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 콘크리트 평야 위에서 검은 연기를 뿜는 초대형 기계,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소리, 거침없이 부는 초겨울의 바람, 좌석도 가방도 시간도 잃은 채 어리둥절해하고 화를 내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여러 언어로 웅성거리는, 오와 열 따위는 없이 털썩 앉거나 서성거리거나 제각각이지만 아주 흩어지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다."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이것은 아무 결심도 아니지만 한번 더 말한다."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앞뒤로 줄을 서서 대피한 아까의 일본 청년이 곁에 있다가 뜻밖에 한국어로 대답했다."확실히 그렇네요." - P299
창밖에서 "하나, 둘"이라거나 "한번 더"처럼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곽은 상자 속에 있던 피낭시에, 혹은 다쿠아즈나 비스코티일 수도 있는, 유럽 어느 언어로 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 P176
그의 얘기를 중단시키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건 벽에 대고 지껄이는 거나 진배없다. 그는 내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거기에 있다. - P141
이미 판이 벌어진 뒤에 들어왔다가 남들이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한 채 판을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바로 그 인생처럼 연극을 경험한 셈이다. 혹시 우리는 그런 특권을 누린 자의 풋풋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 P179
극장은 이런 곳이지.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고픈 글이다.
이토록 어둡고 서늘한 곳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그리고 여기에서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몰두하듯 어떤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니, 꼴깍 침을 삼키다가도 한바탕 자지러지듯 웃을 수 있다니, 공간 전체가 두 팔 벌려 나를 환대해주는 듯했다. 그때 영화관은 내게 어떤 가능성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 P170
윌레츠 부인이 죽고 난 후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 앞으로는 언제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따뜻한 동요, 예전만큼이나 분주한 애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 P83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연필을 입에 문 채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이디스는 한 줄기 서늘한 만족감을 느끼며 마지막 줄을 적어 넣었다.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