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노 쇼고(歌野晶午) 지음 ★ 김성기 옮김 / 한스미디어 / 2005년12월26일 초판1쇄 발행


2004년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제4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소설은 참으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권의 시집 같은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소설은 추리작가 우타노 쇼고의 2003년 작품으로 2004년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제4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라는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책의 마지막에 숨어있는 기발하다 못해 기가 막히는 반전에 황당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반전의 충격효과가 큰 만큼 이 소설은 내용 전체가 교묘하게 그 반전에 포커스를 맞춰서 짜여 있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반전의 정체가 드러나면 아마도 내가 그랬듯이 대부분의 독자가 다시 앞의 내용들을 재확인하는 수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단점 또한 이 반전에서 나온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식의 반전이 처음에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강력하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책장을 덮고 한참 지나서 생각해보면 반전이라기보다는 단지 작가의 말장난에 내 자신이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여기서 이 책의 핵심인 반전의 내용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그 유명한 『유주얼 서스펙트』의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망발처럼 독서의 의지를 완전히 끊어놓는 천인공노할 스포일러 살포 행위이기 때문에 그 반전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다. 다만, 반전이 생명인 소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 반전의 특성 상 절대로 영화나 드라마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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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품 속 화자인 나루세가 사쿠라라는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여인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지하철 선로에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려던 사쿠라를 구해주게 된 나루세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녀와 얽히게 되고 고등학교 후배인 기요시가 헬스클럽에서 만나서 한눈에 반한 여성 아이코의 부탁으로 자신에게 어떤 사건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면서 그의 나름대로 평온했던 일상은 점차 파란만장한 사건의 연속으로 변해간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지금 현시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따라 진행되다가 책의 중간쯤부터는 주인공 나루세의 아주 오래된 과거 얘기가 한참 동안이나 나온다. 이 부분에서 과연 이런 과거지사가 사건 해결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이 과거사건의 현재와의 인과관계 역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이 책은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그렇듯이 마지막 부분에 모든 사건의 실체가 한꺼번에 드러나며 폭풍처럼 몰아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종반부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전개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초중반부에 일어나는 일들이 언뜻 보기에는 본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로 작용하며 전체적인 구조가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얽혀있어야 한다. 이 작품도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앞에서 나온 얘기들이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반전 자체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다소 무리하고 억지스럽게 설정된 부분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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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반전이 돋보이는 추리소설을 세 개만 뽑아보라고 한다면 엘러리 퀸의 <Y의 비극>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중 최고를 고르라면 단연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다. (얘기 진행상 반전 내용을 공개해야겠다. 스포일러가 신경 쓰이는 사람은 다음 단락으로 건너뛰기 바란다.) 앞에 있는 두 작품의 반전도 정말 기가 막히지만, 마지막이 가까워 오면서 대강 눈치를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반전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회색의 뇌세포’라 불리는 명탐점 에르큘 포와르가 범인을 지목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는 공포를 체험하게 된다. 포와르가 지목한 범인은 1인칭 시점인 이 소설의 화자이자 사건 내내 포와르의 옆에서 조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의사 셰퍼드로 용의자 선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의 진행자를 교묘하게 범인으로 감추어 놓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기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직후,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보지 못했던 주인공이 범인이라는 엄청난 반전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지만 그와 동시에 흥미를 끌기 위한 비열한 장치라는 이유를 들어 비난하는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반전 또한 이처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는데, 나는 다른 모든 부분을 떠나서 일단은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독자에게 준다는 점에서 반전의 묘미를 맛보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작가에서 속았다는 괘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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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노 쇼고가 일본에서 2003년 발표한 초판과 2007년 발간된 새로운 버전의 일본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표지를 보면 마치 시의 한 구절 같은 묘한 느낌의 제목과 어울리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간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이 소설의 장르가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이 작품의 표지는 언뜻 보면 로맨스 소설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예쁘게만 꾸며져 있다. 사전에 이 소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서점에 서서 책 내용을 뒤적여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추리소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책의 상품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선택하는데 표지가 하는 역할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지만을 보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책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몇몇 사람들 위주로 표지를 두꺼운 하드커버의 양장으로 만드는 것을 자제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속지의 활자 크기도 줄이고 종이의 질도 떨어뜨려서 책 자체의 가격을 내리자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책 한권의 가격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싼 건 아니지만, 독서인구 운운하며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비판을 쏟아낼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 책 가격에 관한 문제다. 쓸데없이 딱딱한 양장으로 포장하고 활자를 쉽게 눈에 들어오게 하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는 코팅을 입히느라 책값을 올리는 것도 문제지만, 소설의 장르를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예쁜 표지로 꾸며 놓는 것 또한 분명히 문제가 있다. 책 읽는 즐거움은 예쁜 책 표지를 보고 부드러운 종이를 만지는데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책 안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일 테니까.


2008/09/23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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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恩田陸) 지음 ★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5월30일 초판1쇄 발행


일본 내에서의 온다 리쿠라는 작가의 위상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녀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그 어떤 일본작가에 비해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녀가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1991년 제3회 일본 판타지노벨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여섯 번째 사요코>로 작가생활을 시작한 온다 리쿠는 현실과 환상세계의 경계를 오가는 판타지적인 느낌의 독특한 작품들로 사랑받아 오다가 2004년에 발표한 《밤의 피크닉》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으로 서점 직원들이 가장 팔고 싶어 하는 책을 선정하는 제2회 서점대상 1위를 차지하고 제2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을 타게 되면서 그녀의 이전 작품들도 덩달아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밤의 피크닉》은 그녀가 이전에 발표했던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데, 마치 SF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학교에서 매년 열리는 하룻밤 동안의 행군을 통한 이복남매의 이해와 화해 과정을 그린 《밤의 피크닉》은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늘 얘기할 《초콜릿 코스모스》 또한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현실 세계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연극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끼와 재능이 넘치는 배우들이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펼치는 격렬하면서도 아름다운 경쟁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소설판 《유리가면》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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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은 두 명이다. 유명한 배우집안 출신의 여배우 아즈마 교코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 대부분이 배우였던 탓에 자연스럽게 자신도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엘리트지만 대중적인 인기에 연연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스스로 선택해서 거기에 혼신의 힘을 불어넣을 줄 아는 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배우이다. 반면 또 한 명의 주인공 사사키 아스카는 어느 날 느닷없이 창단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남성 열 명으로만 이루어진 극단에 찾아온 수수께끼의 소녀로 평범한 외모에 평소 말수도 많지 않지만 무대에만 서면 폭발적인 끼를 발휘하며 보는 이들을 경악케 만드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인 《초콜릿 코스모스》는 얼핏 무대 뒤편에 숨어있는 암투와 배우들 간의 갈등을 소재로 한 작품일 거라는 착각을 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작가는 주인공인 두 여배우 외에도 연극무대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를 이 책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으며 연기에 대한 욕심과 프로근성이야말로 배우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설적인 프로듀서 세리자와 다이지로가 기획하는 연극무대에 여주인공으로 서기 위해서 벌이는 여배우 다섯 명의 오디션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로 경쟁자들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그녀들의 놀라운 연기를 넋을 잃고 쳐다보는 객석의 분위기가 마치 내 자신이 그 현장에 함께 있는 것처럼 잘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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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는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 《네버랜드》가 드라마화 된 적이 있고 《밤의 피크닉》은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원작을 읽은 직후에 본 영화판 《밤의 피크닉》은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고, 드라마판 《네버랜드》는 워낙에 평이 좋지 않아서 책에서 느낀 사춘기의 아련한 감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영상으로 재탄생되는 온다 리쿠의 작품은 일본 영화와 드라마의 특성 상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거기에서 파생된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나 《흑과 다의 환상》 같은 작품들은 왠지 모르게 일본보다는 헐리우드와 어울리는 느낌이 든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서는 지극히 일본적인데도 불구하고 판타지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는 일본영화나 드라마로는 표현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 《초콜릿 코스모스》는 다분히 일본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일본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오디션 장면의 극적인 긴장감을 연출하기에는 영화보다는 드라마 쪽이 훨씬 나을 것 같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 장면들이 너무나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책을 읽고 있는데도 눈앞에 연극무대가 펼쳐진 것 같은 괴이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런 느낌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직접 영상을 통해서 천재 배우들의 경합을 볼 수 있다면 더 흥미진진할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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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라는 이름의 작가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출판계의 흥행 보증수표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그녀의 작품을 찾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일본 작가의 대세는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같은 이름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들 작가의 유명세는 건재하지만, 최근 온다 리쿠를 비롯한 오쿠다 히데오, 이사카 코타로, 미야베 미유키 등의 작가들이 일으킨 새바람은 현재 우리나라 출판 산업 자체를 일본문학에 편중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거세다. 이들은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소설을 발표하면 자신들의 추종세력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 이런 사태에 언론들은 일본문학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애국심과 반일감정에만 호소할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책과 음악은 얼마든지 공짜로 구할 수 있는 요즘 세상이지만 직접 자기 돈을 써가며 도서와 음반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 문학, 우리 음악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일이 아니라, 양질의 작품으로 소비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2008/09/22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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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伊坂幸太郎) 지음 ★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6월10일 초판1쇄 발행


2008년 제5회 일본 서점대상

2008년 제21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수상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온 세상이 추격하는 한 남자. 왜 자신이 쫓기는지도 모른 채 온 세상의 추격에서 벗어나려 안간 힘을 쓴다. 이사카 고타로의 2007년 신작 《골든 슬럼버》는 이 남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훤칠한 외모를 제외한다면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는 조용한 남자다. 이 소설은 어느 날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발생한 총리 폭탄 테러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지역 출신인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신임 총리가 자신의 고향에서 마련한 대대적인 환영 카퍼레이드 행사 도중 공중에서 접근한 모형 헬리콥터가 폭탄으로 둔갑하면서 폭살되고 만다. 정치적인 음모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이 총리암살사건은 평범함이 지나쳐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 남자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총리암살용의자로 지목되어 국가 전체의 추격을 받게 된다. 예전 택배기사 시절 우연찮게 곤경에 빠진 여성 인기 아이돌을 구하면서 전국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었던 그가 이번에는 정반대로 온 국민의 악의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골든 슬럼버》는 줄거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소설보다는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활자로 읽는 것보다는 영상으로 보는 편이 훨씬 어울릴 것 같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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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칠드런》, 《중력삐에로》에 이어서 세 번째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은 유난히 영화화되는 경우가 많다. 2006년 《칠드런》이 드라마 『의룡』의 주인공 사카구치 켄지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2007년 제작된 에이타 주연의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개봉중이다. 인터넷을 살펴보니 《중력삐에로》도 현재 카세 료, 오카다 마사키, 코히나타 후미요, 스즈키 쿄카 같은 쟁쟁한 배우들을 내세워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 《골든 슬럼버》 역시 조만간 영화로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 팝 음악계의 전설인 비틀즈의 명반 「Abbey Road」에 수록되어 있는 동명 곡을 모티브로 써내려간 이 소설은 첫 페이지에  이 곡의 전체 가사가 나와 있을 만큼 곡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책을 읽다보면 국가권력에 의해서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자못 진지한 문제의식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출판사에서 대놓고 말하는 것처럼 철저한 오락소설이다. 그 말은 곧 책을 읽는 것을 뭐 대단한 인격수양이나 하는 양 내용이 가볍다느니 흥미위주라니 떠들어대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과시용으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느 잘생긴 한 남자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 책표지도 상당히 유치하게 비춰질 수 있겠다. (근데 사실 요즘 출판사들이 책표지를 너무 화려하게만 만들려고 하는 경향은 있는 것 같다. 몇 개월 전 아사다 지로의 《프리즌 호텔》 여름 편을 샀는데, 절판되어 안타깝게도 구할 수가 없었던 그 여름 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권은 예전 수수한 디자인인데 반해 새로 출간된 여름 편은 마치 만화책처럼 화려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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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최대 무기는, 습관과 신뢰야” 나에게 《골든 슬럼버》의 명대사를 뽑아보라고 한다면 단연 이 대목이다. 대학시절 단짝이었던 친구 모리타가 주인공인 아오야기 마사하루를 향해서 던진 말이다. 후반부에 방송국 PD의 핸드폰에 들어 있는 익살스러운 멘트를 듣고 아오야기는 혼잣말로 인간의 최대 무기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웃음을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나름 멋진 말을 하지만, 그래도 난 습관과 신뢰가 인간의 최대 무기라는 친구 모리타의 얘기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매일 매일을 습관처럼 살아가는 직장인으로써 그래도 누군가를 신뢰하는 가운데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최대 무기라는 말에 백퍼센트 동의하는 바이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해, 사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꼴사나워도 상관없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결코 포기하지 말고 악착같이 살아가야만 한다. 주인공 아오야기의 주변 사람들은 국가 전체의 반역자가 되어 쫓기는 아오야기에게 이런 말들을 전해준다. 소설 중반부 이후에 서서히 드러나는 사실들로 미뤄볼 때 아오야기를 암살범으로 누명 씌울 후보로 지목한 채 진행된 총리암살계획은 오랜 시간 공들인 작품이었다. 이런 가운데 아오야기의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는데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국가권력에 굴복해서 아오야기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일조하게 된 사람들조차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에게 생존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도 아오야기는 이 사람들의 말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으려 애쓴다. 작가 이사카 고타로는 어쩌면 《골든 슬럼버》라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을 전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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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현실에서 나에게 이 책의 주인공 아오야기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 누군가에 의해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설령 그 사실을 밝혔다 하더라도 엄청난 권력을 가진 배후 세력에 의해서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오야기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내 결백을 밝혀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솔직히 그렇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건 국가라는 존재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 같은 한 사람 정도는 쉽사리 매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반대로 국가는 그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는 국민들을 철두철미하게 보호해야할 막중한 의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 안에서 그 국가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재산과 목숨을 지켜야 할 의무가 국가에게는 있는 것이다. 단지 소설 한 권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 소설 속에서 비춰지는 국가의 모습이 만날 경제선진국이니 OECD 가입국이니 떠들어대면서도 외국에 나가서 온갖 고초를 겪는 자기 나라 국민들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겹쳐져서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2008/09/20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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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다 다카시(阿刀田高) 지음 ★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10월20일 초판1쇄 발행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때부터 난 이상하게 추리소설이 좋았다. 남들보다 겁이 없는 편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항상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오싹오싹한 공포를 느끼면서 추리소설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윌리엄 아이리쉬, 가스통 루르 같은 서양 작가의 작품들이 추리소설 코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게 된 추리소설은 어느새 일본 작가의 작품 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토다 다카시의 이 작품 《시소게임》을 추리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 끼워 넣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추리소설을 대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누군가로부터 괴담을 전해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읽게 되는 이 책은 일본 단편문학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아토다 다카시의 펜 끝에서 나온 1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5년 생으로 올 해 일흔 세 살이 되는 이 노작가는 지금까지 꾸준히 단편만을 고집해오고 있어서 일본의 오 헨리라는 별명도 붙여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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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다 다카시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1979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단편집 《나폴레옹광》이라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지 않았던 탓에 지금까지는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2008년 8월에 드디어 이 《나폴레옹광》이 우리나라 출판사를 통해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니 조만간 사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난 《시소게임》 전에 먼저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라는 기괴한 제목의 단편집을 통해서 아토다 다카시라는 작가와 만났었다. 다중인격을 지닌 사람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그리고 있는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라는 작품을 비롯한 여러 편의 단편들이 책을 읽는 내내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 왔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엄청난 인기를 끌다가 최근 다시 부활한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일본에는 이보다 훨씬 꾸준하게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기묘한 이야기』라는 단편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 소설은 딱 그 『기묘한 이야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때론 읽는 이를 무섭도록 섬뜩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고 때론 숨겨진 트릭을 찾기 위해 분주히 두뇌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의 단편들은 한편 한편이 반전의 연속이다. 마지막 한 줄로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막힌 능력을 작가 아토다 다카시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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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시소게임》의 원제를 보게 되면 《過去を運ぶ足》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과거를 운반하는 다리》가 된다. 헌데 이 제목은 《시소게임》 안에 들어있는 15개의 단편 가운데 한 작품의 제목과 동일하다. 무슨 연유인지 확실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충 짐작을 해 보면 《과거를 운반하는 다리》보다는 《시소게임》이라는 제목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더 어필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출판사의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15개의 단편을 살펴보면, 채 10페이지도 되지 않는 <자살균>과 <절벽>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이 30~40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편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출퇴근 시에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작품 하나를 끝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출퇴근 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은 일본에서는 단편이 더욱 각광받는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단편,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단편소설은 30~4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모든 이야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난해한 사건보다는 기묘한 현상이나 인간의 심리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시소게임》 역시 도서관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기호의 참살>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괴이한 사건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악마성이 주요 테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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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악행에 치를 떨면서도 전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내가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떤 식으로 대처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나 할까. 몇 년 동안 거동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로 인해 한없이 암울해져버린 가정(사망진단서), 꿈에 부풀어 입주한 새 아파트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위층 사람의 발걸음 소리(환청이 들리는 아파트), 새로 생긴 젊은 애인으로 인해 안 그래도 싫증이 날 대로 난 아내가 더욱 미워진 상황에서 눈앞에 나타난 아내를 없애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절벽),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과거 내 자신이 저질렀던 완전범죄가 발각될 수도 있는 판도라의 상자의 열쇠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파인 벽), 내 스스로가 이런 상황 앞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나는 과연 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자문해보게 된다. 이런 사실은 곧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들이 인간의 숨겨져 있는 어두운 일면을 얼마나 잘 파헤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아토다 다카시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그가 더없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상황 속에 독자들을 몰아넣고 ‘그래 이런 경우에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가는 순간에도 착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성인군자인 척 위선을 떨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비웃으며 말이다.


2008/09/19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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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미 토미히코(森見登美彦) 지음 ★ 서혜영 옮김/ 작가정신 / 2008년8월30일 초판1쇄 발행


2006년 제20회 야마모토슈고로상 수상

나오키상 후보작

2007년 <다빈치> 올해의 책 1위, 서점대상 2위, 기노쿠니야 베스트텐 2위

 

나의 직장은 서울,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은 부산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가격과 속도 외에는 다운그레이드 된 것투성이인 KTX를 이용하는 경우가 잣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면 항상 기차 안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책 한 권과 동행을 하게 되는데, 이번 추석 여행은 제목부터 요상한 이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함께 했다. 경험상 기차의 반복적인 덜컹거림 속에서 자칫 무거운 내용의 책을 읽다가는 나도 모르게 책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고 머리는 모르는 옆 사람의 어깨 위에서 춤을 추는 민망한 시츄에이션을 연출하기 쉽상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가볍고 유쾌한 내용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그런 빈틈없이 용의주도한 내 생각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놈이 바로 이 녀석이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일견 유치하기 그지없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상야릇한 제목에 이끌려 얼마 전에 구입해 둔 놈이었다.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서른을 목전에 둔 젊은 작가가 쓴 이 책은 순진함이 지나쳐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물정 모르는 대학 1년차 여대생과 그녀를 남몰래 사모하는 존재감 제로의 서클 선배가 펼치는 모험담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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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미 토미히코는 타마키 히로시 주연의 드라마로도 제작됐던 《사슴남자》의 작가인 마키메 마나부와 함께 주로 교토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교토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는데, 역시나 작품 속 배경은 교토다. 교토라면 한번 여행 갔던 적이 있어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본토초나 철학의 길 등의 교토 명물거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이야기는 총 네 편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 편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서 구성되어 있다. 얼굴도 모르는 서클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한 두 사람이 피로연 2차를 빠져나와 교토의 밤거리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만나면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편을 시작으로 비오는 여름 어느 날 열린 헌책 시장으로 책 사냥을 떠난 그녀와 언제나처럼 그녀를 뒤쫓는 다분히 스토커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선배가 헌책 시장의 신과 조우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룬 <심해어들>, 가을 대학축제를 대학 신입생의 호기심 어린 눈길로 쫓아다니는 그녀와 대학축제라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오직 그녀를 얻겠다는 일념으로 참가했다가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는 선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편리주의자 가라사대>, 교토 전체가 지독한 겨울 독감에 시달리는 가운데 감기의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의 병문안에 열을 올리는 그녀와 상사병인지 감기인지 헷갈리는 병에 결려 심하게 앓은 뒤 드디어 그녀와의 첫 번째 데이트 약속을 잡게 된 선배의 성공담을 그린 <나쁜 감기 사랑 감기>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편의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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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판타지의 세계로 종횡무진 부유하는 교토발 초특급 청춘판타지】라는 뒷 표지의 선전 문구가 딱 어울리는 이 책은 현실세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 하다가도 어느새 만화나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봄의 에피소드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서 우연히 밤의 교토 거리에서 만난 괴이한 사람들과 어울려 술판을 전전하며 밤거리를 누비고 다니던 그녀 앞에 나타난 낡은 유카타 차림의 히구치라는 인물은 자유자재로 공중부양을 선보이기도 하고 교토 밤거리의 명물 중의 명물인 이백이 타고 나타나는 3층짜리 전차는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옴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술에 취한 그녀의 눈에 비치는 환상인지 아니면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런 장면을 묘사할 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눈앞에 만화책을 펼쳐놓고 그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런 기발한 상상력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은 이들 두 주인공이 움직이는 공간 안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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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대중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정신없이 진행되는 산만한 이야기 구조라며 싫어할 소지도 다분히 엿보인다. 어떻게 말하면 그만큼 책 속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관이 장난스럽고 기발하다고 할 수도 있다. 헌책 시장이 서는 푹푹 찌는 한여름에 각자 자신이 원하는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이백이 개최하는 시합에 나선 우리의 선배를 포함한 다섯 사람이 두꺼운 빨간 솜옷을 껴입고 뜨거운 화로에 둘러싸여 세상에 온갖 매운맛은 다 섞어놓은 것 같은 불냄비 요리를 먹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으면 저절로 눈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이와 같이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의 연속이 곧 이 책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핵심 내용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좋았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엮어가는 한바탕 축제 같은 엉뚱한 이야기도 좋았고, 자칭 그녀의 뒤통수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의 권위자라는 어수룩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집념의 사나이 선배에게도 마음이 가고, 무엇보다도 심심찮게 두 발 보행 로봇의 스텝을 일삼으며 위기의 순간에는 무턱대고 언니에게 배운 친구펀치를 날리는 천진난만 그 자체인 검은 머리의 그녀가 사랑스럽다. 거기에 괴팍왕, 달마오뚝이공주, 빤스총반장, 코끼리 엉덩이 같은 의미 불명의 캐릭터들도 글을 읽는 내내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읽은 후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거나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을 주는 책은 결단코 아니지만, 무료하고 피곤한 일상 속에서 잠깐 동안의 유쾌한 휴식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인 것 같다.


2008/09/18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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