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부산 센텀시티 롯데에서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독자와의 만남이 있다고 해서 무심결에 선택한 책이 <개밥바라기별>이다. 60이 넘은 작가와 내가 통할만한 연결고리 있을까 싶어서 별 기대없이 읽었다. 그런데, 시대는 달라도 젊음이 갖는 특성은 비슷하기때문일까?  마지막 작가의 말중에 "너의 모든것을 긍정하라"라는 대목에선 눈물마저 흘러내린다. 여전히 고전에 대해서 지루함이라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긴하지만, 고전이 고전일수밖에 없는건 인간의 속성혹은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 현재의 표현과 방식이 다르기에 젊은이들이 읽을때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고 생각하고 삶을 많이 산 사람일수록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일수록 고전에 대한 이해력의 깊이가 커진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아직은 고전을 거의 읽지 않는편이고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언젠가 고전이 나를 부를때 그때 만나련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 "장씨"와의 만남은 자신이 책으로 접하는 지식과 현실의 괴리를 풀수있는 해답으로 주인공 준에게 다가온다. 전국의 공사판과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행자생활등의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기에 나는 오히려 그 경험이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누구는 작가의 개인경험담을 끊임없이 재탕 삼탕하는것을 보고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문학적 감수성 보다는 체험의 직접성을 더 좋아하는지라 이 책이 참 마음에 들었다. 체험의 소설화는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만들지 않고 우리곁의 이야기로 머물게 한다. 나는 작가의 사소설을 좋아한다. 어쩌면 소설이라는 문학자체가 대부분 작가의 사소설이 아닐까? 처음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기전의 준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그런데, 읽어가다보니, 자꾸 화자가 누구인지 헤깔렸었다. 오른쪽밑에 보니, 준, 인호, 영길, 미아, 선이, 상진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이름이 그 단락에서 화자가 되어서 이야길 한다는걸 알아차리고 금방 이야기를 따라잡을수 있었다. 화자가 자꾸 바뀌면서 이야기를 연결시켜가는 모습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을 배경으로한 영화-와 <라스트데이즈>-커트 코베인의 자살의 순간을 담은 영화-와 닮아 있었다. 같은 사건이라도 이야기하는 화자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기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각자의 감정속으로 직접적으로 들어갈수있어서 소설의 주인공은 "준"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소설속의 여러 젊은이들이 모두 주인공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준은 기존의 학교교육과 평균적인 삶의 진행방식에 회의를 느끼는데, 나는 왜 그 나이때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이 든다. 왜 자율학습이란 이름으로 강제로 학생을 잡아두는것에 대하여 반항한번 제대로 못했는지, 왜 학생들의 두발권과 옷을 자유롭게 입을 권리조차 선생님에게 의해 제재를 받아야 하는건지, 왜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자체가 오로지 대학을 가기위한 공부여야 되고, 점수로 인간의 등급이 결정되는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반항하지 않았을까....나이 서른즈음이 되어서야 사회인문학학 책들을 접하며 내가 12년넘게 대학까지 합하면 16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보같은 교육을 받아왔다는걸 깨닫는다. 바보같이 살도록 무의식적으로 세뇌를 당하며 살아온거같다. 사회에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를 나로 살게 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도록 교육을 받아왔던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스스로 나의 답을 하나하나씩 찾아 가는중이다. 아직도 나는 소설속 준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당시 주인공 "준"처럼 반항을 하거나 학교를 떠나서 사회를 경험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모범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제아도 아닌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아니 친구들과의 추억거리도 없는 암흑시대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준과 같은 그런 행복(?)한 추억혹은 방황의 기억은 없다. 다만, 준이 베트남에 가기전에 겪었던 많은 경험을 오히려 20대때 동안 오랜시간에 걸쳐서 방황으로 경험했다. 나도 배낭여행이랍시고 떠나보았지만(나는 결국 3일만에 돌아왔었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즐기는 스타일이 아님을 깨달았고 소설속에 나오는 말처럼 ‘어디에서나 기억은 거기 있는 사람과 함께 남는다’는 말에 동의를 표하고 싶다.

  준이 사랑(?)했던 미아와의 관계. 그당시 준은 오직 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어있었다. 미아는 여자가 대학을 가겠다해서 아빠에게 뺨을 맞은 것처럼 현실이 싫었고 가족이 싫어서 현실을 벋어 나고자 했다. 그래서, 준이를 만나면 현실의 이야기는 하지않고, 읽었던 책이야기나 영화이야기만 했다. 그러자, 준이는 화를 내며, "왜 니 이야기는 하지않고, 책속의 이야기만 하니? " "나는 이 현실이 싫단 말이야" 그 지점에서 둘간의 벽이 보였다. 준은 책속에서 읽는 진실이 자신이 체험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발을 딛고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했다. 그래서, 그는 우연히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장씨"를 따라 전국을 유랑하며 힘든 노동을 잠깐(?)이나마 경험하게된다. 그는 몸으로 직접 겪는 삶을 체험하고 싶었던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된다고 하지만, 육체적 노동을 통한 삶은 참 힘들다는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장씨와의 자유로운 삶을 이별하고 자신만의 여행을 하다가 행자노릇도 잠시 하게된다.

  작가의 말은 소설과 달리 작가가 인문학서적을 많이 읽고 철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참 딱딱하였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라는 이말이 나에게 눈물을 떨구게 만들었다. 별볼일 없었던거 같고, 초라했던 나의 삶, 그 삶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다만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기위해 끊임없이 방황했던것이다. 그러니, 그방황의 모든것을 긍정하라는 그말. 그말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준이와 같은 방황은 하지 않는다. 현실과 자신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과정하나하나가 각자의 방황이며 각자의 삶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준에게 많은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그림을 그리던 정수, 부잣집 도련님 상진, 돼지라고 불리던 인호,  장씨아찌에게 그림을 배우던 선이, 집을 벋어나 독립하고 공부를 하기위해 직장생활하며 밤에는 공부를 하던 미아의 각각의 삶을 모두 긍정하고 싶다. 누가 누구보다 더 멋진 방황을 하고, 더 멋진 성장을 하고 그런것은 없는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기준에 따라 자신이 추구하는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것뿐이다. 어떤이는 기존의 사회에 잘 적응하고 진입하는것이 가치있다고 여길것이고 어떤이는 준처럼 자신과 제대로 만나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삶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라는 주인공의 메세지가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 이젠 나의 짧았던 3일의 배낭여행도 긍정하고 싶다. 지금 내가 서있는곳에서 발을 딛고 내가 할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 황석영작가와 <개밥바라기별>로 처음 만났지만, 요근래 나왔던 <바리데기>보다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로 먼저 만났던 <오래된 정원 상,하>, <모랫말 아이들>, <객지>, <삼포가는길><무기의 그늘 상,하>-베트남전 이야기, <심청, 연꽃의 길>등이 더 읽고 싶어졌다. 준의 베트남의 경험이 <무기의 그늘>을 만드러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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