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탄생 120주년 전면개정판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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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역사나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이 개념을 ‘악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해석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칫 인간 본성을 단순한 성악설로 환원하거나("그래, 인간은 원래 악하다고!" 아이히만을 그저 평범한 개인으로 축소하는 오해("너라고 다를 것 같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지만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악이 특별한 악의지나 광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말과 생각을 멈춘 상태, 즉 사유하지 않음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이는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간명하게 드러난다. "


아르헨티나에 체류 중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송환한 이스라엘 정부와 검찰은, 이 재판을 단순한 개인의 범죄를 심판하는 법적 절차로만 여기지 않았다. 재판은 점차 나치를 단죄하고 유대 민족의 고통을 세계에 각인시키려는 정치적·교육적 무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아이히만은 반드시 극악무도한 괴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드러난 아이히만의 모습은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학살자가 아니라 상투적인 말만을 반복하며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관료에 가까웠다. 나치라는 거대한 조직과 이념 속에서 그는 판단을 유보한 채 주어진 역할을 기계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무비판적 복종이 얼마나 거대한 재앙을 낳을 수 있는지를 아이히만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인류사에 또 있을까.


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아렌트가 이 재판을 바라보는 철학자로서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 정부와 검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재판이 법적 판단을 넘어 정치적 목적을 띠게 된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유대인 평의회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는데, 그들의 협력이 결과적으로 학살의 효율성을 높인 측면이 있었는지에 대해 불편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단죄나 옹호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을 멈추지 않는 태도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지금까지도 명저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이러한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 살고 있다. 정치의 장에서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이에따라 타자는 점차 지워지며 피해에 대한 책임은 흐려진다. 현대인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이 기대고 있는 권위와 이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내가 사유하고 있다고 믿는 이 생각들이 과연 어디까지 나 자신의 것인지 쉽게 확신할 수 없다. 아렌트가 오래 전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한다.


* 이 책은 한길사의 독서모임 지원으로 제공받았으며 직접 책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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