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위로 - 점과 선으로 헤아려본 상실의 조각들
마이클 프레임 지음, 이한음 옮김 / 디플롯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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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장기적출을 앞두고 이익준(조정석 역)이 10분만 기다렸다가 수술을 진행하자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기증자는 5살 원준이라는 아이의 아버지였고 당일은 5월 5일의 끝자락이었다. 어린이날에 아버지와 함께 자장면을 먹기로 했던 원준이의 6살, 7살, 그 이후의 모든 삶에서 아버지는 없다. 이익준은 원준이가 5월 5일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 기억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10분. 그 시간은 한 사람이 앞으로 맞이할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만큼의 힘이 있었다. 절대 복구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와 무게와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100% 확률의 0%. 불가역이라는 딱딱한 단어를 풀어쓰면 ‘돌이킬 수 없음’이다. 사유의 공간을 온전히 내어준 키워드. 저자의 마음에 닿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들여다본 비탄의 특성이기도 하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참혹하다. 살갗에 직접, 처음으로 닿았던 상실의 기억은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벌써 20년이 흘렀지만, 그 새벽의 감각이 잊히지 않는다. 그의 얼굴과 가슴에 나의 볼을 대고, 날숨과 심장박동을 느껴보려 했던 한 소년의 마음. 하나의 세계가 영원히 닫혔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은 거부의 몸짓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나의 곁을 떠났다. 엄하고 때로는 무서웠지만 나를 무척이나 아꼈던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증명했다고 한다.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로도 슬픈데 굳이 그걸 증명까지 했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학이 다루는 여러 명제로부터 얻은 결론에서 도대체 왜 안온함을 느끼는지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안 되는 것은 어차피, 결국, 이러나저러나 안 된다는 설명은 “파괴, ‘0(zero)’는 모든 생명의 시작”이라는 대사만큼 오글거리지는 않았지만 통찰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포기하면 편하다. 불굴의 의지를 꺾는 허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용기로서.

돌이킬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가 맞이하는 세계는 늘 새로운 세계다. 365일, 다시 돌아오는 계절, 월화수목금토일,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반복되는 일상들. 복제된 것처럼 삶을 채워가는 모든 순간은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삶은 원(圓)이 아니라 선(線)인 것 같다. 선분이라고 해야 맞을까. 유한하게 반복되는 시간이라 여기며 살아온 삶이었는데. 모든 걸음을 물릴 수 없고, 단 한 번만 내게 주어진 것이라는 걸 곱씹을수록 가슴이 미어져 온다. 첫, 처음의 신비로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지난날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저 흘려보낸, 두 번 다시는 겪지 못할 크고 작은 환희의 순간들이 그립다. 사람, 풍경, 소리, 향기, 맛까지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백예린의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이 책에 곁들이면 좋겠다.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새겨진 아름다운 기억 위를 걸으며 또다시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기를. 

세계관의 교정. 저자의 말처럼 이전에 세계를 보는 방식으로 지금의 세계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슬프거나 아쉽지 않다. 세계를 보는 눈은 또 바뀔 테고, 나는 그저 새로운 세계를 흠뻑 만끽하며 살아갈 것이다. 상실과 부재, 우리 삶을 건드리는 모든 감각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얻었다. 때로는 부서져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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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 교회 안의 #미투,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위한 지침서
루스 에버하트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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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숱한 장난과 말썽이 ‘꾸러기’가 붙어 용인이 되던 때의 일이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다. 여느 형제들과 다르지 않게 치고받으며 자랐으나 일방적이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사이였다. 한 날은 방에서 장난을 치다가 본의 아니게 동생에게 치명타를 선사했다. 억누를 수 없는 비명이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오려고 할 때가 있다. 팔꿈치나 정강이가 단단한 물체에 갑자기 부딪혔을 때처럼. 비명이 부모님께 닿았을 때의 결과는 대체로 ‘혼쭐이 난다’였다. 동생의 입을 손으로 막고 사과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들을 건넸다. “쉿! 제발. 미안. 딱 한 번만 봐줘.”

“그날 오후 다시 사무실로(일은 해야 하니까!) 돌아가 보니 보라색 아이리스가 꽂힌 화병이 내 책상에 놓여 있었고 나를 저녁식사로 초대하는 볼링어의 쪽지가 있었다. 나는 어이없고 절망스러웠다.” (60-61쪽)

앞서 짧게 적은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게 만든 부분이다. 이미 과거에 성폭력을 당한 아픔이 있었던 저자가 담임 목사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다음의 심정을 적은 것이다. 일방적이고, 상대방의 주체성을 무시했으며, 타인이 겪은 고통을 제멋대로 재단했다. 나는 악행이 들통 나서 대가를 치렀고, 저자의 가해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저자는 언어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가해자는 축소의 언어를 사용한다. 존재의 뿌리를 흔들어버린 폭력과 억압을 ‘실수’, ‘장난’처럼 가벼운 말들로 치환한다. 치유, 화해라 쓰고 침묵을 강요한다. 기도하겠다는 말로 행동에 나설 용기가 없다는 뜻을 교묘히 숨긴다. 사회적, 집단적 문제를 사적 문제로 바꿔버린다. 일찍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서술한 것처럼 저자도 가해자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저변에 깔린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순결 문화, 강간 문화, 방어적 남성성 등의 핵심 키워드를 (이미 일어나버려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 사례와 연결하여 이해를 돕는다. 여러 사례들은 ‘여성의 객체화’라는 큰 틀에서 묶을 수 있겠지만 각 개념의 본질을 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그만큼 가슴 아픈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피해 여성들과 가족,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동생 다말, 밧세바, 피 흘리는 여인 등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입체적 독해라고 하면 적확하지 않을까. 문맥이나 특정 단어에 관한 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충분히 곁들여서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말은 용감하게 저항했으며(59쪽), 밧세바는 똑똑했으며(193쪽), 피 흘리는 여인은 능동적이었다(83쪽).

이런 글을 써내려가는 내가 다른 누구보다(특별히 남성)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지도 않을뿐더러 나 또한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고 그들에게 고통의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한 사람 때문이다. 그가 말했고, 직접 삶으로 보여준 흔적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반응하는 것뿐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예수님은 문화의 한계 밖에서 살기로 택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은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대하셨다. 예수님에게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였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성별의 구분 없이 도덕 행위의 주체가 된다.” (35쪽)

이 책이 여전히 그늘진 삶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서 불의에 저항할, 적어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용기가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조금씩 더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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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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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리를 훑어보면 진화생물학, 사회심리학 등을 아우르며 현생 인류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 친구-적으로 양분하는 칼 슈미트의 정치에 관한 고전적 정의를 넘어서 따뜻한 시선과 공존의 언어로 우리 삶을 채워야 한다고 ‘다정하게‘ 일깨워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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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안전가옥 오리지널 8
천선란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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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랑 약속해 줘, 내 존재가 버겁고 무서워지면 솔직하게 말하기로. 그럼 네 곁을 떠날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던 말.
떠나지 않고 싶다는 말이기도,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이기도 했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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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시간 - 서로를 책임지는 느린 존재들의 이야기 오봄문고 5
안희제 지음 / 오월의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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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씩 사고 선물도 꽤 받다보니 수십 개의 식물과 함께 살고 있다. 떠나보낸 식물들도 많다.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날 떠난 게 아쉬운 건지, 내가 떠나보낸 게 미안한 건지 확실하지가 않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고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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