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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비 터너는 의대에 진학할 예정이다. 가난하지만 명석한 그는 탈리스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다. 어머니가 그 집안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것을 계기로, 로비는 탈리스 가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탈리스 가문의 장녀, 세실리아는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이자 대학 동문이다. 어느 날, 탈리스 저택의 분수대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낀다. 둘은 서로가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한다.
막 연인이 된 이들. 그들에게는 장밋빛 미래만이 있을 것 같았다. 로비에게는 전도유망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의대를 졸업하면 의사가 될 미래. 게다가 그에게는 막 연인이 생겼다. 아름답고 다정한 연인, 세실리아가. 그러나 그의 미래는 한순간에 바뀐다. 나락으로 떨어진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리고 그를 그 사건의 범인으로 주목한, 단 한 사람에 의해.
『속죄』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로비와 세실리아가 아니다.
탈리스 가문의 막내딸이자 세실리아의 동생 브리오니가 이 소설의 화자다. 『속죄』는 그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로비의 시점에서 써봤다.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뒤에도, 브리오니의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찰자 시점이든 주인공 시점이든, 서술자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상 어느 정도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속죄』의 화자는 ‘믿을 수 없는 화자’다. 어린 소녀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그리고 노인이 되기까지 그녀의 관점은 온통 착각과 오해로 일관된다. 그렇다. 브리오니의 문제는 그녀가 잘못을 깨달은 뒤에도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헛된 망상과 아집에 사로잡혔던 어린 시절도 모자라, 그녀는 마지막까지 독자를 기만한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한 소녀를 강간했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다. 그 오해를 하게 된 이유가 있다. 브리오니는 로비와 세실리아의 애정 행각을 목격했다. 그녀는 그것이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다. 앞서 목격한 분수대에서 언니의 행동- 겉옷을 벗고 분수대에 들어간 것 또한, 로비의 강요 탓에 언니가 억지로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로비의 지나치게 외설적인 편지( 브리오니는 남의 편지를 함부로 읽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언니를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녀의 심증을 합리적으로 굳히는데 한몫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브리오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로비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사촌인 롤라를 강간한 범인으로. 그녀는 확신한다. 뚜렷하지 않은, 실루엣만 봤을 뿐인데. 브리오니가 로비라고 단정한 순간, 로비는 범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피해자인 롤라는 브리오니의 말에 편승한다. 사실은 범인은 로비가 아니라는 진실을 희미하게 부정한 채. 모든 것은 브리오니가 주도하는 상황에서, 롤라는 피해자로서의 입장에 충실하면 됐기 때문이다.
브리오니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로비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한다. 브리오니의 말에 따라 로비는 체포되고, 감옥에 간다. 의대생으로서 빛나는 미래는 사라졌다. 로비는 창창한 나이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 오직 세실리아만이 그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로비가 범인으로 확정된다. 이후, 경찰은 로비에게 수갑을 채워 끌고 간다. 브리오니는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데, 끌려가는 로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세실리아를 발견한다. 브리오니의 시점인 탓에 독자는 둘의 대화를 알 수 없다. 그녀는 세실리아가 로비를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독자는 브리오니의 추측이 억측임을 잘 알 수 있다. 과연 로비의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두 사람의 대화는 비극적인 그들의 운명만큼 애틋했다. 슬프게도, 브리오니의 오해가 불러일으킨 두 연인의 비극은 이제 시작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로비는 병사로 차출된다. 3년 6개월의 감옥살이 끝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소모품의 처지로 끌려나온 것이다. 로비는 패잔병이 되어 적지에서 탈출하는 상황이다. 독일군의 공습이 수시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버틴다. 그런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단 하나, 세실리아의 편지였다. 세실리아의 편지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가 매주 보내는 편지가 아니었더라면, 감옥 생활도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로비가 끌려간 뒤, 세실리아는 가족과 의절했다. 그녀는 간호사가 됐다. 브리오니의 거짓 증언은 로비뿐만 아니라 세실리아의 운명까지 바꾼 것이다. 로비가 군에 가는 대신 조기 석방되었을 때, 잠시간 두 사람은 간신히 해후한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30분 만에 그들은 헤어져야 했다. 로비는 입대해야 했고, 세실리아는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서재에서의 짧은 추억만이 유일했던 그들의 사랑은, 또다시 이 짧은 순간을 추억으로 버텨야 할 운명이었다. 로비에게는 한 가지 목표만 남았다. 무죄를 입증하고, 세실리아와 결혼하여 당당히 살아가는 목표. 마침 그는 브리오니가 무죄 입증을 도울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증언을 번복한다면, 로비의 억울한 오명 또한 벗겨질 수 있지 않겠는가.
브리오니가 무죄 입증을 돕겠다고 했을 때, 로비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애초에 그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그애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상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p323)이라고 생각한다. 브리오니에게도 참작할 여지가 있긴 하다. 그녀는 당시 어린애였다. 그렇다고 해서, 로비가 그녀를 용서해야 할까? 로비의 말대로, 모든 어린애가 그렇게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태도로, 시간이 지나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회의를 갖지 않을 만큼 지독할 수는 없다.
로비의 말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브리오니가 속죄의 대가로 무슨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 그녀가 간호사가 돼서 힘든 나날을 보내든, 작가가 돼서 속죄의 글을 쓰든, 그것은 다 자기위안에 불과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로비의 망가진 인생이 회복되기라도 하던가? 브리오니의 생각대로 답은 단 하나. 유일한 해결책은 과거를 되돌리는 것(p403)밖에 없는데.
브리오니는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후회한다. 전쟁중, 그녀는 용기를 내서 세실리아와 로비를 찾아간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진실을 말하고 고백하겠다고 말한다. 속죄를 하기 위해, 그녀는 글을 쓴다. 그녀가 쓴 그 글이 이 소설이다. 책 초반부 서술에서 나왔던, 브리오니의 자전적 소설. 1935년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 아침에 직접 목격한 일을 소재로 한 ‘편견 없는 심리적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품(p67).
『속죄』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어린 브리오니가 로비를 고발한 사건, 2부는 로비가 병사로 전쟁 중에 겪는 일, 그리고 브리오니가 간호사로서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2부는 브리오니가 로비와 세실리아를 만나서 용서를 구하며, 속죄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는다.
※ 스포일러가 있어요!

3부는 브리오니가 일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녀는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다는 선고를 받는다. 제정신을 유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사실 브리오니는 그때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두 사람, 세실리아와 로비를. 만났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있었던 일이었다. 브리오니의 소설에서나 존재하던 ‘행복한 결말’이었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브리오니는 말한다. 로비는 패혈증으로 죽었고,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죽었다는 ‘냉혹한 사실주의’를 차마 독자들에게 알릴 수 없었다고.
심지어 이 소설은 출판되지 못했다. 명예훼손에 걸리기 때문이다. 브리오니의 공범자들이 동조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였던 롤라는 진범 마셜과 결혼했다. 부호인 남자에게 시집간 덕택에, 롤라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브리오니의 소설이 출간되면, 롤라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공개되고 만다. 롤라와 마셜 부부의 재력은 소설을 출간할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결국 진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로비의 누명은 벗겨지지 못했다. 그리고 비명에 간 두 연인과 달리, 세 공범자들은 오래오래 산다. 마셜과 롤라 부부는 평생 해로했고, 브리오니 또한 결혼해서 성공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으니까…….
사실 나는 속았다. 브리오니의 ‘행복한 결말’에. ‘편견 없는 심리적 사실주의’라는 교묘한 말에 속았다. 브리오니가 두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사실인 줄 알았다. 행간을 놓친 탓이다. 마지막 문장의 느낌이 묘해서 다시 천천히 읽어봤더니, 진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브리오니의 ‘친절’과 ‘행복한 결말’에 분개했다. 『속죄』라는 제목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정말 브리오니는 이 소설을 씀으로써, 속죄를 했다고 생각했을까? 브리오니는 자신의 소설에서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그들에 대한 친절이자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p521)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나는 브리오니가 대단히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 윤색해서 만든 변명과 기만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브리오니는 소설가의 역할, 그리고 소설에서 차지하는 작가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브리오니는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작가의 전지성이 갖는 면책 특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책임을 진 양 말이다. 그러나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여기에 동조할 수 없다. 소설은, 작품은 작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므로. 독자도 엄연히 소설의 참여자로서, 창조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속죄』에서 브리오니가 속죄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책을 읽은 독자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속죄』의 문체는 호흡이 길고 유장한 흐름을 가진 만연체에 가까운데, 번역이 잘 된 덕분인지 가독성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만연체의 성격을 가진 대신, 작가의 묘사는 디테일하고 섬세한 특징을 가졌다. 특히 로비와 세실리아,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순수하고 관능적이다. 작가는 친구라는 장벽을 넘어서 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두 청춘이 성애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 순간을 묘사해내는 데에서 작가의 세심한 필치가 더욱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작가는 전쟁의 참상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로비가 적진을 탈출하는 과정, 그리고 브리오니가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간호하며 목도한 광경들은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전쟁이라는 대서사 앞에 개개인이 겪는 비극의 면면이 잘 드러났다고 본다. 한편으로 전쟁이 아니었다면, 두 연인의 비극적 결말이 바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지 않을까, 가정해 봤다.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교차하고 확장하는 점에서, 원숙한 구성 및 서술의 완성도를 엿볼 수 있었다.
덧.
1. 그래도 세실리아가 끝까지 그를 믿고 사랑했다는 것이, 로비에게 위안이 될 만한 유일한 일 아니었을까? 세실리아마저 그를 믿지 않고 범인으로 생각했다면 로비는 감옥에서 얼마나 더 끔찍했을까. 지옥 같은 감옥, 그리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를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빛이자 희망은, 오직 세실리아뿐이었다. 두 연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 소설에 색채를 더해주는,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2. 『속죄』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국내에는 《어톤먼트》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