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 P38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 P58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 P74

옥춘당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고 화한 맛이 혀끝부터 천천히 퍼졌다. 입안에서 사탕 조각을 굴리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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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일들은 불행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 그렇게도 불행하므로 행복된 것이다.’
그에게는 불행의 쾌미(快味)가 알려진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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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고기를 썰고 굽고 씹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
언제랃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이빨 앞에서 떨고 있는 한 마리 짐승,
또는 한 덩이 고기가 되어

- <누군가의 이빨 앞에서> 중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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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발과 뱀과 풀은 나아가고 있다
태양 없이도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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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시인의 말일 때가 많다.

시인의 말

사람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무기질인 동시에
멈추고 듣고 느끼는 유기체.

살아숨쉬는 물질로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온몸이 귀로 이루어진 존재가 되고 싶었다.
경청의 무릎으로 다가가
낯선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지친 손과 발을 가만히 씻기고 싶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
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이 시집을 이루고 있는 모든 물질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5년 3월
나희덕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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