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나나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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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이야기는 퀴어보다 성노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대상화되기 쉽고 타자화되기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면에서 어떤 접점을 찾을 수는 있다. 특히 이 이야기를 운명에 대한 것이나 하나의 거대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대한 것으로 읽을 때 그렇다.

 

 <새벽의 나나>는, 아주 뭉뚱그려 말하면 레오라는 한국 남자가 플로이라는 방콕, 수쿰빗 소이 식스틴의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레오가 수쿰빗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에, 수쿰빗의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그 마음들이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거대하기에 방금의 문장은 지워버려도 좋을 것이다.

 

 <새벽의 나나>는 주민의 대부분이 성매매를 업으로 살아가는 나나라는 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서술자이자 나나의 관찰자인 레오는 전생을 본다. 나나의 고급 매춘부 플로이는 전생에 공주였으며 사냥꾼인 자신과 사랑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를 했던 자신의 아내였다. 레오는 플로이를 볼 때마다 500년 전의 그 전생이 떠오르기 때문에 곁을 떠날 수 없지만 플로이에게는 그 전생 이야기가 오히려 레오를 싫어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전생에 공주였던 매춘부를 보는 레오의 애처로운 시선에 플로이는 화가 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레오가 전생을 본다는 설정이 플로이에 대한 레오의 애정을 설명할 방법이 따로 없어서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설에서 전생과 현재의 삶을 서술할 때에, 문체 구분도 없고 전생을 보기 전의 전조도 없다. 어쩌면 이 설정은 서로 다른 삶이 뒤섞여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소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던 타인의 삶이 사실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우리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실수와 착각에 대해서.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지 네가 나이거나 내가 너일 수는 없기 때문에

 

 플로이는 어느 날 레오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이해하느냐고. 레오는 플로이가 이해한다는 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레오는 오히려 플로이에게 너는 나를 이해하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하여 레오는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말도 말고, 너는 나를 이해하느냐는 물음도 말고,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130).

 

 플로이의 질문에 대한 레오의 답,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문장 중 하나라고 감히 꼽는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고, 너 또한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를 환상화하고 대상화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공존해 왔고 공존하고 있으며 공존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혹은 사실이어서 한국 남자 레오를 화자로 세운 이 소설에는 불가피하게 결함이 생긴다.

 

 소설은 완전한 1인칭 시점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레오의 시점을 중심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레오는 말한다. “매매춘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고 판단하는 건 매우 고상한 문제이긴 하나, 누군가가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이라는 현실 가치에 우선할 순 없다(252)”고. 이것은 레오의 목소리로 저자가 말하는 것이며, 레오라는 인물은 독자들이 플로이와 수쿰빗 소이 식스틴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레오의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노력하는 이방인의 말이다. 작가가 한국인 남성으로서 약 3년간의 방콕 현지 취재 후 쓴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오만을 부리지 않고 솔직한 것인데, 한편으로 레오라는 매개가 존재함으로써 그들과 자신, 그들과 독자를 효과적으로 분리해내고 있다.

 

 레오는 자신이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받지 못하며, 그들은 그들로 남는다. 이것이 비성노동자로서 성노동을 보는 유일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이렇게 씁쓸할까. 뒤이어 쓰인 "그들 역시 우리의 일부다(252)"라는 문장은 공허하다.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만 쓸 수 있다

 

 플로이와의 관계에서 언급된 이해라는 단어는 플로이의 죽음 이후 독일인 우웨에게서 다시 반복된다. “이런 기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거야. 네가 모든 부분 부분을 안다고 해도, 역시, 넌 내가 아니거든. 나한테 아주 가까이 다가올 순 있지만, 나랑 겹쳐질 순 없어. 나를 네 멋대로 해석하는 거랑 날 완전히 이해하는 건 다르단 말야. 내가 유별난 뚱보라서가 아니야. 원래 그런 거야.”(391)

 

 우웨는 이전에 항공관제사로 일했고 자신의 딸을 비롯한 수십 명의 비행기 승객을 죽이는 사고를 낸 후로 태국의 건물을 사서 자신의 방 안에 스스로 갇혀 지내는 사람이다. 우웨는 레오가 플로이의 곁에 머물면서 사귄 친구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레오는 우웨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고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에게 당신이 아닌 사람들은, 당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나 타인이다. 이 흥미롭고 훌륭한 작품은 결국 타인의 삶에 대한 관찰에 그친다. 이 의도적인 거리두기가 환생이라는 소재, 성노동자의 거리라는 공간만큼이나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 레오가 아닌 플로이가 소설의 서술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게이인 똠이나 까터이(트랜스우먼)인 나왈랏과 수진은 더욱 그랬음직하다. 레오 또한 저자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저자의 경험이 레오의 경험과 같지 않지만 어쨌든 저자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은 레오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는 나만 쓸 수 있고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만 쓸 수 있다. 당신과 나는 각자의 이야기를 쓰는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내 서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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