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나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욕망의 금기, 욕망의 절제, 타락한 욕망, 욕망의 발현........등등. 사람들안에는 누구나 악한 본성도 있고, 성적욕망, 폭력적인 욕망이 살아숨쉬고 있다. 상현은 신앙심에서 참가한 실험으로 뱀파이어가 된다. 몸안에서는 피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함부로 사람을 죽일수 없다. 그래서, 코마 상태에 빠진 환자의 몸에서 피를 빨아 마신다. 이제 친구 강우의 아내 태주에게 성적욕망까지 느낀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몸을 스스로 벌한다. 다리를 피리로 때리고 성기를 피리로 때린다. 나는 예전부터 가져온 궁금증이지만, 스님과 신부님들의 성적 욕구는 어떻게 다스리는걸까 궁금증이 인다. 상현처럼 금욕적인 태도로 자신의 욕망을 벌하는 사람들도 있을것이고, 자신안의 욕망을 수용함으로써 그 욕구가 점점 약해지는 경우도 있을것 같다. 여전히 그들의 성적 욕망을 다스리는법이 궁금해진다.

 

 

 

 

   상현은 태주와 육체적 욕망을 풀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김옥빈은 <박쥐>에서 엉뚱하면서도 귀여우면서 섹시하며 피해자이기도 한 태주를 리얼하게 연기한다. 김옥빈의 재발견이다. 마치 상현과 대치되는 욕망덩어리 같았다. 태주에게 속아서 남편이 태주를 학대하는줄 알고 상현은 강우를 태주와 함께 죽여버린다. 그를 죽인 죄책감은 영화속에 강우가 등장하는 환상으로 등장하며 괴롭힌다. 웃기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한 기이한 장면들을 박찬욱감독은 좋아하는것 같다. 강우 엄마인 라여사가 사지마비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려둔것은 그들에게 남아있는 양심을 상징한게 아닐까? 그러던 중에 강우가 태주를 육체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없다는걸 알고 그는 죄책감으로 그녀를 죽여버린다. 그러나 상현은 태주를 사랑해서였을까? 그녀를 살리기위해 자신의 피를 그녀에게 먹인다. 드디어 두마리의 뱀파이어가 탄생한것이다. 상현은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최소한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으면서 피를 구해 먹으려는 반면, 그녀는 배가 고프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생피를 마셨다. 어마어마한 힘에 불사의 힘, 상현은 태주가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태주는 상현안에 있는 이성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는 튀어나가고 싶은 욕망같았다. 강우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강우의 엄마에 의해 들통이 나자 상현또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한다. 이제 그는 더이상 이런식으로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지마비인 강우의 어머니를 차뒤에 태우고 어디론가 떠난다. 여기서 말도 많은 성기노출이 잠깐 등장한다.

 

 

 

 

 

   그는 영화초반에 실험에서 기적으로 살아온 자신을 구원의 존재로 믿는 텐트촌에 가서 한 여성을 강간한다. 마을사람들에게 들통이 나서 뒤돌아 서며 바지를 추스리는데 성기가 잠깐 보인다. 같이 본 여성관객은 그런다. 왜 궂이 그걸 보여줘야 하냐? 그냥 강간을 한것을 들킨 상황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 고 이야기 한다. 물론 그래도 된다. 그의 강간은 자신을 신격화해서 믿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행한일이다. 자신은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라는것을 알고 더이상 자신을 신격화하지말라는 의사전달이었다. 그러나 왜 송강호의 성기를 노출시켰을까?  나는 관객들에게까지 충격적으로 그의 타락과 위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주 잠깐 노출시켰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그장면이 통쾌했다. 일단 한국영화에서 성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그의 위선과 밑바닥을 충격적으로 전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서 완행버스를 타면서 걸어오면서 관객이 여자라면 내가 여자였다면 그 장면이 어땠을까 생각했다. 불편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바리코트맨의 성기노출도 아니고 영화상에서 성기노출이 여성에게 폭력일까? 박찬욱감독은 여성관객에게 성적 충격(폭력)을 가한것일까? 그런데, 얼마전에 특별전에서 봤던 장률의 영화에는 섹스장면이 아닌데도 성기 음모 노출장면이 많았다. 총을 잃어버린 경찰관(총기분실은 엄청난 실책)은 그 충격으로 넋을 놓고 길거리를 발가벗고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영화속에서도 섹스장면중에 자연스럽게 성기나 음모가 노출되기도 한다. 영화와 뮤지컬 헤드윅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는 얼마전에 상영되었는데, 영화 초반부터 남자의 자위하는 장면이 그대로 등장한다. 게이 감독의 이 작품은 남자친구를 위해 거짓오르가즘을 느낀척 했던 주인공이 다양한 섹스를 경험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자신의 오르가즘을 찾게 되는 자기성장의 이야기였다. 그게 물론 우리가 터부시하는 몸들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외국은 문화가 달라서 그렇다고? 나는 우리나라영화에서도 성의 자유로운 표현이 더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 여성에게 천사와 창녀를 기대하는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성윤리가 밖으로 나와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그런면에서도 나는 <박쥐>에서의 성기노출이 아주 반가웠다. 그러나 내가 여자관객이 아닌 이상, 내가 더 이상 접근할 부분은 아닌것 같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최악을 보여주고나서 그는 차로 돌아와 바다로 향한다. 주위가 아무것도 없어서 햇빛을 숨을 공간이 없는 바닷가 절벽으로 차를 몰았다. 멋모르고 자고 일어난 태주는 어둠이 사라져가는 상황에 당황해 차트렁크에 숨기도 하고 그들의 괴력에 멀리 날아가버린 트렁크를 다시 가져와서 덮기도 하고 차밑에도 숨는다. 그러나 상현은 태주의 시도를 계속 무마시킨다. 그런데 그장면이 좀 귀엽게 묘사가 된다. 태주에겐 양심이나 도덕이나 죄책감이 없다. 그냥 살고 싶다. 사람들 죽여서 먹고 싶을때 마시고 뱀파이어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죄책감많은 상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거두려고 함께 데려가려한다. 자신이 화가 나서 죽였다가 다시 살려놓고는 그녀의 존재까지 데려가려한다. 자신이 다시 살렸으니 그녀를 데려갈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B급 뱀파이어 무비에서 자주 봤던 엔딩처럼 해가뜨고 그들은 타서 재로 변한다. 나는 솔직히 상현은 죽더라도 태주는 살았으면 생각했다. 왜냐면 그는 끝까지 도덕과 죄책감과 양심을 내려놓지 못했고 욕망을 긍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태주가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것을 떠나서 그녀의 존재가 욕망의 긍정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내안의 어떤 욕망이든지 다 긍정하고 싶으니까. 그게 밖으로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다면 그 욕망은 긍정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신을 존중하는것이니까. 상현처럼 끊임없이 부정하고 억누르면 자신이 병이 든다.

 

 

 

 

 

   영화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133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것 같다. 영화의 평가는 아마 극과 극이리라. 대중적인 송강호씨가 나와서 서민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엉뚱한 웃음이나 가끔 주고 나중에가선 성기노출이나 하니 비호감으로 느낄분도 많을 것같다. 영화의 느낌은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일단 <올드보이>와 <친절한>에서의 비장미 넘치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음악. 그리고 B급요소적이고 키치적인 요소(강우 엄마역을 맡은 김해숙씨의 진한 화장과 그녀가 듣는 음악들)가 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송강호도 <복수는 나의 것>과는 달리 중간중간 그 특유의 애드립 같은 대사로 웃음을 안겨준다. 뱀파이어라는 소재로 단순히 액션영화가 아니라 욕망과 도덕의 딜레마를 재미있게 잘 보여준 영화같다. 나는 박찬욱감독은 JSA를 만들긴 했지만, 대중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네임밸류를 쌓은 이상 자기가 만들고 싶은 취향의 영화들만 만든다. 그래서, 스타일이 독특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후반의 구원에 대한 메세지는 나스스로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지만 <친절한>과 <JSA>가 재미있었다. 그다음이 <올드보이>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가 너무 메마르고 삭막해서 보고 나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 영화다.(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젤 재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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