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아렌트가 이 재판을 바라보는 철학자로서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 정부와 검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재판이 법적 판단을 넘어 정치적 목적을 띠게 된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유대인 평의회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는데, 그들의 협력이 결과적으로 학살의 효율성을 높인 측면이 있었는지에 대해 불편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단죄나 옹호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을 멈추지 않는 태도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지금까지도 명저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이러한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 살고 있다. 정치의 장에서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이에따라 타자는 점차 지워지며 피해에 대한 책임은 흐려진다. 현대인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이 기대고 있는 권위와 이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내가 사유하고 있다고 믿는 이 생각들이 과연 어디까지 나 자신의 것인지 쉽게 확신할 수 없다. 아렌트가 오래 전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한다.
* 이 책은 한길사의 독서모임 지원으로 제공받았으며 직접 책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