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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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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섹스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한 달여 시간 동안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을 책상 위에 두었다. 집에 찾아 온 손님들은 순간적으로 내 눈을 이상한 눈빛으로 응시했고, 오랜만에 찾아오신 어머니는 걱정스런 어투로 “얘야, 이 책을 왜 샀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 그런 책 아니에요”라며 변명했지만 실제로 책을 끝까지 읽은 건 몇 시간 전의 일이다.

 

 

등의 맨살을 하얗게 드러낸 젊은 여인을 그린 표지는 결코 낚시가 아니었다. 저자 제임스 설터는 이 책에 10개의 단편을 담았으며 각 편마다 빠짐없이 성(性)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성은 매우 사적인 주제다. 학창 시절 친한 동성의 친구들과 이성에 관한 얘기를 나누거나 군대에서 휴가 다녀온 동료들의 경험담을 들을 때는 비교적 타인과의 공유가 되었지만 어느 시점에 들어섰을 때 성은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무엇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제임스 설터가 풀어낸 이야기에서는 성이 매우 대범하고도 평범하게 우리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성적 대화는 인물들에게 ‘그리 강렬하지 않은’ 일상의 일부다.

 

 

가령, “그거 알아요?...난 열다섯 살 때부터 섹스 라이프가 괜찮았어요.”-「혜성」중에서

 

 

『어젯밤』은 10편의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인물들의 ‘섹스 라이프’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섹스 라이프의 전말, 냉소, 허무, 회한 등의 나열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이 이야기들이 결코 우리와 먼 얘기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일상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꼭 닮은 소설’에 가깝다. 고미숙 선생의 『호모 쿵푸스』의 카피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를 패러디 하면, “섹스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섹스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섹스하는 존재, 즉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몸으로 교감하는 인간)’이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식으로든 섹스를 한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설터는 『어젯밤』을 통해 우리가 평소 숨겨왔던 혹은 의식하지 않았던 성에 관한 진솔한 얘기에 접근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제인은 갑자기 그녀가 존경스럽게 느껴졌다”-「뉴욕의 밤」중에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갑자기 제임스 설터가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의 프로필을 읽으며 군장교로 오랜 경력을 가진 그가 이성에 대한 환상을 소설에서 뿜어낸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해를 하게 되면서 차츰 제임스 설터의 소설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절정은 「플라자 호텔」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그는 그의 인생 한가운데 거대한 방을 가득 채웠던 사랑을 생각했고,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길 위에서 그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플라자 호텔」중에서

 

 

나는 이 남자의 눈물을 바로 옆에서 보기라도 하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시는 그녀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그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그가 흘린 눈물도 타당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들은 동일한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무한하지 않아서 더 가치있는 것이 인생이듯이. 이 부분과 의미상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다음의 지점이다.

 

 

“내 생각에 한 남자와 자야 하는 횟수엔 제한이 있는 것 같아요.”-「나의 주인, 당신」중에서

 

 

인생은 한 과자상자를 닮았다. 그 상자엔 맛있는 과자와 맛없는 과자가 들어있다. 그 수가 각각 일정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맛있는 과자를 미리 먹으면 그 다음에는 맛없는 과자를 먹어야 한다. 반대로 맛없는 과자를 먼저 먹으면 뒤에는 맛있는 과자가 기다리고 있다. 그처럼 우리가 미리 누군가를 뜨겁고 강렬하게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 보지 않았다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과 섹스를 하는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신화와 같은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우리는 아주 제한된 ‘섹스 라이프’를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정말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거.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있게 되지요.”-「스타의 눈」중에서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 혹시 과거의 어느 날 정말 함께 있고 싶었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호모 섹스쿠스로서 끊임없이 그 누군가를 욕망한다. 마치 중력이 우리의 몸을 땅으로 끌어당기듯이 우리 안의 욕망이 그 누군가를 끌어당길 것이다. 지금 옆에 있는 그(녀)는 우리가 끌어당긴 마지막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이 밤이 그(녀)와의 마지막 밤(Last Night)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 어젯밤(Last Night)의 추억을 그리워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밤의 끝을 뜨겁게 끌어안아야 할 이유다.

 

우리가 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성은 우리가 가장 잘 모르고 있는 주제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숨기거나 은밀하게 다가서기보다 당당하게 제임스 설터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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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각류 크리스천 : 레드 편 - 딱딱한 형식의 껍질 속에 불안한 속살을 감춘 갑각류 크리스천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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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각류들의 가면 무도회는 막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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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각류 크리스천 : 레드 편 - 딱딱한 형식의 껍질 속에 불안한 속살을 감춘 갑각류 크리스천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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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제자훈련원 본부장 옥성호의 새 책이 나왔다. 바로 <갑각류 크리스찬>.

갑각류라는 수식이 불편하지만 그리 어색하지는 않는 이유는 요즘의 교회가 적잖은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쉬쉬하기에 급급한 인상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교회가 세간의 지탄을 받게 된 것에는 교회내에서 상식적인 의문과 질문조차 허용하지 않는 폐쇄성도 한 몫. 교회의 비상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지적하는 입을 막고, 그 입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치부. 그렇게 교회는 자정능력을 잃고 썩어간 것."
...
최근 신학교 교수들이 소속 학교에 대해 소신있는 말을 하자, 좌천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교수들 아래서 배운 자들은 타성에 젖어 있거나 눈치를 보며 책임을 떠넘기거나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하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데 교회는 침묵을 지키니 이걸 사랑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상식이 있으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옥성호의 이번 신간 '갑각류 크리스천'(이하 갑천)은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목소리라 여겨진다. '갑천'에서 교회를 일컬어 '가면 무도회'라고 표현한다. 저마다 믿음과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은 가면일 뿐인 듯한 인상은 나만 받는 것인가. 또 '갑천'에서는 교회를 '외로운 섬'이라 말한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 된 채 비상식적인 상황을 계속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교회는 모습은 교인인 내가 봐도 교회의 '도화(島化)'가 진행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게다가 병원에 안 가고 기도로 병을 고치려다가 사람이 죽는다거나 성경속의 사도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여 독사를 물려 죽는다거나 하는 기사가 올라오는 현시점에서 교회 내에서 상식을 되찾자는 저자의 목소리는 현실적으로 시급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 옛날 예수의 말씀이 모든 이들에게 자유케 하는 진리로 선포 되었다면, 요즘은 스님들의 말씀이 사람들의 심령을 자유케 하고 있다. 교회의 위상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것을 교회는 스스로가 절감하고 있는가. 이건 세상이 악해져서가 아니라, 교회가 악해져서 그런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물론, 자성을 하고 회개는 외치지만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갑천'은 그 실마리를 '회의'하고 '질문'하는 것에 두고 있다. 이미 수많은 회의와 질문이 교회밖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교회 내부에서는 그 목소리가 드물다. 갑천 역시 드문 목소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앞으로 교회 내부에서의 목소리가 유감없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해 본다.

부디, 그 입을 막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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