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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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2025.

영국, 글래스고. 스코틀랜드의 한 지방에서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한다. 이 전염병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남성만 공격한다. 여자는 혹여 걸리더라도, 무증상 보균자, 즉 숙주 역할에 그친다.

2. 전염성이 높다. 증상이 발현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 이틀의 기간이 소요된다.

3. 치사율도 높다. 환자의 약 90%가 사망한다. (10%만이 면역을 갖고 있다.)

남성만 공격한다고 해서, 이른바 남성대역병이라고 불리게 된 역병. 이 역병은 빠르게 확산된다. 발생지인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엎는다. 남성들은 빠르게 죽어나간다. 아버지, 남편, 아들, 형제가 차례대로 죽음을 당하는 이때, 살아남은 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상당히 놀랐다.

팬데믹, 질병관리본부, 사회적 거리두기, 백신 등. 코로나19가 아니었더라면, 소설상의 용어들은 전공자 및 관련자를 제외한 대부분에게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익숙하다. 소설의 배경과, 상황과, 설정이. 그리고 더 놀란 점은 이 소설이 코로나19 이전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저자 또한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기 직전에 내가 팬데믹에 대한 책을 썼다는 사실은 신기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p465).

 

너무나 익숙해진 팬데믹의 상항이라서, 소설속의 상황이 실감났다. 물론 코로나19는 남성대역병보다 치사율이 낮다. 인구의 반 가까이가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코로나19 상황을 겪은 이상, 소설 속의 상황이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 없다. 언제 우리가 코로나19가 터질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어떤 전염병보다도, 코로나19의 파급력과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의 시대는 글로벌의 시대이고, 따라서 병의 확산세 또한 전세계를 망라하기 때문이다.

 

0호 환자를 진찰했던 의사 어멘더 매클린. 그녀는 몇몇 환자의 죽음을 통해, 재빠르게 이 병의 정체를 파악한다. 팬데믹의 징조임을 간파한 것이다. 눈치채자마자, 그녀는 바로 행동한다. 보건국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서 전염병의 징조임을 알린다. 그리고 어멘더는 남편과 두 아들들을 집에 귀가시킨다. 이후 병의 확산이 가시화되자, 아예 병원에 출근하지 않는다. 어멘더의 행동은 대단히 현명했다. 의사로서의 의무를 좌시하지 않으면서, 가족을 우선시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만약 그녀의 말을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현장에서의 신속한 진단으로, 어떻게 보면 조기에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무자는 그녀의 의견을 미쳐 날뛰는 정신병자라며 묵살한다(그리고 책 말미, 이 의견을 낸 실무자에 대해 통쾌한 반전이 있다는 사실!). 그 결과는 인류 사상 최악의 멸종 위기였다(남성 인구 90% 사망은 종의 멸종이라 정의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한데 소설상 당국의 무능함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코로나19의 초기대응에서 성공적이었던 정부가 얼마나 있을까. 무엇보다도 코로나19 발원지로써 중국 정부의 초기대응은 아쉬움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소설상에 등장하는 전염병의 발발, 진행, 경과 등의 단계는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의 단계와 별 다르지 않다. 감염돼서 죽는 경우도 현재 빈번하게 있는 일이다. 소설은 더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했을 뿐, 결국 우리가 겪고 있는 이야기의 확장선상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더 모쪼록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설의 경계와 영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고.

 

엔드 오브 맨의 특징은 다중시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점의 화자는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의사, 기자, 공무원, 병리학자, 인류학자, 보모, 등의 시선을 통해서 사건을 진행시키고 있다. 또한 현재 시제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여성들은 이 팬데믹의 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피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결국 남편과 아들, 아버지와 형제는 병에 걸리고, 죽는다. 그녀들이 가족을 떠나보내는 장면은 서글프면서도 애처로웠다.

 

한편 가족의 죽음에 비관하는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이 상황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도 있다. 극단의 현실 속에서,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 사라진 남성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남자들이 해왔던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 여성들. 여성들이 남성의 공백을 채우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경찰, 군인, 소방, 의사, 기술자 등, 남성들이 독점했다시피 한 영역들이 빠르게 여성의 영역으로 이관된다. 그와 함께 사회의 주도권 또한 여성에게 이양된다. 성차별과, 기술을 통해 신처럼 행세했던 남성들. 그들의 능력을 토대로 지어진 도시는 와해된다(p95).

 

코로나19를 견디며,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일상 회복. 엔드 오브 맨에서도 일상은 회복되지만 그 이전의 일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일상이다. 우리도 과연 그럴까.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확실하게 다를까. 그래도 소설의 끝이 말하는 일상은 일상이기에 의미가 있다. 소설에서 현실의 맥락을 짚으며, 일상의 회복을 간절하게 바란다.





 

.

 

1. 남성대역병의 아이러니한 효과. 남성 인구와 마찬가지로 남성 테러리스트도 급감한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은 어느 시대에나 남자들이라는 사실!

 

2. 남성대역병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정부를 전복시키고, 나라를 바꿨으니. 그중에서도 괄목할 상황은 체제에 따라 정부의 지속 여부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살아남았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몰락했다(그렇다면 북한의 운명은? 책에 나온다!). 그 이유는 뭘까. 민주주의를 제외한 나머지 체제들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잘 허용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독재와 전제정치의 경우는? 책에서 확인하시길.

 

3. 중국이 코로나19를 초래한 것이 현실이라면, 소설에서의 중국의 상황 또한 주시해야할 부분이다. 좋든 싫든, 세계에서 중국이 차지한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듯.

 

 

4. 남성대역병의 의도치 않은, 또다른 긍정적 효과. 작중에서는 이 병을 통해 한 여성이 남편의 폭력에 해방될 수 있었던 경우를 보여준다. . 코로나19로 인해 의도치 않게 긍정적 효과가 발생한 것이 뭐가 있었지? 확실히 있다. 사소한 예지만 코로나19를 핑계로 명절과 제사 참여가 줄어든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코로나19가 야기한 부차적인 효과일 뿐, 이 때문에 코로나19가 좋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5. 여기 나온 여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모두 훌륭했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더 인상적이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어멘더, 그리고 프랜시스. 그녀들의 책임감, 의무감, 그리고 헌신적인 가족애 및 인류애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6. 작가님. 대한민국을 언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쩔 수 없다는……, 헤헤.

 


인상깊은 구절

 

 

우리는-여자든 남자든-는 모두 인간일 뿐이다. 단지 유전 법칙 혹은 운명의 장난으로 면역이 있다거나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일은 없다. p329

 

손쓸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지금, 우리는 어떻게든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p347

 

우리는 모두 편향되었다. 우리는 모두 달라졌다. p460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으나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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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티튜트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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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명성이 자자한데다가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로 많이 팔린다.

소설들이 술술 잘 읽히고 재미있다. 작품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대중과 비평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작가다. 호킹 지수를 따질 때 두 스티븐(스티븐 호킹과 스티븐 킹)의 책은 대조군으로 잘 활용된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호킹 지수가 6.6%에 불과하다. 스티븐 킹의 호킹 지수는? 대체로 90%를 넘는다.

 

인스티튜트역시 호킹 지수 90% 이상을 충분히 달성할 것 같다.

이야기의 제왕이라 불리는 만큼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괜히 유명한 것이 아니다. 정말 오랜만에 정신없이 책에 빠져들었다.

 

1권이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인물, 팀 제이미슨.

경찰로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관두고, 시골 마을에서 야경꾼으로 일하게 된다. 생각보다 등장 횟수나 비중은 크지 않다. 대단한 활약을 펼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에 그친다. 팀이 존경스러운 점은 루크의 이야기를 믿어주고, 따라줬다는 점이다. 루크의 말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팀은 아이의 사정을 경청하고, 침착하게 대처한다.

 

게다가 그는 시설로 가자는 루크의 제안을 전적으로 수용한다.

보안관서는 습격당했다. 탈출한 아이를 데리러 온 시설에서의 습격이다. 습격 탓에 보안관 및 다수의 인원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신고해서 공권력에 의한 해결을 바라지 않을까. 시설에 있다는 다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위험을 얼마나 감수할 수 있을까? 아무리 루크가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지만, 초능력을 발휘한다지만, 아직 어리고 미성숙한 아이의 전략을 따라주는 어른이 몇이나 될까? 그의 포용력과 이해심에 솔직히 감탄했다.

 

인스티튜트에 등장하는 어른들 대부분이 인간 이하의 쓰레기라면(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어른들은 대부분이 시설측 인간들이다), 팀은 선한 어른을 상징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을 위해, 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아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내고, 오갈데없는 루크를 맡는다. 팀과 함께라면, 루크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팀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시설측 인간들은 최악이다.

모든 범죄와 악행을 통틀어서, 나는 아이를 대상으로 한 악한 짓만큼 최악의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어린 아이들을 유괴한다. 대부분 열 살 내외의 어린 아이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죽인다. 끌려온 아이들은 각종 학대와 유린과 고문의 대상이 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아이들에게 말을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응징을 가한다. 여기에서 아이들은 축생이나 다를 바 없다. 불복종하면 뺨을 때리고, 전기봉으로 충격을 준다. 실험을 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를 수조에 넣는다. 루크는 수조 고문을 간신히 버텨내는데, 그 과정이 잔인하다. 15초씩 늘려가며 330초까지 수조에 아이의 머리를 처넣는 끔찍하도록 비인간적인 행위. 이들은, 어른도 힘든 고문행위를 태연하게 아이에게 행한다.

 

이들은 말을 잘 들을 경우 아이들에게 보상을 준다.

그 보상에는 술이나 담배가 포함되어 있다. 술과 담배는 아이들에게 더 치명적으로 유해하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아이들에게 미칠 유해성과 위험성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근무하는 직원 및 요원들은 대부분이 전쟁을 겪은 전직 군인 또는 경찰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충분히 겪은 이들은 이 극악무도한 시설에 훌륭히 적응했다. 휴가를 받으면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직원들 대부분이 가족이 없다고 나온다. 작중에선 일이 그들을 집어삼켰다고 표현한다. 정상적인 범주의 가족이 있고,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한다면 이런 끔찍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없을 터. 애초에 이들에겐 죄책감이나 죄의식은 거의 없다. 루크를 잡으러 갔으나 오히려 잡히게 된, 총책임자 식스비 부인이나 에버슨 박사의 대응은 가관이다. 통증을 호소하고 변호사를 요청한다. 이런 뻔뻔한 대응에 루크는 이렇게 고함을 지른다.

 

전기봉도 아파요! 주사도 아파요! 물속에서 숨을 못쉬는 것도 아프고! 그리고 당신은 머릿속이 열려 본 적이 있어요? 머릿속이 망가져 봤어요? 그게 제일 아파요!”

 

주사.

초능력을 제어하고, 발현한다는 목적으로 놓는 주사. 납치된 아이들은 뇌유래 신경인자, BDNF가 높은 아이들이다. BDNF가 높으면 텔레파시나 염력 같은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BDNF 검사를 받으므로, 시설에서는 수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수치가 높은 아이들을 관찰하다가, 시설로 납치해서 데려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루크를 도와준 모린의 폭로로 밝혀진다.

 

데려온 아이들은 앞건물에서 실험과 훈련을 받는다.

이 실험과 훈련을 통해서, 초능력은 발달되고 강화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뒷건물로 옮겨지는데, 이때 작업에 투입된다. 이 작업은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사업이다. 조국과 세계에 봉사하는 성스러운 작업이다. 아이들의 초능력을 사용하면, 특정 인물을 조준해서 죽일 수 있다. 자살을 유도하거나 사고를 내서 죽인다. 초능력을 쓸 때마다, 아이들의 두뇌는 망가진다. 두통이 심해지다가 끝내 정신이 돌아버리게 된다. 쓸모가 없어진 아이들은 머저리 공원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 묘사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살아서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뒷건물에는 시신을 최대한 빨리 처리할 수 있도록 화장 시설이 갖춰져 있다.

 

시설에서 일하는 자들은 이 과정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죽는 사람들은 위험인물이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미래를 보는 예지자가 있다. 예지를 통해 미래의 위험을 보고,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예방 조치를 취한 것이다. 시설은 하나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 시설이 있고 이를 관리하는 조직이 있다. 조직에서 파견된 간부는 60년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말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우리 쪽에서 예방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수십 억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건졌다. 우리가 보호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루크 덕분에, 팀이 거기에 가담한 덕분에, 이제 그 보호막이 사라졌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범죄가 일어나기 전 범죄자를 예측해 아예 범죄 가능성을 차단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내포한 불확정성으로 인해 모든 사건이 발생했으나 시스템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을 전적으로 믿는다. 예지자의 절대성을 맹신하고, 변수를 차단하며,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긍정한다.

 

조직 간부의 말에 루크를 비롯한 아이들은 순간 흔들린다.

조직의 말처럼 세상이 멸망한다면? 우리 탓이라면? 괴로워하는 칼리샤를 위로하며 하는 팀의 말이 압권이다.

 

너희 탓이 아니야. 너희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 남자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너희들한테 조용히 지내라고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 삶을 오염시키기 위해서였어. 그 남자의 수법에 넘어가지 마라, 칼리샤. 너희들 모두 그러면 안돼. 우리 인간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한 가지를 우선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너희들은 그 본능을 따랐을 뿐이야.”

 

원하지 않는데 희생을 스스로 감당할 필요는 없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조직이 주장하는 60년은 이용당하고 버려진 아이들의 슬픔과 원한으로 지탱된 세월이었을 뿐이다.

 

모린의 폭로가 세상에 알려지고 조직이 일망타진되는 결말은 없었다.

시설은 파괴되었고, 직원들 대다수가 죽는다. 그들의 죗값에 비하면 너무 편한 죽음이다. 모린이 남긴 말처럼, 그들에게 부디 지옥이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그렇지만 조직은 남아 있다.

오히려 조직은 살아남은 이들을 협박한다. 발설하면 죽이겠다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이 비극이 언젠가 다시 재현된다니,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루크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루크는 용감한 아이다. 탈출했지만 혼자만 살지 않고 끝까지 친구들을 구하려 애썼다. 어린 아이라고 방심했던 대가는 컸다. 희생정신, 강인한 의지, 우월한 천재성. 그는 조직에 맞서 싸울 역량을 보여줬다. 루크가 조직을 궤멸시키는 내용의 인스티튜트2부가 나왔으면 좋겠다.

 

주인공 루크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루크는 열두 살에 메사추세츠 대학과 에머슨 대학 입학을 이야기하는 천재다. 납치된 상황에서도 그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인식할 수 있었다. 우월한 지적 능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한 잡역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자기 편으로 만든다. 모린은 루크의 탈출에 공헌을 했을 뿐더러, 시설의 실체를 폭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 또한 그의 지적 능력과 전문성으로 인해 탈출할 수 있었던 점을 상기하자. 극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남들과 확실히 다른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운도 필요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카메라, 노후화된 감시시설, 태만한 관리자들이 적극(?) 협조해준 행운이 따랐다.

 

그러나 이 아이가 비범한 것은 다른 데에 있다.

루크는 탈출 과정에서 불굴의 용기와 초월적인 인내심을 보여준다. 위치추적기가 들어 있는 귓불을 잘라내는 장면은 소름이었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도 비슷한 면모를 보이긴 한다. 허나 앤디보다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이는 고작 열두 살이다. 열두 살의 아이가 칼로 귓불을 잘라내고, 통증과 갈증과 허기를 참으며 며칠을 버티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극한의 도전을 즐기는(?)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라도 열두 살 때는 안 이랬을 것이다. 아이들이 대체로 충동적이고 인내심이 약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루크는 심하게 비현실적이다. 다른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칼리샤나 에이버리나, 어린 나이라는 점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침착하고 지능적이다. 초능력자들은 정신연령이 평균보다 높다는 설정이 아니라면, 현실과 다분히 어긋나는 설정이라고 본다.

 

루크의 탈출은 가장 몰입감이 있었던 부분이었다.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과 생생한 묘사 덕분에, 모처럼 바짝 집중해서 읽었다. 마땅히 탈출하리라고 봤지만 긴장하고 조마조마했다. 쇼생크 탈출의 탈출이 생각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끌려가느니 죽어버리겠다며 의지를 불태운 루크. 마침내 시설을 탈출하고 자유로운 공기를 느끼며 울음을 터트렸다는 대목에서, 비를 맞으며 환호하는 앤디가 떠올랐다. 탈출 준비나 실행을 보면, 쇼생크 탈출의 오마주로 여겨진다(쇼생크 탈출의 원작 작가가 스티븐 킹이란 사실을 고려하면 셀프 오마주인 걸까?).

 

시설 일당의 습격전도 볼 만 했다.

습격조로 구성된 자들은 킬러로 특화된 자들이다. 시골 마을의 보안관들이 프로페셔널과 맞설 수 있을까 살짝 걱정했다. 스티븐 킹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습격의 긴장감을 자연스럽게 조성해낸다. 이들을 물리치는 키는 생각보다 못한 데서 왔다. 팀이 고전하는 동안, 노숙자 애니과 마을 주민들이 적들을 훌륭하게 물리친다. 애니가 총을 겨누면서 하는 말.

 

여기는 남부거든.”

 

미국 남부, 멋지다!

 

습격조에는 루크를 납치하고 부모를 죽인 이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 역시 총격전에서 사망한다. 루크가 보는 눈앞에서. 인과응보랄까. 속이 후련했다.

 

시설이 무너지는 데에는 사실 남은 아이들의 역할이 더 컸다.

루크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초능력을 모아 결국엔 시설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시설이 무너질 때, 아이들도 죽는다. 루크의 탈출을 돕고, 반란을 적극적으로 주동했던 에이버리도. 루크가 지성에서 천재성을 보인다면, 에이버리는 초능력에서 천재다. BDNF 수치가 90이 넘는다. 처음 등장할 때는 눈물콧물 흘려대며 소변을 지리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던 어린 아이. 에이버리 역시 고작 열 살이다. 이후 에이버리는 루크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친밀해진다. 유약하고 박약했던 어린아이가 루크의 친우이자 든든한 조력자로서 성장해간다.

 

칼리샤, 니키 등이 무너지는 시설 밖으로 탈출할 때, 정작 에이버리는 남는다.

누군가는 초능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초능력이 가장 강한 그가 그 자리를 지켜야 됐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어.’라고 생각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에이버리. 루크는 영웅이 있었다면 내가 아니야, 에이버스터였지.’라며 친구를 그리워한다.

 

도덕성을 상실한 어른들과 대조적으로, 아이들은 놀랍도록 선하다.

아이들은 절대 인간성을 잃지 않는다. 자신들이 당했던 악행을 되갚아주고 싶지만, 그러면 똑같은 인간이 된다며 스스로를 절제한다. 정말 아이가 맞나 싶다. 난 처절하게 응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시설의 인간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들은 너무 편하게 죽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직원도 있고. 난 아이들보다 인격 수양이 덜됐나보다.

 

살아남은 소수의 아이들- 루크, 니키, 칼리샤, 조지.

이들은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아이들에게 닥친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인간의 본성을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쉽게 어른과 사회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희망은 남아 있다. 서로를 향한 신뢰, 유대감, 그리고 희생. ‘저들과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은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해나갈 것이다.

 

.

 

트럼프 대통령은 작중에 언급되는 영예를 누렸다.

킹은 특별히 트럼프에 대해 그 골빈당이라는 표현으로 자국 대통령에 대한 호감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까닭에, 안타깝게도 킹의 특별한 이 호감 표시는 후속작에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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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공허한 십자가≫ 개정판 서평단 모집(자음과모음) 


https://blog.naver.com/jamo97/2227008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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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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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이 책은 퀴어 장르에 속한다.

사실 퀴어 문학은 처음 읽어본다. 퀴어의 뜻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이번 기회에 사전에서 검색해봤더니, ‘퀴어는 성적 소수자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의 경우엔, 여자와 여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아하. 그럼 BL 또한 퀴어의 하위 장르에 속하는구나. 이런 쪽은 거의 기피했기 때문에, 솔직히 당황했다. 하지만 이 책이 퀴어 장르로써 처음은 아니다. 여자들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영화 아가씨를 통해서였다. 아가씨또한 처음 봤을 때는 엄청 기겁을 했다(동성애인 줄 모르고 봤다). 그러다가 숙희와 히데코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비선호하는 장르임에도, 나는 아가씨의 팬인 것 같다. 대본집을 봤고 최근 텀블벅을 통해 공식사진집도 예약 구매했다. 아가씨의 선례가 있었던 덕분에, 이 책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레즈비언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아가씨의 두 아가씨들과 달리,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의 두 아가씨는 레즈비언이 아니었다. 난리 아이와 쇼다 사이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들에겐 각자 남자친구가 있었다. 둘 다 여태까지 여자를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는 사이카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친구 소우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와 결혼할 계획이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카는 그저 남자친구의 친구 애인일 뿐이었다. 사이카와 이런저런 일들로 둘끼리 만나며 더 친밀해졌어도, 친구 이상의 관계는 단연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아이였다.

 

아이는 단순히 친구로 대했던 사이카에게, 갑자기 고백을 받는다. 사이카는 아이에게 키스를 한다. 그녀의 저돌적인 공세에 아이는 깜짝 놀란다. 불쾌함을 표시하고, 화를 낸다. 사이카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다고.

 

처음엔 아이는 그런 취향이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원래 그런 취향이 없기는 사이카도 마찬가지. 사이카는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다. ‘아이라서 좋아하는 것이다. 사이카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백에, 결국 아이도 마음이 흔들린다. 보편화된 사회적 관습대로, 이성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 자체가 흔들린다. 아이의 거부감은 치열한 내적 갈등을 거쳐 수용 단계로 나아간다. 그 과정은 결코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아이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아이 또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게 되는, 사이카와 연인이 되는 그 과정은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뒤로, 아이와 사이카는 행복한 연애 생활을 즐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사랑에 크나큰 시련이 생긴다. 시련이 생긴 이후 두 사람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에서 나는 아이의 달라진 모습에 주목했다.

 

이들의 연애는 사이카의 정열적인 구애에 아이가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사이카는 활동적이고, 열정적이다. 이에 비해 아이는 수동적인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사이카와 연애를 하면서 아이는 차츰 달라진다. 아이가 이전 소우와 연애했을 때엔,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좋아하는 여성을 연기했었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남자를 내조하는 타입을 연기했다. 소우와 결혼하면 일을 그만둘 생각이었고,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소우처럼 강해질 수 없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아이는 변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조금씩 확신과 자신을 가지면서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p197)한다.



 

그리고 아이는 사이카를 점점 더 깊게 사랑하게 된다. 이후, 아이는 사이카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사이카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아이는 희생을 감수한다. 직장에서도 모습이 달라진다. 매사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한다. 그 결과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사이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사이카 또한 아이를 만남으로써 일에 몰두하고,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다.

 

사이카는 아이에게 바보 같은 고백을 해서 억지로 미래를 바꿔버렸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아이는 더 멀쩡하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글쎄. 사이카를 만남으로써 아이의 인생이 바뀐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미래는, 아이에게 훨씬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미래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 미래는 사이카가 존재하는 미래기에, 아이에게 더 의미 있는 미래가 아닐까.



이 책은 퀴어 로맨스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한 여성의 주체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 의존적이며 수동적으로 살아갔던 한 여성이, 누구보다도 멋진 여성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담긴 이야기라고.

 

또한 책을 읽으며 깊게 생각을 해보게 됐다. 과연 남자와 연애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인 걸까. 사회적 관습에 따라, 이성간의 사랑은 정상이고, 동성간의 사랑은 비정상인 걸까.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말은 뜻 깊게 다가온다.

 

아무리 성실하게,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 해도 정상에 필요한 조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 절대 따라잡을 수 없어. 남들 보란 듯이 멋지게 살고 싶지도, 남들 눈치 보며 살고 싶지도 않아.” p359





 

마지막으로 운명의 과학이란 책에서 나온 말을 옮기면서, 퀴어 로맨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생물학자들은 임의의 단일 종에서 나타나는 엄청나게 다양한 행동들을 관찰하는 일에 신속하게 익숙해진다. 다양한 행동들이 모두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가 성적 취향만큼 적나라하게 적용되는 곳도 없다. () 성적 취향에 관한 한, 그리고 인간의 뇌에 관한 한 정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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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장을 바꾸기 전, 아이는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하는 서비스직이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지목해서 진상을 부리는 고객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한데 사이카가 그 고객을 해결해준다. 그 해결방법이 인상적이었다. 진상 고객을 물리치는 데 통쾌했지만, 강에는 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나 해서 한편으로 좀 씁쓸하기도 했다.

 

2. 사이카는 연예인이다. 그래서 168cm48kg이란, 표준에 한참 미달하는 체중을 갖고 있다.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사이카, 심하게 말랐다……. 부럽다.

 

3. 이 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아이와 사이카의 전 연인들, 소우와 다쿠마다. 그들은 아이와 사이카에게 일방적으로 배신을 당한 셈인데도, 결국엔 너그럽게 용서한다. 전 연인들의 달라진 성적 취향에 대해서 비난하지도 않는다. 둘 다 대인배다. 아이, 사이카. 너흰 소우와 다쿠마에겐 솔직히 죄인인 거 맞다? 환승 연애잖아.

 

4. 사이카의 어머니는 정말 정떨어진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를 반대했을 땐 언제고 막상 자신이 힘들어지니까 아이에게 사이카를 맡긴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사이카 재산 손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습은……사이카가 절연하는 것이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5. 작중에서 사이카가 즐겨듣는다며 니콜라이 카푸스틴이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현재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가 언급만 되어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유튜브에서 카푸스틴의 곡을 찾아서 들어봤다. 곡에 대한 아이의 감상을 반추하며 들으니, 내게도 카푸스틴의 연주가 존재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사이카의 말처럼, 마음을 파고드는 음악은 어떤 상황에 들어온다(p371).

 

6. 두 사람의 애정씬에서 영화 아가씨의 비슷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

 

 

 

인상깊은 구절

 

주변이 민감할 때에는 둔감하게, 주변이 둔감할 때에는 민감하게. p297

 

여운. 지금 내 삶은 전부 당신의 여운이다. 현재의 모든 일이 모든 당신과 보낸 과거와 이어져 공명한다. p311

 

바텐더 “(애인이) 어떤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이 여름을 물들이는 태풍.” p311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으나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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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공부합니다 - 음식에 진심인 이들을 위한‘9+3’첩 인문학 밥상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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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기원, 이력, 문화, 역사에 대해 인문학적, 역사학적으로 연구 및 탐구한 내용. 책 제목이 알려주듯 음식에 대해 공부하는 책이다. 흥미 위주의 단순한 책이 아니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작가님, 진심이시구나!! 거의 논문 뺨치는 전문적인 지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대상을 특정 계층으로 한정했다. 관련 전공 대학생과 대학원생이거나, 음식 관련 프로그램 작가, 음식 칼럼니스트 등 음식을 학문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밝혔다. 물론 음식에 진심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 음식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렵거나 까다로운 책은 아니니까.

 

35년간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며 음식인문학자임을 자부하는 저자, 주영하 선생님. 그가 여기서 다루는 음식은 다음과 같다. 라면, 아이스크림, 막걸리, 불고기, 두부, 냉면, 배추김치, 잡채, 전어, 떡국, 비빔밥, 짜장면. 12가지의 음식들이다. 음식을 공부합니다는 다름아닌 이 음식들의 컬처&히스토리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중적인 음식들. 누구나 다 아는 음식이지만, 정작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음식들이 가진 사연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랐을, 음식의 이력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무엇보다도 음식에 대한 작가님의 집요한 열정과 노력집착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라면의 기원을 알기 위해 기원지라 알려져 있는 란저우까지 찾아간다. 그리고 인스턴트 라멘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란 사람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를 확실하게 검증하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안도의 고향인 타이완에 가서 그의 친척을 만나고 일본 문헌을 뒤지고 중국 선양에서 조사를 한다. 치밀한 조사 끝에 낸 저자의 결론은, 안도가 인스턴트 라멘의 대중화를 연 사람은 맞지만, ‘라멘이란 단어를 개발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이다.

 

또한 저자는 사료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고문헌이라 해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문한다. 중국 대부분의 책이나 웹사이트에서는 두부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중국 한나라의 왕족 유안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저자는 사료의 진실성에 대해서 엄격한 분석 및 검증을 거친다. 그 결과 두부는 당나라 후기 중국 대륙의 북방 유목민과 남방 농민의 교류가 잦은 과정에서 탄생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교류를 하면서 치즈 만드는 방법에 착안하여 두부를 발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꼼꼼하고 치밀한 자료 조사 및 현장 검증으로 인해,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 카더라 식의 미확인된 내용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제외하고, 확실하게 검증된 사실만을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믿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내용 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꼈던 부분을 정리해본다.





 

1. 한국 최초의 라면은 삼양라면이었다. 삼양라면이 최초로 출시되었을 때 반응은 완전히 냉담했다. 왜냐하면, 당시 소비자들은 라면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라면이 라면(羅棉)’, 곧 옷감의 한 종류로 여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p27)! 그래서 삼양식품은 광고 전략을 바꿨다. ‘즉석 삼양 라면에서 즉석 국수 삼양 라면으로. 이 마케팅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라면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이 있은 후로 오늘날, ‘라면을 옷감으로 착각하는 소비자들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2. 예전만 해도 오래된 요리법, 가령 조선시대 요리책에 나오는 요리법을 찾으려면 도서관의 고서실을 방문해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훨씬 편해졌다. ‘한국전통지식포탈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음식 이름을 입력하면 논문, 향토음식, 전통식품, 생활기술 등으로 분류된 자료가 뜬다(p68). 사이트의 주소는 www.koreantk.com 이다. 이렇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여러 관련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어서다.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던 이성우 교수님을 비롯, 특허청 연구원들에게 감사드린다.

 

3. 왜 숯불에 구운 불고기가 맛있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숯불에서 나오는 복사열때문입니다. 이 복사열이 고기 표면에 얇은 막을 만들어 육즙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숯불에 구우면 육즙의 감소량이 적고 연해지는 정도도 다른 불판보다 좋습니다(p74).

또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로, ‘맥적(貊炙)’이 불고기의 기원이라고 하고 있다. 한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맥적을 불고기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최남선이며, 그가 근거로 인용한 중국 문헌은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소설에 가까운 책이라서 신뢰성이 없다는 얘기다. 또한 어떤 음식 칼럼니스트는 불고기가 일본의 야키니쿠에서 왔다고 주장했다는데, 저자는 이를 부정한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불고기가 일본식으로 변용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불고기는 1930년대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평양에서 유행을 탄 불고기는 중국 선양 및 베이징에선카오뤄가 되었고, 일본에선 야키니쿠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평양 사람들이 피란왔을 때 평양식 불고기를 서울에 전파했다는 것이 저자가 추적한 불고기의 역사.

 

이로써 확실한 사실. 불고기는 우리나라 음식이다!!

 

4. 1970년대 잡채 요리법 중 재료에 맛난이라고 있다. 여기서 맛난이란? 인공조미료 MSG를 가리킨다고. 예나 지금이나 MSG는 필수?

 

옛날과 오늘날의 잡채는 재료가 다르다. 지금은 잡채라 하면 당연히 당면이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예전의 잡채는 당면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소스로 겨자즙이 많이 쓰였다고 한다. 오늘날 양장피의 맛과 비슷했을 거라고. 잡채에 당면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다. 또한 잡채를 만들 때 사용하는 진간장은 19세기 후반에 개량된 일본식 간장이다. 진간장이 일본식 간장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조선간장이 단맛보다 짠맛이 강한 데 비해, 진간장은 짜면서도 단맛이 강하다(p161). 일본식 간장이 들어왔을 무렵인 일제 식민지 시기엔 일본간장이 환영을 받지 못했다. 조선인의 입맛에는 일본인 간장이 달기만 할 뿐 깊은 맛이 없었기 때문이라고(p162).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요리에 진간장이 들어간다. 어느새 우리는 달달한 일본식 간장에 익숙해져버리고 만 것이다.

 

5. 11일 설날이 되면 당연하게 먹는 떡국. 한데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근래에 생긴 것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떡국을 먹으려면 집에서 불린 멥쌀을 떡집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가래떡을 직접 만들어야 했다. 떡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가래떡을 만드는 과정이 소개되어 있는데, 시간도 힘도 많이 들어서 매우 번거롭다.

 

그래서 떡국은 대중적이지도, 명절 음식으로 선호되지도 않았다. 조선 시대, 서울 지방에만 한정해서 설날에 떡국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오히려 만둣국이 더 선호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서울 사대부들은 설날 음식으로 만둣국을 먹었다. 그러다가 만둣국이 떡국으로 바뀌고, 서울의 풍습에 따라 지방의 사대부 집안에서 떡국을 먹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여건이 되는 사대부 집안에서나 먹었지 서민은 아예 먹지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쌀이 워낙 귀했어야지). , 떡국은 본래 서울 지역의 설날 음식이었다(p207).

 

오늘날 전국적으로 떡국이 명절 음식이 된 까닭은 1970년대 정부의 캠페인과 언론 홍보 때문이었다. 또한 쌀 생산 및 공급의 증가, 공장 시스템의 도입 등의 요인 등이 떡국의 대중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이야 흔하게 먹는 음식이지, 옛날엔 떡국이나 국수나 귀한 음식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역사적 흐름에 따라 풍습과 관습이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제사 또한 그 대상에 해당하지 않나? 제사 또한 역사적으로 원래부터 있었던 고유의 관습이 아니었다. 역사를 따져보면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유교적 관습에 불과하다. 제사 또한 시대적 흐름과 변화에 발맞춰 합리적으로 개선변화해야 할 대상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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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 및 문헌조사, 현장검증은 어떻게 보면 연구자로서의 기본 소양이다. 한데 저자의 경우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저자는 김치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 과정에서 직접 김치를 담갔다! 아무리 문화인류학적 음식 연구라고 해도 직접 요리를 해봐야한다며(저자는 남자다). 작가님, 리스펙트!

 

2. 앞서 이 책의 신뢰도가 높다고 설명했지만, 저자는 이 책 또한 확증편향으로 읽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저자 또한 사료를 놓치거나, 잘못 읽거나, 오독을 할 수 있다고. 에필로그에서 교자의 유래에 대해서 잘못 알려준 사례를 소개하면서 하는 말이다.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미 조예가 깊은 분야임에도 계속해서 노력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에 존경을 표한다. 참고로 일본어 교자는 한국어 교자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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