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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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나이 든 너희 중에

사랑을 구하는 자는

죄가 없이도 세상의 벌을 받으리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예언이란 말인가.

1950년대에 못생기고 늙은(40대) 미혼 여성은 오롯이 설 세상이 없다.

남편이 없으면 삶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본인이 재능이 뛰어나 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희박한 일.



주디스 헌은 부모님 없이 이모에게 길러져 노망난 이모의 병수발을 드는 바람에 좋은 나잇대를 그냥 넘기고 살아온 인물로, 가장 취약한 점은 바로 '못생김'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가난해도 얼굴이 예뻤다면 늙은 영감이라도 한번씩 얼굴을 들이밀겠지만 헌에게는 그 어떤 남자와 그림자도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모가 죽고나서 아일랜드의 한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하숙집 주인의 오빠, 뉴욕에서 온 제임스 매든을 만나게 되면서 주디스 헌의 인생은 꽤 괴롭게 흘러간다.

사실 이 책이 명확하게 관통하는 지점은 주디스 헌이 느끼는 외로움이다.


요즘 이 책을 읽으면 무슨 남자 하나 없다고 세상이 무너지고 외로워 술주정뱅이가 되냐고 묻겠지만 아까 말했듯이 이 시대에서 남자는 곧 세상과 연결되는 소통창구이고 여성의 존재 유무를 밝히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혼받은 적 하나 없는 주디스 헌에게 결혼은 그녀가 평생 이루고 싶은 꿈이고 소망이며, 그 세계가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일 수밖에 없다.


외로움은 주디스 헌을 더욱 혼자로, 쓸쓸하고 추잡한 망상가로 만든다.

늘 남자들은 헌양 옆을 떠나려고 애썼지만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주는 매든을 보며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곧 결혼을 해서 함께 뉴욕에 갈 일을 꿈꾸는 여자. 하지만 매든은 주디스 헌을 돈 많은 여성으로 오해해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고, 헌 양도 결국 이 매든이 뉴욕에서 한 일이 사업이 아니라 호텔 도어맨이였다는 것에 엄청난 실망을 한다.

제3의 눈으로 볼 땐 왜이렇게 오바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외로워서 그런다.

옆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니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쓸쓸하고 차가운지.

하여간 남자들이 문제다. 애초에 이 여성에게 돈을 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헌은 살아남았을테니까.

점점 수강생이 줄어드는 피아노 선생으로서도 어떻게든 살았을 것이고 연간 100파운드로 연금을 받으며 자기가 살 궁리를 했을텐데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은 남자에게 배신당하면서 신을 원망하기에 이른다.(메든이 주디스 헌의 사랑 고백을 가멸차게 뿌리치기 때문)

문제는 이 외롭고 복잡한 마음을 술에 기댄다는거다. 술이.. 주디스 헌의 감정을 증폭시키고도 남을 위스키가 위로한다는게 문제였고 술 때문에 그나마 옆에 있던 사람들과 멀어지고 결국 요양원에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아, 비혼의 늙은 여성의 갈 곳은 결국 요양원이란 말인가/라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이건 주디스 헌의 운명일 뿐이니.

그동안 내가 읽어 온 고전 소설 속 비혼 여성들은 자기 삶을 더 낫게 개척하려는 사람도 많았고 적어도 술이나 허울뿐인 사랑에 기대지 않으려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주디스 헌의 결말은그녀 스스로 이끌어온 운명의 몫인 것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술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못생겼단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처지가 불쌍해진 이모를 돌보다가 가난해졌다는 이유로 이 여성에게 차갑게 등 돌릴 이유는 없으니까. 여성이 홀로 설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홀로 살아갈 운명을 지녔기 때문에 주디스 헌에게는 외로운 열정이 필요했고 그것이 신이었고, 기도였다가 그 응답조차 듣지 못한 채 술이 주는 달콤한 세계에 빠졌을 뿐이다.

정말, 그랬을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주디스 헌이 가엾고 안됐고 불쌍하고 뭐 그런 감정이 지배적으로 들었던 것 같다.

사실 사람이 외로우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지금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 사고의 범인들도 내면 깊숙이 파고들면 늘 혼자였고, 왕따였고 곁에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에 비하면 헌 양은 술에 취해 신에게 대들고, 신은 없다고 부정하며 다시 회개하는 길을 따르고 있으니 얼마나 가련하고 슬픈 삶인가 말이다.

퇴근 후 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을 보면서 외로운 감정에 얼마나 증폭되고 또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의 약점이자 내가 좋아하는 감정 '외로움'에 대해 오늘도 이렇게 책으로 또 한 겹의 세계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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