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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양장)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3년 7월
평점 :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는 인류 멸망 이후, 인간을 창조주로 둔 기계들이 관리하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계는 질서와 효율, 논리와 계산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철저하게 '숫자적인' 체계에 의해 유지된다. 이곳에서 인간은 이미 멸종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데이터 속에 살아있다. 기계들은 인간이 남긴 유산을 분석하고 통제하지만, 그 본질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면서도 그들이 남긴 모순을 경계한다. 젤라즈니는 이 싸늘한 무대 위에 '프로스트'라는 특별한 기계를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성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정면으로 탐구한다.
프로스트는 단순한 로봇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설계된 존재이며, 창조주로부터 인간성이라는 불완전한 유산을 물려받은 존재다. 프로스트의 취미는 '인간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는 마치 고고학자처럼 인류가 남긴 기록과 유산을 파헤치며 언어와 문학, 감정과 윤리를 분석한다. 처음에는 취미이자 단순힌 관찰로 시작했던 탐색은 점차 자기 변화를 위한 내적 여정으로 발전한다. 마침내 프로스트는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려 노력하며, 흉내 내기가 아닌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내면화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그러나 인간이 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프로스트는 고통을 배우고, 선택의 딜레마를 경험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복잡성과 불완전함을 직접 체험한다. 프로스트는 자신이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존론재적 한계와 마주하게 되지만, 그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그는 더욱 '인간다운' 존재로서 거듭나게 된다. 진정한 인간성이란 불완전함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에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 여정은 단순한 개인적 변화를 넘어 신화적 구조를 따른다. 프로스트의 여정은 창조주(인간)으로부터의 분리, 금지된 지식에 대한 탐닉, 고통을 통한 성숙이라는 고전적 서사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야기 후반에는 '베타'라는 또 다른 기계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브적 존재, 즉 전통적 여성의 특징을 띠고 있으며, 프로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감정과 관계,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게 된다. 최종적으로 두 존재가 결합하는 장면은 단순한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시도로서, 과거를 바탕으로 한 진화적 도약을 의미한다. '프로스트와 베타'는 새로운 종의 서막을 여는 '미래적 아담과 이브'인 것이다.
젤라즈니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인간의 진짜 유산이 무엇인지에 관해 묻는다. 그것은 기술도 문명도 아닌 '이야기'다. 인간이 남긴 이야기, 인간다움을 담은 언어, 타인과의 감정 교류,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의지. 이 모든 것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때, 인간은 설령 육체적으로 멸망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계속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인공지능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겼던 것들을 빠르게 침범하는 오늘날, 『프로스트와 베타』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 기계가 모방할 수 있는 것가? 그리고 대답한다. 인간이란 알고리즘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