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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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이름은 많이 들어 봤지만 책은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작가였다. 이번 기회에 읽어보자, 하고 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은 전작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들의10년 후 이야기라고 하더라. 안타깝게도 나는 전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짧은 단편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치나미의 동생 우라베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지만 돌아올 때는 바이올린을 그만 두고 게이가 되어 있다. 우라베는 바이올린을 그만 두었지만 종종 어느 집에 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이를 알게 된 치나미는 우라베를 따라 그 집에 간다. 절반이 의사거나 게이인 이상한 모임에서 치나미는 로를 만난다. 유부녀였던 치나미와 독신주의자였던 로, 절대 이어질 것 같지 않았던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시점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치나미의 시점에서, 또한 로의 시점에서. 둘은 아마 새로운 사람과의 결혼이라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나미는 이미 한차례 결혼을 했고, 로는 독신주의로 고양이와 개를 키우며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종종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을 한다. 정말 진지하게 인생을 고찰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들과 웃자고 '미래를 알 수 없는 인생이니 열심히 살자'고 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딱 이 말이 생각났다. 뒤에 열심히 살자는 좀 안 맞는 것 같지만, 인생은 알 수 없다고. 동생 우라베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독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될 줄은. 우라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건 독일이 우라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우라베는 독일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한 모임의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심지어 집 주인도 이상하다. 무츠키와 쇼코 부부. (이들이 '반짝반짝 빛나는'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무츠키는 동성애자고 곤이라는 애인이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상태. 쇼코는 무츠키의 아내지만 무츠키가 곤과 헤어졌을 때 진심으로 슬퍼한다. 곤은 새로운 애인을 사귀고 그게 치나미의 동생인 우라베. 이게 무슨 인연인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관계지만 책의 모토가 알 수 없는 인생이니까 이들의 관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상한 관계는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소설은 그냥 그러려니 조용하게 흘러간다.

 

치나미는 처음 우라베가 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라베가 독일 생활을 나서서 묻지도 않고 새로운 남자친구도 그렇구나 한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쓰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내가 읽었던 치나미는 우라베를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받아들일 것도 없이 그냥 처음과 같은 우라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치나미가 아무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좀 힘들지만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라고 느꼈다.

 

'반짝반짝 빛나는'을 먼저 읽었다면 또 감상이 새로웠을 것 같다. 그 점이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뭐, 그냥 그러려니 한다. 전작을 후에 읽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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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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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집에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제이, 아무도 모르는 밴드의 보컬 안나, 그리고 무명의 웹툰 작가인 나(p.35)' 이렇게 세 명의 여성이 동거하고 있다. 그 집에서 비슷해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이 셋을 '하나로 묶어주는 규칙'은 바로 '공동 분배(p.36)'다.

 

(…)세상으로부터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더이상 받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뿌리를 내렸다. 어둠을 움켜쥐고 자라는 음지식물처럼. '우리'라는 견고한 껍질 안에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안전했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었고 모든 것은 공유되었다. 가족보다도 가깝고 서로를 분신처럼 아꼈던 우리. 우리의 공동생활은 삼년 팔 개월 동안 아무 탈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큰 소음 없이 지속되던 이 '공동생활'은 '안나'의 자전거로 인해 깨지게 된다. '나'는 이 자전거를 두고 작품 첫머리에서 '모든 것은 자전거 때문이었다. 집에 자전거가 생긴 이래로 되는 일이 도통 없었다(p.33)'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을 공평하게 소유하던 '안나'는 자전거를 선물해준 남자 'P'를 만나고, '나'의 눈에 이 'P'라는 남자는 너무나 완벽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시선은 자꾸만 '안나'를 향한다. 'P'가 선물해준 자전거는 'P'가 아닌 '안나'와 일체화된 것처럼 표현되고,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살아오면서 본 중 가장 작은 눈(p.44)'을 가졌다고 표현되던 '안나'는 점점 더 예뻐보이기 시작한다.

 

(…) 석양을 받은 자전거가 유난히 빛났다. 안나도 자전거 모델처럼 빛이 났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안나는 초라한 우리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뻐 보였다. 요즘 들어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는 안나의 입술이 관능적으로 보였다. 단 한 번도 주목해본 일이 없던 안나의 입술은 도톰하고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 그러나 이제 안나는 예전의 안나가 아니었다. 요염한 안나의 입술, 자전거에 올라타면 두드러지는 안나의 잘록한 허리선.

 

(…) 붉고 푸른 조명 속에 서 있는 안나. 푸른색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안나가 헤드뱅을 할 때마다 머리가 횃불처럼 휘날렸다. 푸른 스모키 화장 때문이었을까. 안나의 눈매는 전에 없이 매력적이었다. 말랐지만 육감적인 안나의 몸매.

 

 여기서 이 작품의 묘한 구석이 생긴다. 작가는 '나'의 소유욕이 'P'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P'를 함께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묘사하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 '나'의 성애는 완연히 '안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나'가 말없이 'P'를 데리고 온 일에 대해 제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러니까 너는 고고한 척 안나의 변절에 쿨할 수 있는 거야(p.45)라고 '나'는 생각하며, 정작 '안나'처럼 'P'와 섹스하는 꿈을 꾼 날에는 '왠지 허망한 기분(p.45)'이 들고, 자전거를 탄 '안나가'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보일 때 '나'는 따라가지 못해서 안타깝고 아쉬운 정서를 드러낸다.

 

안나는 그후로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페달을 밟는 안나의 매끄러운 종아리가 눈부시다. 나는 현관에 서서 안나가 자전거에 올라타는 모습을 훔쳐본다. 아침공기를 가로지르며, 빛살 한가운데로 전진, 전진. 아아, 안나. 이 모든 것은 다 저 자전거 때문이다.

 

나, 연습 갔다 올게.

안나가 나간다. 안나는 또다시 자전거에 올라탄다. 안나의 미끈한 종아리에 근육이 옅게 도드라진다. 나는 현관에 서서 안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쉼없이 페달을 밟는 안나의 건강한 다리. 오직, 안나의 노동에 의해 앞으로 굴러가는 자전거의 바퀴. 자전거를 따라 바람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텅 빈다.

 

안나가 자전거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탄다.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다리로 자전거를 감싼다. 자전거와 안나는 애초에 한몸이었던 것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안나가 페달을 밟는 대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비틀거림도 망설임도 없다. 페달을 밟으며 안나는 신이 난 듯 환호성을 지른다. 자전거는 자꾸만 빛 속으로, 빛 속으로, 표백된 햇살 속으로 안나를 이끌고 간다. 너무 눈이 부셔서 나는 그곳을 쳐다볼 수조차 없는데.

 

 또한 '안나' 몰래 그녀의 방을 드나들던 '나'는 '안나'의 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치 내 것을 빼앗기기라도 한 사람처럼 견딜 수 없이 괴로(p.50)'워한다. '모든 것을 공유했었(p.50)'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정서 역시 종잇장처럼 느껴지는 'P'보다는 훨씬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인물인 '안나'를 향해 있다.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P'가 아닌 '안나'를 공유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나'는 마침내 고백한다.

 

아아 ,안나. 너는 왜 이렇게 빛나는 것일까.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이후, '안나'의 자전거에 '제이'가 체인이 걸어놓은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제이의 얼굴에서 미소를 본다. '안나'는 자전거와 일체화되는 존재였고, 그런 '안나'의 자전거에 걸린 체인은 '제이'의 소유욕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나'처럼 '제이'도, 예전처럼 '안나'를 소유하고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제이'를 보며 '문득 나도 내일 자전거 체인을 하나 사러가야겠다는 생각이(p.58)' 든다. '안나'는 이전처럼 앞으로도 '나'와 '제이'에게 계속 소유될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안나의 얼굴은 더 이상 내 얼굴보다 더 예뻐 보이지 않(p.59)'는다.

 

 결국 「자전거 도둑」은 '안나'를 '제이'와 '나', 이 두 명이 함께 소유하려 애쓰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P'는 그저 계기였을 뿐, 작품의 중심은 '안나'와 그녀와 일체화된 것으로 표현되는 '자전거'에 쏠려 있다. 이 세 명의 여성이 보여주는 기묘한 공동생활의 끝은 어디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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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에 뜨는 달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6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미선 옮김 / 내인생의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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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멀리서 떠오르는 이야기

 

  동성애에 사형까지 구형되는 이란, 사랑에 빠지는 두 소녀의 이야기.

 

  내게 그랬듯이 당신에게도 충분할 것이다. 데보라 엘리스의 청소년 소설을 읽어볼 이유로서는 말이다.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사랑과 죽음이 샴처럼 붙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화를 소재로 한 소설들, 억압적인 현대사를 다룬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독자들을 유사 죽음까지 몰아붙일 것 같았다. 과연 소설은 “사랑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박해에 맞서 춤추고 기뻐하며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라는 이란 시인 하피즈의 말로 시작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소설만이 아니었다. <아홉 시에 뜨는 달>은 무엇보다,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출판사 소개글[1]에서처럼 이 소설은 이란의 현대사, 더 정확하게는 1979년의 이란 혁명에 깊이 기대어 있다. 불친절하여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서 역사를 읊어댈 생각이 없다. <아홉 시>에 등장하는 소녀들이 특정 시공간의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숨 쉬기 힘들어도 눈만 내놓는 옷을 입어야 하는 소녀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키스에 ‘부자연스럽고 추한 일’이라는 혐의가 붙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슬프도록 낯익다. 우리에게는 이 소녀들의 풍경을 연민어린 거리감으로 관망할 사치가 없다. 억압적인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랑의 이야기는, 아무리 멀리서 떠오르더라도 여전히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빛으로 우리를 관통한다.

 

 

  낮: 정확히 예고된 죽음들

 

  소녀들의 낮에는 부고가 이어진다. 폭탄이 떨어져서 죽고, 혁명군의 뜻에 반역하다 죽고, 영문 모를 정치범으로 몰려서 죽는다. 사람들이 자꾸 죽는다. 그렇게 많이 죽는데도 스펙터클로 소비될 틈이 없다. 이것이 소녀들의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 이란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서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책은 잘 작동하는 전화기가 되어야 [한다]”(프리모 레비)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 책은 받지 않을 수 없는 전화가 되어 계속 울려댄다. 주인공 파린이 체포 감금된 이후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정확하게 잔혹해서, 청소년 소설이란 장르로서는 드물 정도로 힘겹게 느껴진다.

 

  잔혹함이라면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겠다. 나의 짧은 독서 경험 중에서도 단연 비극적인 결말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라는 오만한 투정은 접어두기로 한다. 등장인물들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책은 어떤 누군가가 탁자를 가로질러 돌진해서는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과 같아야 한다”(스티븐 킹)는 격언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에 중점을 둔 서사의 아쉬움에 대해서도 길게 불평하지 않겠다. 작가는 발신의 의무감을 느끼고 쓴 것이 분명하니까. 수신자로서 나는 그저 받아든 부고들을 책임감 있게 곱씹기로 한다. 나에게 그랬듯 이 책이 당신에게도 용서 없는 불편함을 주기를. 더 읽고 싶지 않아질 때까지 밀어붙이고, 그 때조차 지치지 않고 다시 밀어붙이는 이 책과의 통화를 당신이 끝까지 참아내기를.

 

 

  밤: 저기 달빛을 향해, 계속

 

  달이 뜬다. 소녀들에게 달은 아주 특별하다.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우리 약속 하나 더 하자. 매일 밤 아홉 시가 되면 달을 보는 거야. 그렇게 하면, 함께 있지 않아도 영혼은 함께 있는 셈이니까.”

  “아홉 시에 뜨는 달.”

  파린이 동의했다. 그대로 멈춰 서 있었지만 속으로는 온 광장을 돌아 빙글빙글 춤을 추고 싶었다. (104쪽)

 

  죽음의 낮을 더듬듯 위로하는 달빛 아래 소녀들은 사랑을 한다. 비밀같고 꿈같기도 한, 은은하면서도 강한 사랑을 한다. 이 소녀들의 사랑은 용기를 가득 먹었다. 파린은 사디라와 빠진 사랑에 한치의 의심도 부끄러움도 없다. 신기할 정도로 용기 있게 세상에 맞선다. 죽음도 불사하려는 파린의 용기는 나를 멍하게 한다. 나는 그런 사랑을 잘 모른다.

 

  무책임할 정도로 용기 있는 소녀들은 소설 곳곳에 가득하다. 사디라는 파린이 취미로 쓰는 악마 이야기를 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냐고 묻더니 자기를 이야기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다. 남자들이 세상을 망쳐놨으니 여자들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란에는 정말 똑똑한 여자들이 잔뜩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파린이 동경했던 학생회장 라비아는 여성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뿌렸다가 체포된다. 다시금 멍해진다.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용기도, 나는 본 적이 거의 없다.

 

  “자유를 얻는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자유롭게 존재하는 능력이다.”(앙드레 지드) 가장 자유롭지 못한 곳에서 <아홉 시>의 소녀들은 이토록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들은 언뜻, 나의 유년을 거머쥐었던 소녀 전사들마저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야 하는 것, 내가 아름답게 만들 것, 바로 너와 함께. 사랑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싸우는 용기. 나는 그들에 매혹되었었다. 같은 매혹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홉 시>의 소녀들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겠다. 적어도 청소년 소설에서는, 문학에서는 이런 주인공들이 넘쳐나도 좋지 않을까. 무엇보다 사디라의 말처럼, “두 소녀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혁명에 위협이 된다면, 혁명이 그 정도 가치밖에 없는 셈”(172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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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사랑한 여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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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4  다만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사회적 윤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적 윤리가 반드시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근거도 없는 단순한 사회 통념에 불과하지 않을까?

 

 

11월 셋째 주 토요일, 이전 제국대학에서 함께 미식축구를 했던 미식축구 부원들은 어김없이 술집에서 만나 만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파한 뒤, 돌아가려던 데쓰로와 스가이는 술집 앞에서 그 당시 매니저를 맡았던 미쓰키를 만나게 되었다. 미쓰키는 어딘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미쓰키는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하지 않고 필담으로만 대화를 하려 하였고, 결국 데쓰로는 그녀와 말로 하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스가이와 미쓰키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자, 그들은 미쓰키가 더이상 '그녀'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미쓰키는 자신이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남자'였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추리 소설의 대가로 유명하다. 필자는 처음 용의자 X의 헌신으로 그의 책들을 접했으며 그 특유의 문체와 전개감. 그리고 분위기에 폭 빠져 그의 소설책을 여러 권 찾아 읽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친구의 앞에 나타난 미쓰키는 사실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고 있었다.  같은 가게에서 일을 하던 가오리라는 직원을 스토킹하던 악질 스토커와 드잡이를 하다 실수로 그를 목졸라 죽이게 된 것 미쓰키는 자수를 하기 전 마침 11월 셋째 주라는 것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멀리서나마 친구들을 보기 위하여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다 듣게 된 데쓰로와 그의 부인이자 미쓰키와 친구인. 함께 매니저로 일했던 리사코는 그를 보낼 수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자수시키지 않겠다며 선언한다.

 

인간의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이 소설에서는 많은 젠더퀴어들이 등장한다. 반음양인, 간성인 육상 선수 무쓰미와 바이젠더로 추정되는 미쓰키. 그리고 트렌스젠더인 여러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는 동전의 양면처럼 남자와 여자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나누는데,  이들은 그것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일까. 작가는 소설 속에서 아이카와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p423. 

"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 띠에 있는 안쪽과 바깥쪽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

"무슨 뜻이죠? "

" 일반적인 종이는 안쪽은 끝까지 안이고 바깥쪽은 영원히 바깥이죠. 양쪽이 만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이라고 생각하고 가다 보면 어느새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즉, 안쪽과 바깥쪽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뫼비우스의 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완전한 남자도 없고 완전한 여자도 없지요. 또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성적인 부분도 가지고 있고 여성적인 부분도 가지고 있어요. 당신에게도 여성적인 부분이 많이 있을 겁니다. 트렌스젠더라고 해도 한결같지 않고, 트렌스섹슈얼이라고 해도 여러 부류가 있지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 띠에 있는 관계이고 동전의 양면처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작가의 생각이었다. 필자 또한 이 생각에 동의한다. 사람의 성별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사람은 성별이 어떻게 되던, 성 지향성이 어떻게 되건 간에 그냥. 그냥 하나의 사람이다.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써 보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차별이라는 것을 한다. 미지의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미지의 것이자, 자신과는 다른 것을 배제하는 인간의 슬픈 속성. p425.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우리의 생각은 전해지지 않겠지요. 짝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짝사랑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까. 끝나지 않을까. 작가는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필자는, 언젠가는 이 짝사랑이 끝이 나리라 믿고 싶다. 

 

 

너무도 좋은 책을 능력의 부족으로 읽을 때의 감동과 그 이후의 여운. 따라오는 생각들을 다 담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몇번이고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고 다시금 책장을 넘겨보았지만 필자의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새삼 실감했다.  전개 방식도, 내용도, 전하고자 하는 생각도 모두가 마음에 들었으나 단 한 가지 계속해서 미쓰키를 그녀라 호칭하는 것과 제목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미쓰키는 남성의 정체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모두 가진 바이젠더로 묘사된다. 보다 성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남기는 하나 정말로 완성도 높은 소설임은 틀림 없다.  이 부족한 리뷰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더욱 흥미를 유발시켜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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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나나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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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이야기는 퀴어보다 성노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대상화되기 쉽고 타자화되기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면에서 어떤 접점을 찾을 수는 있다. 특히 이 이야기를 운명에 대한 것이나 하나의 거대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대한 것으로 읽을 때 그렇다.

 

 <새벽의 나나>는, 아주 뭉뚱그려 말하면 레오라는 한국 남자가 플로이라는 방콕, 수쿰빗 소이 식스틴의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레오가 수쿰빗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에, 수쿰빗의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그 마음들이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거대하기에 방금의 문장은 지워버려도 좋을 것이다.

 

 <새벽의 나나>는 주민의 대부분이 성매매를 업으로 살아가는 나나라는 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서술자이자 나나의 관찰자인 레오는 전생을 본다. 나나의 고급 매춘부 플로이는 전생에 공주였으며 사냥꾼인 자신과 사랑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를 했던 자신의 아내였다. 레오는 플로이를 볼 때마다 500년 전의 그 전생이 떠오르기 때문에 곁을 떠날 수 없지만 플로이에게는 그 전생 이야기가 오히려 레오를 싫어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전생에 공주였던 매춘부를 보는 레오의 애처로운 시선에 플로이는 화가 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레오가 전생을 본다는 설정이 플로이에 대한 레오의 애정을 설명할 방법이 따로 없어서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설에서 전생과 현재의 삶을 서술할 때에, 문체 구분도 없고 전생을 보기 전의 전조도 없다. 어쩌면 이 설정은 서로 다른 삶이 뒤섞여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소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던 타인의 삶이 사실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우리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실수와 착각에 대해서.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지 네가 나이거나 내가 너일 수는 없기 때문에

 

 플로이는 어느 날 레오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이해하느냐고. 레오는 플로이가 이해한다는 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레오는 오히려 플로이에게 너는 나를 이해하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하여 레오는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말도 말고, 너는 나를 이해하느냐는 물음도 말고,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130).

 

 플로이의 질문에 대한 레오의 답,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문장 중 하나라고 감히 꼽는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고, 너 또한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를 환상화하고 대상화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공존해 왔고 공존하고 있으며 공존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혹은 사실이어서 한국 남자 레오를 화자로 세운 이 소설에는 불가피하게 결함이 생긴다.

 

 소설은 완전한 1인칭 시점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레오의 시점을 중심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레오는 말한다. “매매춘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고 판단하는 건 매우 고상한 문제이긴 하나, 누군가가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이라는 현실 가치에 우선할 순 없다(252)”고. 이것은 레오의 목소리로 저자가 말하는 것이며, 레오라는 인물은 독자들이 플로이와 수쿰빗 소이 식스틴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레오의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노력하는 이방인의 말이다. 작가가 한국인 남성으로서 약 3년간의 방콕 현지 취재 후 쓴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오만을 부리지 않고 솔직한 것인데, 한편으로 레오라는 매개가 존재함으로써 그들과 자신, 그들과 독자를 효과적으로 분리해내고 있다.

 

 레오는 자신이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받지 못하며, 그들은 그들로 남는다. 이것이 비성노동자로서 성노동을 보는 유일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이렇게 씁쓸할까. 뒤이어 쓰인 "그들 역시 우리의 일부다(252)"라는 문장은 공허하다.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만 쓸 수 있다

 

 플로이와의 관계에서 언급된 이해라는 단어는 플로이의 죽음 이후 독일인 우웨에게서 다시 반복된다. “이런 기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거야. 네가 모든 부분 부분을 안다고 해도, 역시, 넌 내가 아니거든. 나한테 아주 가까이 다가올 순 있지만, 나랑 겹쳐질 순 없어. 나를 네 멋대로 해석하는 거랑 날 완전히 이해하는 건 다르단 말야. 내가 유별난 뚱보라서가 아니야. 원래 그런 거야.”(391)

 

 우웨는 이전에 항공관제사로 일했고 자신의 딸을 비롯한 수십 명의 비행기 승객을 죽이는 사고를 낸 후로 태국의 건물을 사서 자신의 방 안에 스스로 갇혀 지내는 사람이다. 우웨는 레오가 플로이의 곁에 머물면서 사귄 친구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레오는 우웨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고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에게 당신이 아닌 사람들은, 당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나 타인이다. 이 흥미롭고 훌륭한 작품은 결국 타인의 삶에 대한 관찰에 그친다. 이 의도적인 거리두기가 환생이라는 소재, 성노동자의 거리라는 공간만큼이나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 레오가 아닌 플로이가 소설의 서술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게이인 똠이나 까터이(트랜스우먼)인 나왈랏과 수진은 더욱 그랬음직하다. 레오 또한 저자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저자의 경험이 레오의 경험과 같지 않지만 어쨌든 저자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은 레오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는 나만 쓸 수 있고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만 쓸 수 있다. 당신과 나는 각자의 이야기를 쓰는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내 서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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