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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20년넘게 김정희를 연구한 고문헌연구가 박철상씨가 지은책
김정희라는 한 인물과 그림만을 단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그 당대의 역사와 학문, 예술과 그
의 인생을 통틀어 광범위한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다.
머리말
1. 역관 이상적, 운명을 만나다
2. 끝없는 고난, 유배객이 되다
3. <세한도>의 탄생
4. <세한도>, 그 황량함의 정체
5. <세한도> 감상하기
6. <세한도>를 그린 사연
7. 오디세이 <세한도>
8. <세한도>이야기를 마치며
추사 김정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세한도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도 유배시절, 이상적에게 보내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낸 그림이다.
우선 이상적.....
그는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 연행을 갈때 같이 참여했던 역관이다.
추사는 억울하게 제주도에 유배됐을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연락을 끊어진다.
그러나 이상적만은 달랐다. 그는 추사가 잘나가던 때나 제주도에 유배돼 있을 때나 한결같았다. 연행을 갈때마다 청나라의 최신 정보를 전해 주었으며, 귀한 책들을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한번은 이상적이 청나라에서 어렵게 구해 온 <황조경세문편>을 보냈다.
추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공자가 말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는다.
'날씨가 추어진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는 공자의 말씀을 추사는 현실 속에서 체험한 것이다.
소동파의 <언송도>에 비길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붓을 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그리고 30여년 동안 연구한 모든 학문을 세한도에 쏟아붓는다.
그렇게 해서 학예일치의 경지인 세한도가 만들어졌다.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본문에서
신의를 지킨다는 것,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일인가!
고맙네 우선!
이 글귀를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기어이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귀향살이였을까?
인적도 없고
책과함께 살던 사람이 시,서가 단절된 삶을 살았으니 얼마나 외롭고 고통의 시간이였을까?
몸의 추위보다 마음의 추위가 더 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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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참고하셔요~
<추사 김정희의 발자취>
1786년 6월초 : 예산에서 이조 판서 김노경의 큰아들로 태어나다.
1793년 7세때 : 집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쓰다.
이 글씨를 보고 지나가던 영의정이 집에 들러 감탄을 표하다
1800년 14세때 : 북학의 대학자 박제가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우다.
1081년 15세때 : 사촌 형 교희의 부인인 한산 이씨의 사촌 형제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다.
1806년 20세때 : 부인 한씨가 죽다. 그후 3년이 지나서 예안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다.
1810년 24세때 : 생원 시험에 합격하다.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 부사로 임명되어 연경으로
가자, 자제군관으로 아버지를 따라가다. 연경에서 옹방강, 완원 등
대학자를 만나 사제지의를 굳게 맺다.
1816년 30세때 : 새로운 고증학적인 경학관을 담은 '실사 구시설'을 짓다.
이 글은 옹방강과 완원의 이론을 참고하여 나름의 학문적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1817년 31세때 : 북한산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확정하고, 이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함
1826년 40세때 : 충청 암행어사가 되다. 아버지 김노경이 예조 판서가 되다.
1827년 41세때 : 의정부 검상을 거쳐, 예조 참의에 오르다.
1830년 44세때 : 아버지가 탄핵을 받아 고금도로 귀양을 가다
1835년 49세때 : 초의 선사와 편지로 사귀기 시작하다.
1837년 51세때 : 50세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을 거쳐, 이 때에 형조 참판이 되다.
1840년 54세때 : 중상과 모략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다.
9월 2일, 서울을 떠나서, 9월 27일에 제주로가는 배를 타다.
배를 탄 지 하루만에 제주의 화북진에 도착하다.
1845년 59세때 : 헌종이 원하여 편액을 써서 보내다.
1848년 62세때 : 귀양에서 풀려 나오다.
1851년 65세때 :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귀양을 가다.
1852년 66세때 : 귀양에서 풀려 나오다.
1856년 70세때 : 10월 10일, 과천에서 숨을 거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