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토다 다카시(阿刀田高) 지음 ★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10월20일 초판1쇄 발행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때부터 난 이상하게 추리소설이 좋았다. 남들보다 겁이 없는 편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항상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오싹오싹한 공포를 느끼면서 추리소설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윌리엄 아이리쉬, 가스통 루르 같은 서양 작가의 작품들이 추리소설 코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게 된 추리소설은 어느새 일본 작가의 작품 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토다 다카시의 이 작품 《시소게임》을 추리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 끼워 넣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추리소설을 대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누군가로부터 괴담을 전해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읽게 되는 이 책은 일본 단편문학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아토다 다카시의 펜 끝에서 나온 1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5년 생으로 올 해 일흔 세 살이 되는 이 노작가는 지금까지 꾸준히 단편만을 고집해오고 있어서 일본의 오 헨리라는 별명도 붙여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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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다 다카시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1979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단편집 《나폴레옹광》이라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지 않았던 탓에 지금까지는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2008년 8월에 드디어 이 《나폴레옹광》이 우리나라 출판사를 통해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니 조만간 사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난 《시소게임》 전에 먼저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라는 기괴한 제목의 단편집을 통해서 아토다 다카시라는 작가와 만났었다. 다중인격을 지닌 사람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그리고 있는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라는 작품을 비롯한 여러 편의 단편들이 책을 읽는 내내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 왔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엄청난 인기를 끌다가 최근 다시 부활한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일본에는 이보다 훨씬 꾸준하게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기묘한 이야기』라는 단편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 소설은 딱 그 『기묘한 이야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때론 읽는 이를 무섭도록 섬뜩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고 때론 숨겨진 트릭을 찾기 위해 분주히 두뇌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의 단편들은 한편 한편이 반전의 연속이다. 마지막 한 줄로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막힌 능력을 작가 아토다 다카시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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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시소게임》의 원제를 보게 되면 《過去を運ぶ足》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과거를 운반하는 다리》가 된다. 헌데 이 제목은 《시소게임》 안에 들어있는 15개의 단편 가운데 한 작품의 제목과 동일하다. 무슨 연유인지 확실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충 짐작을 해 보면 《과거를 운반하는 다리》보다는 《시소게임》이라는 제목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더 어필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출판사의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15개의 단편을 살펴보면, 채 10페이지도 되지 않는 <자살균>과 <절벽>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이 30~40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편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출퇴근 시에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작품 하나를 끝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출퇴근 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은 일본에서는 단편이 더욱 각광받는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단편,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단편소설은 30~4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모든 이야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난해한 사건보다는 기묘한 현상이나 인간의 심리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시소게임》 역시 도서관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기호의 참살>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괴이한 사건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악마성이 주요 테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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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악행에 치를 떨면서도 전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내가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떤 식으로 대처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나 할까. 몇 년 동안 거동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로 인해 한없이 암울해져버린 가정(사망진단서), 꿈에 부풀어 입주한 새 아파트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위층 사람의 발걸음 소리(환청이 들리는 아파트), 새로 생긴 젊은 애인으로 인해 안 그래도 싫증이 날 대로 난 아내가 더욱 미워진 상황에서 눈앞에 나타난 아내를 없애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절벽),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과거 내 자신이 저질렀던 완전범죄가 발각될 수도 있는 판도라의 상자의 열쇠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파인 벽), 내 스스로가 이런 상황 앞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나는 과연 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자문해보게 된다. 이런 사실은 곧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들이 인간의 숨겨져 있는 어두운 일면을 얼마나 잘 파헤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아토다 다카시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그가 더없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상황 속에 독자들을 몰아넣고 ‘그래 이런 경우에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가는 순간에도 착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성인군자인 척 위선을 떨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비웃으며 말이다.


2008/09/19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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