니 가오리에게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54쪽)"이다. 그러나 완전히 혼자인 채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녀가 이 책에서 말했듯이, 글을 쓰는 순간, 열린 구멍으로 바깥과 소통하는 통로가 생긴다. 독자는 그 길을 따라 작가의 세계로 떠나 잠시 머물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연결된 통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독자가 작가가 되고 작가가 독자가 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어의 장. 쓰고 읽고 주변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삶이고, 인생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