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츠의 심부름 책이 좋아 1단계 9
요시타케 신스케 그림, 히코 다나카 글, 고향옥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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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시선으로 삶을 정의한다. 그 기발하고 재치 있는 생각이 궁금하지만 아직 미숙한 언어능력을 갖춘 아이들은 명쾌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다른 서로의 시선을 공유해나가기 위해 아이와 함께 동화를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츠의 심부름도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 큰 아이가 심부름을 시켜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 7살 후반 즈음. 자고 일어났는데 나이만 8살이 되어버린 아이에게 책을 읽기 전, 심부름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너는 왜 심부름이 하고 싶어?”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아이의 대답은 엄마, 아빠를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제법 기특한 대답이지만 굳이 시킬 일도 없는데 심부름 하고 싶다고 생떼를 부리던 것이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닐 것 같아 재차 물어본다. “정말 그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는 거야?” 그제야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엄마, 아빠가 없어도 마트에 갈 수 있으니까요.” 아하, 아이에게 심부름이란 단지 부모님을 돕는 것 이상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구나.

  ‘레츠의 심부름표지에서 주인공 레츠는 어깨에 한 짐 가득 맨 것도 모자라 양 손 가득히 물건보따리를 들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독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표지를 통해 우리는 일곱 살 아이의 심리를 알 수 있다. 무엇인가를 해보기도 전에 나는 할 수 있다. 완벽히 해낼 것이다.’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가 쉽게 잃게 되는 귀한 자산이다. 자신감은 삶의 원동력이다. ‘나는 할 수 없어. 못할 거야.’라는 생각은 아이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한다. ‘독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앞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레츠는 엄마 아빠와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텔레비전에서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심부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생들에게 자극받아서였을까? 다음 날, 레츠도 스스로심부름을 하기로 결심한다. 일곱 살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심부름쯤은 할 수 있는 거란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 아닌가.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심부름 시켜주세요.’라고 떼를 부리며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는데 레츠는 한발 더 나아가 심부름 정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라니. 아마도 심부름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일곱 살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레츠는 마치 소풍을 가듯 심부름을 떠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곱 살의 얼굴도 지어본다. 아파트를 나가려면 만나야하는 경비아저씨로 추측되는 야스 씨를 찾지만 야스 씨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흐뭇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시는 야스 씨지만 레츠는 기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집 밖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답답했던 레츠의 심정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은 지정된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오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여름의 더운 바람이 코를 간질이기 시작할 때, 아이는 비밀번호를 궁금해 했고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은 1층이었고 한 층 정도야 무슨 일이 있겠냐 싶어 아이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혼자서 계단으로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게 했다. 아이의 첫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이는 독립한 자신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야스 씨가 열어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유리문 앞에 선 레츠의 밝은 표정이 큰 아이의 첫 독립의 기쁨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모험의 문을 나선 레츠는 무임승차로 지하철을 타고 다섯 개의 손가락을 꼽아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가보았던 쇼핑몰로 향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레츠는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일인극을 하기 시작한다. 레츠는 여유롭게 시식도 하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면서 어른들이 묻는 엄마의 부재 유무에 영특하게 대처해 나간다. 부모님의 부재를 인정하는 순간 벌어질 상황을 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신나는 모험은 시시하게 끝이나버리고 어른들은 호들갑스럽게 레츠를 대할 것이리라. 그 와중에 엄마만 물어보고 아빠는 물어보지 않는 어른들의 말을 통해 아빠는 필요 없는 것인가 고민해보기도 하고 새로운 인간관계의 기쁨과 담백한 헤어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신나는 모험 끝에는 여전히 심부름이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돈은 있지만 부모님이 가져가셨고, 도서상품권은 있지만 책밖에 살 수는 없는, ‘돈은 있지만 돈이 없는그런 상황 말이다. 하지만 레츠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행동한 끝에 돈을 내지 않아도 가져갈 수 있는 리플렛을 가져가는 것으로 심부름을 성공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의 부재를 외부로 알린다. 그렇게 레츠는 심부름꾼에서 미아로 변하게 된다.

  미아가 된 레츠는 어른이 주는 음료와 쿠키를 먹으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하게 부모님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또 미아가 되야지.’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미아가 되면 놀라고 당황하여 울고 부모님만 찾기 마련인데 레츠는 그러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이런 결말을 상상했을 것이리라.

  레츠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찾아왔지만 자신을 숨이 막히게 꼭 안아주는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심부름 모험을 마쳤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훈육하는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분을 풀어준다. 또한, 아빠에게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지 않는 걸로 봐서 아빠는 필요가 없는 모양이라고 놀리기도 한다. 이런 귀여운 아이를 누가 혼낼 수 있으랴.

  누군가 책은 읽는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얼굴을 보여준다고 했던가. 아이의 모험 같은 심부름이 담긴 동화 속에서 서평을 통해 또 다른 감정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매일이 전쟁 같은 육아 속에서 내가 힘들어 아이를 힘으로 혹은 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강압적으로 통제하려고만 했던 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나 하고 말이다. 부쩍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고! 왜 엄마 마음대로만 하려는 거야!’라는 아이의 말과 레츠의 심부름을 통해 아이에게 했던 나의 말과 행동들이 부끄러워진다. ‘독립을 억압하려고만 했던 어른인 척하던 내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었다.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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