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시절 고려의 건국과정에서 묘사된 미친 중 궁예를 보며, 나는 역사적 사실과 진실의 간격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서 부각되는 궁예의 실각요인은 늘 그가 미쳤다는 점에 중점이 두어졌을 뿐, 그가 무리한 북벌을 감행하다 호족의 반발을 샀다는 것, 그리고 궁예가 아껴 마지 않았던 왕건이 그 호족의 반발을 잘 규합해 그를 몰아냈다는 것, 그리고 왕건이 (아이러니하게도)다시 국시로 북진을 내세웠다는 것에 대한 연관성에 대해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궁예가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두가지 실정이 있었을진 모르지만, 결국 자신을 몰아낸 다음 집권세력에게 다시 국시로 인정받을만한 정당한 정책의 강력한 추진이 원인이 되어 쫓겨났다면, 그 사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미친 중'이라는 세 글자로 압축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연민이 남았다. 


그리곤 오늘, 그와 비슷한 연민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한때 폴크루그먼이라는 세계적인 경제학자에게 기술혁신을 위한 노력은 거의 없이 노동과 자본만 퍼부어 성장했다는, 별 내용없는 성장이었다는 평가가 우리의 경제발전에 대한 주된 내용인 요즈음,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더 우리의 성장사에 대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성장을 이루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한국의 경제발전이 단순히 노동과 자본만 퍼부으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성장이라는, 인정하기 싫은 평가를 내리는 게 대세인 오늘날의 세계 경제학계의 흐름에, 이 책은 그보단 좀 더 진실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평가절하한 성장방식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모습이었다는 것 까지도. 


더불어 이 책은 성장을 위한 방법을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가 숙고해야할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 주었다. 성장의 결과를 원인으로 생각하는 오류, 그 나라의 수준에 맞지 않는 제도의 가혹한 관철, 그리고 그것이 (비록 그 제도가 바람직 함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그 투자할 재원없는 빈곤한 나라에서 더 우선 순위를 두고 투자해야할 부분(이를테면 교육)의 재원에 대한 박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전에 그 같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차피 산업 단위로 비교우위가 이루어지는 현재의 세계에서 개도국이란 아이에게 '바람직한' 비교 우위의 산업에 치중하라고 하는 것은 흡사 당장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그 아이가 만들 수 있는, 혹은 획득할 수 있는 간단한 제품을 날품 팔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 아인 당장의 생계를 위해 날품을 팔아야 한다. 그 아인 현 시점에선 당장 아무리 노력해도 삼성같은 휴대폰을 만들어 팔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아인 평생  날품팔이를 해야한다. 그 아인 매 시점에서 결코 삼성같은 휴대폰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지하철 역에서 하루종일 날품을 팔아 벌어들인 몇푼의 돈을 몇 달 간 모으면 어쩌면 삼성 휴대폰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세상은 가르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지금의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아인 꿈도 꿔선 안되는 걸까? 현 시점에서 삼성 같은 휴대폰을 만들 수 없다고 매 시점에서 스스로를 한계지워버리는 것도 옳은걸까? 어쩌면 미래 전체까지도 말이다.


그렇지 않다. 꿈꾸는 이가 모두 꿈을 이룰 순 없지만, 꿈을 꾸어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아이도 언젠간 성장을 하면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그 보다 더 멋진 휴대폰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될 수 있을꺼라고 그 아이는 꿈을 꾸어야 한다. 비록 어른들이 아이가 경험도 지식도 미숙한 걸 이용해 꿈꾸는 아이에 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온갖 부정적인 얘기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아이는 꿈을 포기해선 안된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날품을 팔아 힘겹게 벌어봤자 몇푼 안될지 모르지만, 그걸로 주린 배를 채우기에 앞서 학교에 등록해야 한다. 날품 팔아 돈이 부족하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배우고 익히면 어쩌면, 지금의 아이들은 할 수 없다고 으스대는 어른들이 만드는 휴대폰 같은 멋진 것들을 그 아이도 언젠가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서 말이다.  실은 지금의 어른들도 그렇게 어른이 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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