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장에게 고소공포증이 생긴다면?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에게 무대공포증이 생긴다면? 과연 어떨까.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그 일에 책임감과 즐거움으로 몰두하던 사람에게 더이상 그 일을 지속하기 어려운 요소가 생긴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걸까.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비행하는 일이 좋아 그것만을 배워 온 기장에게 고소공포증이 생긴다면, 기장은 더이상 비행을 할 수 없다. 단순히 일을 할 수 없다는 차원을 떠나, 생계도 곤란해질 뿐더러 하고픈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실감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폐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다면…
<책 못 읽는 남자>의 주인공이 그렇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하던 일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다수의 작품을 내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작가 하워드 엥겔은 어느 날 아침, 배달된 신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내가 경험해 본 일이 아니기에 그가 그 갑작스러웠던 상황을 서술한 것만으로는 쉬이 그 당황스러움을 백퍼센트 공감하기 어렵지만, 한동안 멍했을 그의 심정은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이 일로 찾은 병원에서 하워드 엥겔은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된다. 그가 '글을 쓸 줄은 알지만 읽지는 못하는 실서증 없는 실독증'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억기능에도 약간의 문제를 겪게 된다.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 얼핏 보면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중요함과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린 버스를 탈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컴퓨터를 이용할 때도 그리고 일상의 거의 모든 범위에서 '글자 정보'를 식별하고 받아 들이며 그것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하워드 엥겔은 글을 쓰는 작가이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봐도 그가 얼마나 참담한 상황에 직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참담한 벽에 부딪혀 주저앉는 것보다 다시 일어서는 것을 택했다.
병원을 다니며 재활치료를 하고 컴퓨터와 주변 사람의 도움, 그리고 그의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이 굳은 벽을 넘지는 못해도, 돌아서라도 갈 수 있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자신만의 생각과 방법으로 글자와 문장을 식별하는 눈을 키워, 결국은 이 책 <책, 못 읽는 남자>를 펴내게 된다. 실로, 그의 의지가 참 대단해 보였다. '포기'는 사촌형제쯤 되는 거리로 가까이 두고, '인내'와 '끈기'는 이종사촌쯤 되는 먼 거리에 두고 지냈던 나를 뒤돌아 보게 하는 의지였다. 학교에서 뇌과학 관련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어 그 기억과 관련하여 흥미롭게 느껴져 읽기 시작한 책이, 오히려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보다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 하워드 엥겔의 책구절로 글을 마친다. 그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위기를 그가 어떤 태도로 마주했는지, 작품활동에 대한 그의 의지가 어떠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어서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사는 게 그렇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다. 때로는 힘들고 혼란스럽지만 그 다음 날에 일이 쉽게 풀리면 보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면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 때도 쉬울 때도 모두 같은 것의 부분일 뿐이다. T. S. 엘리엇이 항상 지적하듯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싶을 때조차도 나는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나의 작품이 나와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작품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책, 못 읽는 남자/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