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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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바탕 위에 연필로 그린 듯한 사람들.

처음에는 표지가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다시 표지를 덮어 봤을 때 무척 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그림인 생각이 들었다.

「빅이슈」 잡지에 실린 글들을 모아 발행된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은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사물을 관찰하고 느끼는 모든 감각의 끝은 사람을 향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없이 따뜻한 이유다.


작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남편 토니와 두 딸 에린, 린아와 함께 영국에 이주한 뒤로 영국과 한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책을 빌려 썼다. 외국에서 바라보는 모국의 느낌은 늘 그립고 애탈 것 같지만 의외로 산뜻한 시선으로 담은 장면도 많고, 특히 한국전쟁에 참여한 영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동안 여기서 나고 자란 내가 너무 무지한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생각도 든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남편을 받아들이는 마음, 이제 스무 살이 되어 독립을 준비하는 첫째 딸을 응원하는 마음, 공동체를 이루며 언제든 함께 그러나 적정한 거리에서 살고 있는 이웃들의 마음을 찬찬히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어쩐지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건 왜일까.

주변에 있는 사물에 깃든 추억과 감정이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직접 투병 중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부모는 아들을 군대에 보냈었을 수도, 혹은 가족과도 가까운 이웃을 지척에 두고 사는 사람도 많을 테니까.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속에는 혼자 그러나 함께라는 수식어가 잘 와닿는 책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 혼자인 것 같지만 우리는 가족, 이웃, 친구, 사회, 여러 곳에 알게 모르게 연대 되어 있고 그 사실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남편이 찬 파킨슨병 환자를 나타내는 팔찌는 주위 사람들이 느긋하게 그를 기다려 줄 수 있도록 하고 채리티샵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세계 정복이 아니라 무탈하게 세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에 있으니 말이다.

혼자인 것 같지만 함께다.


스튜어드는 사람들 곁에서 규칙을 잘 지키도록 안내하는 도우미로 작가가 영국에서 성당을 다닐 때 맡았던 역할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거리 두기 등 여러 가지의 규칙이 생겼고 나이 드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봉사의 영역인데 작가는 장례 미사에서 이 스튜어드를 많이 경험했다고 한다. 확실히 외국의 장례식과 우리나라의 장례식은 많이 다르다. 외국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음악을 트는데 그건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일 수도, 혹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고인을 떠오르는 음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도 죽으면 나의 장례식에 음악을 틀어 놓고 싶은데 그건 아직 먼 이야기이고 ^^;;

작가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아일랜드 민요를 틀었고 딸 다니나는 장례 미사 안내지 뒷면에 아일랜드 기도문 그를 지켜 주옵소서를 넣었다고 해서 어떤 내용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거 이거 내용이 너무 좋음.(책 읽다가 워드로 쳐서 프린트까지 해놓음 ㅎ)

사실 음악은 한순간에 그 시절, 그 기억으로 나를 넘어가게 하는 한 방이 있는 주문이다. 꼭 장례식장에서만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한강을 건너는 찰나에 귓가에 들리는 음악도 모두 누군가를 소환한다.



이 책을 읽으면 자꾸만 착해지고 싶다.

이웃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책

그러니까 이건 연대의 이야기다. 개인의 특별함이 강조되고 혼자 사는 이야기가 박수받는 시대에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면 좋은 이야기를 내밀하고 사적인 경험으로 정답게 쓴 책, 그래서 단숨에 후루룩 읽을 수 있었고, 읽는 내내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워낙 무심하고 이기적인 내가 친절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여기 나오는 펍의 주인 아일랜드인 에이드리언의 사고방식이 무척 와닿았다.

"당신 로컬이 뭐예요?"

"레드 라이언이요. 그쪽은요?"

"허스트 암즈예요."

무슨 대화냐면? 아마 영국에 펍이 유명한 건 다들 아실 터. 위의 대화는 당신이 자주 가는 로컬 펍이 어디냐고 묻는 거다.

이 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펍이 동네의 마을회관의 역할을 한다는 것만 이해하면 된다.

펍은 '퍼블릭 하우스'의 줄임말이다. 개인 집이 가족을 위한 사적 공간이라면, 펍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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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펍은 남녀노소 누구나 모이고 대화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때론 혼자 홀짝 술을 마시며 공공의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곳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사랑방 같은 개념인데 작가가 사는 동네의 펍 주인 에이드리언은 단골손님에게도 사무적으로 대하는 일명, 얄짤없는 주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사람을 살짝 얄밉게도 생각하지만 의외의 면을 발견한 건 펍에서 열린 바비큐 파티에 갔을 때였다. 무료로 열린 파티에 자선 기부금을 모아 어린이 병원에 기부하는 주인에게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묻자 그가 하는 대답이 내겐 멋지게 들렸다.


그냥 비즈니스를 하는 거야. 펍은 지역 주민들이 와 줘야 운영되는 거고,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 계속 찾아올 거고, 그래야 사업이 계속되는 거잖아. 커뮤니티가 강해지면 펍도 잘 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지.

그의 말속에는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 갖는 우월감이나 자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야박하다고 여겼던 그의 사무적인 태도가 오히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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