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년이 온다 (10주년 한정 특별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4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P.24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께에 있을까.
P.69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살의 그녀는 눈을 질끔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p.77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P.85
모두가 그녀에게 귀엽게 생겼다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중략) 그러나 열아홉살의 여름이 지나자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스물네살이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스럽기를 기대했다. 사과처럼 볼이 붉기를, 반짝이는 삶의 기쁨이 예쁘장한 볼우물에 고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p.95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105
처음 방으로 밀어넣어져을 때는 우리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린 고등학생들도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모두 침묵했습니다. 그 새벽에 겪은 일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한시간여의 그 절망적인 침묵이, 그곳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였습니다.
P.116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P.134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들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p.134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5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 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 주기를 기다립니다.
P.136
성희 언니가 보름달을 보고 말했다. 그럴듯하지 않니. 달은 밤의 눈동자래.
P.146
그 가로등 아래 당신은 혼자 서 있다. 불빛이 비치는 곳까지만 안전하다. 어둠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관 없다, 몸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불빛의 동그라미를 빠져나가지 않을 테니까.
p.154
일과 짧은 휴식과 잠의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혼자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한, 빛의 동그라미 바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p.158
무릎 꿇고 살기 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