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편이 표지만 보고 흠칫했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sns에서 몇 줄의 문장을 보고 반해 바로 온라인에서 주문해 읽었다. 생각보다 촘촘하고 사유가 깊은 내용이 많아 한 번에 많은 내용을 소화하기는 벅찼던 책. 사실 표지 색상은 여리여리한 분홍색인데 책 속 내용은 뭐랄까. grey이색이야가 어울리는 것 같다. 결혼 후 자주 울컥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 울컥한 내용 같으니까.

이 책을 소개하는 구절엔 이렇게 나온다.
"이 책에 담긴 싸움 목록은 크게 네 가지다. 여자라는 본분, 존재라는 물음, 사랑이라는 의미, 일이라는 가치"

-저자의 말 중-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챕터는 여자라는 본분과 일이라는 가치다. 결혼 후 여자는 어떻게 변하는가. 여자인가, 아내인가, 엄마인가, 딸인가, 며느리인가. 때에 맞춰 가면을 바꾸며 사는 사람처럼 결혼 한 여자도 그런 건 아닐까. 사실 이 책을 내가 결혼 전에 읽었다면 크게 와 닿지 않았을 것 같다. 사회에서 소소하게 느꼈던 남녀 차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면서도, 결혼 후 느낀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차별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때론 울분했다. 왜 사위와 며느리는 다른 걸까. 남자, 혹은 여자 혼자 배우자는 놔둔 채 여행하는 게 뭐가 문제인 건가? 그걸 시댁에 허락을 받았냐는 질문을 왜 받아야 하는 걸까. 물론 결혼하고 난 뒤 얻은 행복감과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은 끊임없이 결혼 생활 주변에 어슬렁거렸다. 그래서 이 책은 결혼 후 느끼는 이상함을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 삶이 내 살 같지 않을 때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한없이 투명해지려면 계속 말해야 한다. 싸움이 불가피하더라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의미가 옅어지고 존재가 희미해질수록 나에게, 주변에게 묻고 또 물어보면서 말해야 한다. 올해 나의 목표가 '할 말은 하고 살자'인데, 그동안 가만히 있으니 다들 가마니로 보는 걸 겪고 난 뒤 깨달은 삶의 이치다. 할 말은 하고 살자.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 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 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버린ㄷ. 떨어진 단추를 달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메운다. 해드는 오후 마루에 앉아 빨래를 반에서 반으로 접으며 미련과 회한을 접는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정말 딱 맞는 말이다. 나는 엄마가 왜 화를 내면서도 그렇게 방바닥을 닦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지 몰랐다. 그 행위가 엄마의 속을 달래주는 것도 모르고.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살림을 살아보니 알겠다.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하면서 묘하게 편해지며 빨려 드는 것이 바로 살림인 것을. 나는 이것을 육체 노동의 기도라고 부르는데, 하나씩 정리하며 해야할 일을 하다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때가 온다.
대부분 집안일은 여성의 몫일 것이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여성이 훨씬 많이 가사 노동을 한다고 하니, 여성의 일은 안과 밖에서 끊임이 없다. 하지만 살림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마법 같은 기분을. 대부분의 여성은 공감하겠지.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이곳, 저곳에 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가끔은 너무 깊이 들어가 결국은 부정적인 잡념들로만 채워질 때도 있지만, 그런 것들도 결국은 나를 이루는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버릴 것이 없다. 이렇게 사유하고 성찰하는 일이 나를 알아가는 일임을 알기에. 그래서 나중에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기록해 본다.

그러는 의미로 오늘은 처음으로 '모닝 라이팅'을 시작했다. 물론 이게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게 낫다"

돈과 명예를 떠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 계속 집에 있다고 하더라도 손을 쉬게 하지 않고 머리를 써서 조금이라도 새롭게 살려고 노력해야겠다. 위문장을 보고, 눈이 번뜩였다.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투명해지도록 싸우자.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은유 작가는 대범한 여성 활동가인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순하디 순한 여성인 듯도 하다. 또 언어를 모아 사랑하는 문장을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이 책의 매력이 있다면 바로 이것. 평범한 바람이 간절해지는 것.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

결혼한 여자가 바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학생이었다가, 직장인이었다가, 아내였다가, 엄마가 되는 시기마다 챙겨 할 것들이 생기고 바뀌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나 자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필요하면 싸워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게 바로 '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