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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인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평점 :

감상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세 단계의 인지 수용 단계를 거쳤다.
첫 번째 단계. 착각이다. 제목과 표지와 초반부 전개를 보고 단단히 착각했다. 화사한 색감의 표지. 디저트와 마법봉이 놓여 있는 표지다. 거기에 《지구별 인간》이란 제목이라니, 장르가 판타지인가? 란 생각을 했다. 그런 뒤 책장을 펼치니까 주인공 남녀 둘이 서로를 마법소녀와 외계인이라고 믿고 있다. 판타지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몽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리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개가 진행될수록 내 추측은 철저하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힐링 소설도 아니다. 오히려 지독히도 현실적인 소설이다. 지구인과 외계인, 마법봉과 마법 주문은 그저 소재에 불과할 뿐, 오히려 이 소재들은 현실성을 극대화한다. 《지구별 인간》은 환상을 빗대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 혹은 풍자한다.
두 번째 단계. 연민과 분노다. 주인공 나쓰키의 어린 시절은 책에서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은 나쓰키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한편, 스토리의 진행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데서 결정적이다. 나쓰키는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했다. 학대는 정신적·육체적 학대 모두를 망라한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당한다. 나쓰키의 엄마는 나쓰키를 구박하는데, 그 구박의 정도가 정도를 벗어난 수준이다. 나쓰키가 뭐를 하든 부정적이다. 신체 비하는 기본, 행동의 모든 것이 부정과 비난의 대상이다. 심지어 그녀는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딸이 못났다고 흉을 본다. 엄마가 딸에게 가스라이팅을 한 것이다. 하도 가스라이팅을 당한 끝에, 나쓰키는 자존감이 바닥이다. 엄마의 말에 잠자코 긍정하는 나쓰키. 엄마의 말처럼 자기는 못나고 멍청하다는 나쓰키의 말이 왜 이렇게 슬프던지. 심지어 나쓰키의 아빠나 언니도 엄마와 비슷한 족속이다. 특히 나쓰키의 언니는 가식적이고 제멋대로인,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쓰키의 가족은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나쓰키에게 동정과 연민이 갔다.
나쓰키를 괴롭게 한 것은 가족의 학대뿐만이 아니다. 나쓰키는 학원 선생님에게 성폭력을 당한다. 그 문제의 장면에서 나는 제대로 화가 났다. 나쓰키의 입장에서 겪은 그 장면이 읽기가 괴로웠다. 모든 성폭력과 성희롱은 최악의 행위임은 분명하나, 어린 아이가 당하는 경우는 유독 더 힘들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화가 난 것은, 나쓰키 엄마의 반응이었다. 힘들게 고백한 나쓰키에게, 엄마는 네가 이상하다며 나쓰키의 잘못으로 몰고 간다. 그것도 모자라 나쓰키를 비난하며 머리를 때리는 엄마. 잘못했다고 반복하는 나쓰키. 날 버리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그녀의 하소연에 마음이 아팠다. 엄마 맞아? 어떻게 딸에게 그럴 수 있지? 엄마의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나쓰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이란 정언 명령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녀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도구이자 공장의 부품으로 간주하도록 만든 현실. 마법 소녀라 생각하고 지구를 떠날 꿈을 꾸게 만든 현실. 현실은 나쓰키에게 유독 냉혹했다.

세 번째 단계. 충격이다. 우선 책에서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유가 충격적이다. 나쓰키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은 공장이고, 인간은 공장을 위해 노동하는 도구이자 부품에 불과하다. 공장의 유지를 위해 인간은 새 생명을 ‘생산’ 또는 ‘제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인간은 공장에 세뇌되었고 공장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노예다. 공장이 지배하는 세계, 그 세계가 있는 별이 지구다. 나쓰키는 자신을 외계인으로 생각하므로, 공장을 관찰자적인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는 지구에 살고 있는 이상 지구인, 지구별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반대로 나쓰키의 남편은 외계인이 돼서, 지구를 떠나고 싶어 한다.

과연 나쓰키는 외계인이 될 것인가, ‘지구별 인간’이 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결말에 나와 있다. 이 결말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라, 결말에 대한 잔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윤리의식에 가치론적인 문제까지 연결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쓰키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그 선택에 쉽사리 동조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녀의 성장 환경을 생각하면, 그 선택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심경의 변화를 거치며 읽은 소설도 참 오랜만이다. 나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주와 경지에서 전개된 소설.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며 전위적인 문제작. 소설에 드러난 문제의식과 실험적인 시도를 보면, 일본 현대 문학의 계보를 잇는 유의미한 작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말의 경우 일반 독자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덧
1. 문학적 허용으로 받아들일 부분이지만, 그냥 한 번 지적해본다. ‘지구별 인간’이란 제목은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 지구는 별이 아니다. 행성이다. 지구가 별이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너무 뜨거워서. (《과학으로 생각하기》에서 습득한 지식의 활용이다.)
2. ‘탈출닷컴’이란 사이트. 우리나라에도 이런 종류의 사이트가 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