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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하우스
캐슬린 그리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키친 하우스 - 캐슬린 그리섬, 피부색을 뛰어넘은 두 소녀의 사랑
500
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이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방대한 양 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에 등장했지만, 그래서 인물들의
성격을 파악한다고 처음이 조금 힘들었을 뿐,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에는 이야기에 등장했던 수 십 명의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고 온
것 마냥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여름 휴가철에 잠깐 시간내서 읽으면 될 줄 알았던 <키친 하우스>,
하지만 그건 내 오산이었다. 요즘같은 가을 날 햇살 드는 방에서 곱씹으며 읽어서 더 좋았고, 조용히 인물들의 상황에 나의 감정을
이입하며 읽어서 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라비니아, 그리고 벨. 이 두 소녀가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다. 같은 장소에서 살지만,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환경 속에서 받는 대우는 두 소녀가 판이했다. 라비니아는 백인 고아. 부모를 잃고 고아로 팔려가는 가운데
유일한 혈육인 오빠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 라비니아를 거둔 건 어마어마한 농장을 소유한 주인. 그는 라비니아를 자신의
집(빅하우스) 바로 옆 노예들이 거주하는 키친하우스로 보내 벨이라는 소녀에게 아이를 가르치라고 명령한다.
어색하던 두 소녀의 첫 만남, 하지만 이내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엄마와 딸처럼, 때론 큰언니와 막냇동생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며 ‘혈연’으로 구성되지만 않았을뿐 돈독한 ‘가족애’를 쌓게 된다.
라
비니아가 화자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는 라비니아의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만이 묘사된다.키친하우스에 도착했을 때의 그 낯선 느낌,
자신과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느꼈을 긴장, 그리고 하루하루 지내며 그곳 사람들이 ‘제 가족’이 되어감을
느끼게 되는 감정 변화 등이 라비니아가 표현하는 주요 이야기들이었다.
반면에, 벨이 화자로 등장할 때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그녀는 농장주의 숨겨진 ‘딸’로,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나 백인도, 그렇다고 완전한 흑인도 아닌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농장주가 그녀를 부를 때마다 농장주의 첩 정도로 여기며 늘 업긴여겼고, 괴롭히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농장주의 숨겨진 딸로 키친하우스에 들어오던 벨의 모습을 알고 있는 마마, 파파 등 연륜있는 노예들만이 그녀의 존재를
알고, 그녀에게 연민을 느낄 뿐이었다.
벨이 아버지의 첩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속상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오해한 농장주의
아들 마셜, 그는 결국 벨을 향한 분노를 그녀를 강간하는 것으로 복수하기에 이른다. 벨은 결국 임신을 하게 되고, 배 다른
남동생인 마셜의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이 사실을 라비니아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한편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라비니아는
매력적이고 기품 있는 백인 여성의 면모를 드러냈고, 결국 농장주의 아들인 마셜과 결혼하게 된다.
키친 하우스라는 같은 공간, 피부색은 달랐지만 단 한순간도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 없을만큼 소중한 키친하우스 식구들과의 삶 속에서 오직 ‘피부색’의 다름으로 두 소녀의 운명은 철저하게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운명의 흐름. 라비니아는 이제 키친하우스가 아닌 그 옆 빅하우스의 ‘마님’으로 들어서서 그토록 보고싶었고, 그리웠던 키친하우스 식구들을 마주하게 된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서사구조를 완벽하게 지켜가며 지루할 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캐슬린 그리섬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진 건 이야기의 중반부를 넘어선 부분부터.
인
물의 갈등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차원적인 소설이 아니라 <키친 하우스>는 그 속에 인종차별과 가족의 의미, 부유층
백인들의 횡포, 도덕성의 결여, 거짓과 진실 사이 등 온갖 심오한 내용들을 모두 끌어다 놓고 독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는 3차원적인 소설이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벌인 후의 모습, 몇 몇
인물들은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흐름 등 이야기는 100% 희망을 선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끝을
맺었다.
백인의 횡포 속에서 생존한 등장인물들, ‘선’과 ‘악’의 구조에서, ‘약자’와 ‘강자’라는 구조에서 마냥 질
것 같았던 그 나약한 존재들이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할 때는 등장만으로도 감사해서, 큰 희망은 엿볼 수 없었어도
그저 좋았다.
확실한 건 아주 옅지만 절대 꺼지지는 않을 희망의 불씨는 반드시 그들 삶 끝에 켜져 있을거란 생각이었다.
피
부색의 다름이 삶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곳이 여전히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키친 하우스>에서 표현되는 과거 불평등의
모습만큼은 아닌 것도 안다. 인종차별에 관한 아둔한 인식이 옛적에 비해 많이 개선된 현실이 참 다행이다. 제2의 벨과 같은, 슬픈
운명의 희생양이 더 이상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며.
/P.S
출간 당시에는 독자들이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출판물 시장에서 금새 잊혀진 <키친 하우스>,
하지만 진주를 발견하듯 이 책의 진가를 발견한 건 어느 독서클럽이었다.
책을 통해 토론하고 소통하던 독서클럽이 이 책의 작품성을 높이 사고
그 입소문이 <키친 하우스>의 뒷심을 끄집어냈다.
책 좀 안다는 사람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인정한 책이기에
더욱 신뢰가는 <키친 하우스>, 명불허전이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