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읽은 김혜진 작가의 첫 책은 <딸에 대하여>였다. 서점의 카드 뉴스였나? 누군가 남겨 놓은 포스팅이었나? 어떤 구절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밀려온 감정은 꽤 복잡했다. 주인공 서사에 겹친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이었나, 아니면 어떤 슬픔이었나. 여하튼 그 감정은 꽤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고 그렇게 한 작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시작되었다.

이번 신간(이라고 말하기는 좀 늦었지만) <오직 그녀의 것>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는 설렘과 기대를 조심스럽게 포장한 회색빛 포장지를 뜯어내는 마음이었다. 책을 사랑하고 애정하는 편집자의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 색감은 환희와 기쁨의 밝은 컬러가 아니라 책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겹쳐진 무색의 회색빛에 가까운 색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좋다, 안 좋다를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나에겐 굉장한 ‘호’의 책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리뷰를 남기는 것이고.

다만 확실한 건 <오직 그녀의 것>은 제목 그대로 책에 대한 모든 감정은 그 책을 만들고 꺼내고 발견하고 드러내는 편집자의 모든 것이며, 오직 그녀의 것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037-038) 밤에는 쪽글을 끄적거리던 반면 남짓한 그 시간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해서 그녀의 삶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듯했으나 그녀가 자신을 알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은 당시에는 모호해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세원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지는 방식으로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해 가을, 석주는 스물넷의 나이로 교한서가의 교열자로 입사했다.


교열자로 일하며 석주는 자신도 모르게 편집자의 길에 더욱 깊게 발을 내딛었다. 책에서 이런 부분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게 좋았다. 우리는 어떤 것에 몰입할 때 스스로 알아차리기 힘든 열정을 은근히 드러내는 때가 있는 있는데 석주도 그게 뭔지는 도통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더 알아가고 싶은 길을 따라 나섰다. 그 발길을 따라가는 나도 덩달아 책을, 책에 대해, 더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참. 좋았다.

역시 <오직 그녀의 것>은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책 또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적실 모든 문장과 단어가 이 책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석주가 몰입하고 어려워하는 모든 장애물과 그것마저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서사는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051) 단어의 조합에 불과했던 문장은 석주를 전쟁터 한 가운데로 데려갔다. 등장 인물과 축축한 숲길을 함께 걷게 했고, 오래전 전소되어 확인할 수 없는 어느 화가의 그림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때로는 언어로 구현된 의미 너머 저자가 쓰지 못했거나 쓰게 될지도 모를 어떤 문장들을 불현듯 만날 때도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십 년 넘게 사용해온 자신의 나무의자에 앉아 원고를 베껴쓰는 동안은 몇 시간이 몇 분 같았다. 시공간의 경계를 지우며 육박해오는 강렬한 몰입의 순간이 석주를 사로잡은 거였다.


아, 이런 문장을
이런 글을,
이 책에서 계속 읽을 수 있다니.

물론 글을 다루는 편집의 세계를 무조건 아름답게 읽는 책은 아니다. 그 어떤 다큐멘터리 못지 않게 노동이라는 시선에서 고루하고 지루한,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이벤트와 저조한 판매력 같은. 과거의 출판시장부터 현재에 이르는 산업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그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이 일을 사랑하고 끝까지 감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마음을 내보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석주의 편집자 인생을 통해 일과 사랑이 철저히 분리될 수 없고, 일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올곧게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그 불안함 또한 애정임을 모를 수 없으므로. 아마 이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그 복잡한 사랑의 마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수동적이던 석주가 문학을 통해 자신 내면의 세계와 맞닥뜨리고 자아를 확장해 가는 과정이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펼쳐지는 서사는 아름다웠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단순히 좋아서만 유지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결국 삶의 일부로 자리잡는 일. 그 과정을 석주가 온 몸으로 끌어안는다.

이 책을 여름에 읽었다면 달랐을까?
눈이 내리고 날이 꽤 추운 겨울에 <오직 그녀의 것>을 읽었던 건 어떤 운명이었을까.
쓸쓸한 날씨에 꽤 잘 어울렸던 석주의 여정이었다.

덤덤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편집 세계를 쌓아올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이룬 오직 그녀의 것을 독자로서 읽는 일은 고마운 일이었다.

나의 세계 또한 별일 아닌 일상에서 채워지고 있으리란 위로가 되었다. 책 띠지에 홍보 문구로 달려 있던 말, ‘어쩌면 가족보다 가깝고, 때로는 연인보다 내밀한 편집이란 그림자 노동 혹은 종합-예술’이란 글이 나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위로는 하루를 기꺼이 감내하고 또 앞으로 기어이 가게 하는 담담한 열정을 끌어냈다.

당신 책을 좋아하나요?
질문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선사하는 조용하지만 근사한 여정으로 함께 가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