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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는 꽃이 있는 발코니에서 안니를 기다린다
티우노 일리루시 / 문화문고 / 1994년 9월
평점 :
절판
비슷한 내용의 소재를 다루더라도 작가의 세계관에 따라 결과물은 아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박상륭의 '평심'중 <와튼슨 부인의 죽음>편을 떠올렸다.(지금 그 제목이 정확히 맞는지는 좀 아리송하다>
이 소설은 아주 단순하다. 40여년을 넘게 해로한 노부부의 아내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 늙은 남편 역시 심장이 안좋다.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아내와 함께 자살을 결행한다. 사실 20대때 40대의 삶을 말한 소설을 읽노라면 그 배경이나 사건들이 그닥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주로 사랑에 목매는 20대의 감성으로 볼 때 40대의 지지고 볶는 얘기는 궁상맞고 답답해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늙음과 죽음 역시 아직은 현실적인 느낌으로 와닿질 않는다. 단지 가끔은 건강하게 살다가 잘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노부부의 눈물나는 사랑 얘기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사람이 평생을 함께 아름답게 해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인가! 그러다 죽음이 찾아 오면 자연스럽게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책은 아주 쉽게, 그리고 빨리 읽힌다) 내가 보았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의 모습과 혼자 남게 되었을때 삶의 무의미성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외로운 인간의 모습이었다.
죽음 앞에서 누가 의연할 수 있을 것인가? (깨달은 사람이 아닌 이상..)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얼마나 큰 상실인가? 그 고독감과 고통은 시간이 흘러야만 비로서 망각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토르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가 아내의 죽음을 망각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이유도 없다. 그는 충분히 늙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는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할 또 다른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덮고 났을 땐 아름답다거나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왜 죽음이 아내를 데려가야만 하는 것인가? 사람이 아무리 40년을 행복하게 잘 살았어도 결국 결론이 비참하면 그건 삶에 대한 기만이 아니냐고? 그것은 주인공의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작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죽음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숙명.그 천형 앞에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혼자 견딜 준비를 하던 와트슨 부인은 결국 자신이 먼저 죽어 버린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 들일 준비를 했던 그녀는 남편의 생존이 지속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말라비틀어진 것이다.(박상륭의 평심 중) 토르는 안니와 함께 60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그래서 그는 뒤에 홀로 남겨지는 고통을 맛보지 않기 위해 함께 자살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내게 <평심>이 더 가까이 오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