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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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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에 난 의문의 신경 발작으로 응급실에 갔다. 팔에 주사를 꽂고 약물을 주입했는데 부작용으로 혈압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기계가 삑삑 거리는 소리를 냈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왔다. 구급차에 날 태우면서 아빠와 간호사들이 어떻게든 날 깨우려고 소리를 쳤다. 일어나! 눈 떠! 안 뜨면 죽어! 이 장면이 기억나는 건, 내가 눈을 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했고, 잠이 왔고, 죽고 싶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기회가 오니 다시 삶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아! 왜 살아야 하지?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을 거야…

나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았다. 구급차의 빠른 속도와 현대의학의 힘이다. 눈을 떴을 때 병실을 보고 느꼈던 실망감. 그것이 죽음에 대한 내 씁쓸한 아쉬움이었는데 책 <자유죽음>을 읽으니 문턱에서 고뇌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자 장 아메리는 191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강제 수용소에 수 년간 갇혀 있었다. 그는 <자유죽음>을 출간한 지 2년 뒤에 수면제를 먹고 65살의 나이에 자살한다. 


그렇다면 장 아메리의 유작인 <자유죽음>은 어떤 내용일까. ‘심리학과 사회학, ‘자살학’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이 책은 분류나 해석 이전에 자살 상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에서 흔들리는 사람에게 자살을 선택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자살자는 치료가 필요한 가여운 사람인가, 아니면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 죽음은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될 금기라는 인식 속에서 자살자는 오랫동안 소외된 채 분석의 대상으로만 해부되었을 뿐이다. 


“자살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현상학의 안목에서 보자면 자살자들은 일종의 “무시당한 집단”이다.” -162p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자살을 용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살자에 대해 쉬쉬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침묵한다.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건 죄가 되는 것일까? 왜 제 손으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인간에게는 없단 말인가? 장 아메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삶이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 자살자의 내면으로 뛰어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기이하기만 한 그 세상에서 이들이 한 선택의 존엄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게 무언지 묻는 일이고, 결국 삶이 무엇인지 우리 산 자들에게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장 아메리는 손전등 하나 들고 동굴을 탐험하는 사람처럼 독자들을 이끌고 자유죽음의 불가해함을 파헤친다.


“자유죽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에세크(échec)’라는 것을 경험한다. (...)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상인은 ‘에세크’를 당했다. 바꿔 말하면, 죽음이 상인을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버렸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게 아니다. (...) 남자는 ‘에세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이라고 생각했다.” -90p


여기서 말하는 ‘에세크’란 무엇인가. 에세크는 프랑스어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다.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말. 총체적인 실패를 뜻하는 운명적인 단어다. 삶에서 에세크를 당한다. 문득 자신이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외통수에 당했다는 걸 깨닫는다! 각자가 어떤 상황에서 에세크를 맞는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에세크를 당한 사람은 삶이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외통수를 당한 자신에게 자유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커다란 문처럼 놓여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죽음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사람은 에세크 속에서도 살기를 결심할 수 있다. 패배가 뻔한 게임을 그저 질질 끄는 것처럼. 외통수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선택으로 ‘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외통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유죽음밖에 없으므로. 

장 아메리는 묻는다. 외부인으로서, 사람들이 에세크를 당한 자에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살아라! 어째서? 인간이 선택자이자 존엄한 개인으로서 에세크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그 선택지는 자유죽음뿐이다. 체크메이트 상태에 놓인 킹을 스스로 눕히는 것만이 게임을 끝낼 수 있다. 


존엄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죽음은 완전한 없음이다. 죽는다는 건 나를 ‘없음’의 상태로 던져버리겠다는 것이다. 죽음은 소멸일 뿐 거기엔 존엄도 선택도 없다. 그렇다면 자유죽음은 대체 무엇인가! 모순이 반복된다. 장 아메리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앞으로 세 발짝 갔다가 뒤로 두 발짝 후퇴하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궤적을 밟고 있다. 다만 그가 마지막까지 붙든 손전등의 빛은 인간은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야 하며 죽음은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건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존엄하다. 하지만 에세크가 들이닥쳐 그를 옭아맬 때, 무엇으로 그와 싸우겠는가. 존엄한 개인으로서 그 부자유가 그저 운명이라며 순종할 수는 없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살지는 않겠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자유죽음이 그 대답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맞서 그에 응전하는 일종의 대답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 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118p


장 아메리는 자살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삶은 늘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이라는 후광을 벗겨내고 삶과 죽음을 똑같은 저울에 올려놓는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무거운 짐이자 허위, 구토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부조리라는 게 밝혀지고 죽음은 무의미하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유일한 선택지로 여겨진다. 묘한 일이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낫지 않다면(의미가 무의미보다 낫지 않다면) 동전의 앞면이 뒷면으로 넘어가는 차이일 뿐이라면 죽음은 소멸일 뿐 두려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건 선택이고, 개인이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존재로서 내릴 수 있는 존엄한 결정이 아닌가?


장 아메리는 이 모든 의문이 자살자의 변명처럼,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는 자유죽음에 대해 ‘증언할 뿐, 설득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장 아메리가 깊게 영향받은 사르트르는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다.” 라는 말을 남겼다. 장 아메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실패를 견딜 수 없는 자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로서의 선택이 무엇인가까지 나아간 것이다. 


자유 죽음의 언어가 우리 안에서 부유할 때, 이상하게도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에세크는 언제 밀려들지 모르고 누군가는 떠난다. 자살자는 학문의 일부도, 사회의 일부도, 타인의 일부도 아니다. 그는 그 자신에게 속한 유일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소멸해버렸다. 우리는 거기에 박수를 쳐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외면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생이란 짐을 아직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산 자의 몫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가. 

자살자는 타인에게 속하지 않지만, 나는 살아있고 아직 타인에게 속한 존재다. 타인 없이는 나의 존재도 없고, 사랑도 없고, 에세크를 무시하고 짐스런 인생을 이어갈 힘을 얻을 방도도 없다. 나는 타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외통수에 당하지 않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타인이 에세크로 떠나면 그게 나의 에세크가 되고,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바로 쓰러져버릴 무수히 많은 킹들이고, 체스판은 자비가 없고…그래서 이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상은 반짝거리면서 이어져 왔단 말인가. 


1976년 출간된 이 책을 오십여 년 뒤에 읽은 나는 한 문단에서 이것이 지난 세기의 책이라는 걸 실감했다.

“동물은 분명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임이 밝혀졌다. (...)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없다. (...)” -93p


책이 출간된 이후로 동물의 개체수는 무자비하게 늘어났고, 끔찍한 에세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동물들의 개체수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들 모두가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스스로 죽음을 추구하는 행동은 동물에게도 심심찮게 관찰된다. 더해, 찾아본 바 국내 최연소 아동 자살의 나이는 6세였다. 그 사이 기후 위기라는 새로운 에세크가 등장했고 우리 위를 뿌옇게 덮고 있다. 스스로를 위해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게 어찌 일정 연령을 달성한 인간만의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유죽음이 존재하는 건 인간이 너무나 지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산물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생명의 근원에 존엄한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것이 우리만의 특별성이며 다른 생명 안에는 없을 것이라 가정할 이유가 있을까? 장 아메리가 완전한 소멸 속으로 떠난 지금, 그 의문에 답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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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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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권이 있나요?"


나는 묻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다. 이 문장을 말하는 화자 '나'가 할머니에게 묻는 것이다. 그는 할머니와, 할머니와 친한 노인과 함께 조상의 묘지에 왔다. 자신의 성인 스타시니치가 쓰인 인 묘석이 가득하다. 그는 이 장소가 낯설다. 이 곳의 우물물을 마셔야 하는 의례의 순간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이걸 거절할 수 있는지. 핏줄로 이어지는 역사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는 "유머를 잃지 않고 조금이라도 익살스럽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 할머니가 속삭였다. "배은망덕하게 굴지 말아라."

 p 45


-


 책은 창 밖의 어린 소녀를 보는 할머니로 시작한다. 2018년 3월,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있다. 그런 할머니를 보는 화자 '나'는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지만 보스니아 전쟁을 피해 독일로 온 난민이다. 10년 전 '나'는 독일 이민국에 자필 이력서를 써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출신과, 그간 내력에 대해 설명해야 할 입장에 놓인다.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독일 출신이 아니면서도 왜 독일에 머무르고 싶어하는지, 작가가 채워야 할 빈 종이를 바라 보는 순간은 <출신>이라는 내밀한 이야기가 시작하는 장면이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등장인물은 증조모님, 증조부님에서 아랄 주유소의 친구들까지 다양하다. 등장하는 장소들도 비셰그라드, 오스코류사, 하이델베르크, 크로아티아 등 많은 곳을 오간다. 하지만 중심은 크리스티나 할머니와 '나'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위로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은 마지막에 '용의 보물'이라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2018년 11월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책은 끝나지만 그 과정에 가기까지 작가가 고백하는 이야기는 아름답고 인상깊다.


 책은 짧은 이야기, 두 서넛 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를 중첩해 <출신>이라는 하나의 긴 서사를 만드는 구성이다. 호흡이 짧게 짧게 끊겨 띄엄띄엄 읽기도 좋지만, 지역 이름이 낯설어 집중이 필요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날잡고 하루종일 이 책만 읽어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기분은 설명할 수 없는 감화, 감명이었다. 처음에는 과거, 미래를 왔다갔다 하는 서술, 복잡한 명칭과 이름들, 그 이름에 얽힌 사연이 얽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내가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에 대해 얼마나 익숙하지 않았는지를 반증하는 것뿐이다. 중반부로 가면서 명칭이 눈에 익고 이야기의 흐름이 느껴지면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치매에 걸린 크리스티나 할머니와 '나' 사이의 대화를 읽고 있으면 이들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을 품지만, 책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너는 기묘하고 음울한 시간의 동굴에 이다. 길 하나는 아래쪽으로 나 있고, 다른 하나는 위쪽으로 이어져 있다. 네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너를 과거로, 위로 올라가는 길은 미래로 이끌 것이다. 자, 어떤 길을 가기로 결정할 것인가?" p 50


 작가는 아래로 내려가기를 택한다. 아버지, 어머니의 증조모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는 과거를 더듬어간다. 그가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가 기억하는 건 완벽하지 않고, 아주 적기 때문에 그는 목격의 부재를 상상으로 채운다. 작가의 서술은 창 밖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집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탐색적이다. 


"(나는) "다음에 또 오스코류사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 그때 할머니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되살아나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번엔 할머니가 "어떤 한 남자와" 왈츠를 추고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페로"라거나 "네 할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남자가 할머니의 발을 밟는다.

 나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 

p 115.


 증조모부의 역사로 시작한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맞춰 어머니, 아버지로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이란 단어는 덜 등장하지만, 대신 사회주의, 민족, 증오심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보스니아 내전의 서막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보스니아 내전의 유고슬라비아에서일어난 내전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을 읽으며 찾아보니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로,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공화국이 참전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유고 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민족 청소, 학살 등 잔혹한 전쟁 범죄가 일어났다. 10-11만 명이 사망하고 220만명이 난민이 되는 등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한 전쟁이다.

 책 속에서는 보스니아 전쟁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4살의 '나'가 부모님과 함께 유고 슬라비아를 떠났다는 것, 내전이 끝난 뒤 돌아간 '고향'에는 전쟁의 폭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들만이 보스니아 내전의 잔인함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작가는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족만 전쟁에서 벗어나 그 지옥을 겪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국가의 사람들이 겪은 일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고, 이들의 분노, 고통에 한 몸으로 엮어 있는 일체감을 느낄 수 없다. 유고 슬라비아에서 나고, 십 사년 간 자랐음에도, 이 곳은 이제 낯설다. 그에게 민족은 잔혹한 단어가 되었고, 크리스티나 할머니 같은 가족들만이 그에게 희미한 혈통이라는 무형의 존재를 언급한다.


 "1996년, 전쟁이 끝나고 내가 처음으로 비셰그라드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로 꽉 찬 그 도시는 실업자가 넘쳐나는 절망적이고 공격적인 세상이었다. 나는  옛 고향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새로운 곳에 처음 온 듯한 느낌이었다. (...) 나는 비셰그라드에 있는 내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내가 밤중에 하이델베르크 야외 수영장에서 카누를 타고 있는 동안 이곳에서 전쟁을 버텨낸 옛 학교 친구들을 만났을 때, 독일 마르크를 교환했을 때, 라힘이 이 도시에 대해 뭔가 알고 싶어 했지만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때. 학교 친구들 중 거의 모두가 잘 지내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들과 달리 난 잘 지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 351.


 독일에 도착한 '나'가 느낀 감정은 슬픔, 비참함, 기구함 같은게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시작, 출발점을 얻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 삶은 난민의 삶이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벗어난 삶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쌓았던 학력과 경력을 버리고 말이 안 통하는 독일에서 밑바닥 노동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를 자식에게 풀거나 하진 않는다. 대신 묵묵히 생계를 유지한다. 망가진 등, 허벅지의 흉터 등 인생은 부모님의 몸에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그런 증거를 바라보며 과거를 유심히 되짚어 본다. 국제 학교에 다니고, 여자친구를 만들고, 아랄 주유소에서 친구들과 모여 먼 산을 구경하는 동안 부모님이 겪었을 좌절감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당시의 '나'는 아직 어리고 성장하느라 바쁘다. 그는 아랄 주유소의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외국인의 비중이 높은 국제 학교에 다녔고, 밴드부로 졸업 공연을 마치기도 한다. 

 독일로 모여든 각양각국의 사람들은 타지에서의 생활이 편하기만 했을까?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자, 민족 우월주의자 등은 전철, 길거리에 만연하고, 난민들을 배척하는 시선이 항상 이들을 노려본다.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런 차별을 알고 있지만, 어린 난민인 이들이 독일에 갖는 감정은 더 미묘하다.


 "이야기의 주제로 독일, 현재, 성취감, 모욕감, 굴욕감이 다루어졌다. 여기서 그리는 것은, 언짢고 불만스러운 일과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황당하게 느꼈던 일뿐 아니라, 왠지 좀 더 참고 견뎌낼 만한 일이 뭐였느냐이다. 왜 난 이런 일들을 겪은 적이 별로 없었는지 모르겠다. 순례자들이 여권에 도장을 받듯이, 우리는 차별 대우를 받은 경험을 수집했다. 우리가 가는 길 끝에는 몹시 화가 나있고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 내는, 토르의 망치를 가진 인종차별주의자가 서 있는 게 아니라, 마리아상과 좋아하는 독일 암벽이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들만 있었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잡은 자리들 말이다." 

p 292.


 부모님은 후에 추방되지만, '나'는 다행히 학생으로서 계속 독일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는 글을 쓰고, 작가로 살아간다.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다. 고향을 피해 달아난 경험, 독일에서 그가 겪은 '이방인'이란 적대 혹은 소외감들은 출신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가 될 수 없는지 느끼게 했다.


 "누군가 내 출신을 물으면 나는 때론 '비셰그라드', 때론 '유럽' 때론 '쿠르팔츠'라고 대답했다. 쿠르팔츠가 가장 호응이 좋았다. 외국에서 '쿠르팔츠'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그것이 도시인지 혹은 말을 잘못했는지 거의 몰랐다.

 나는 부모님을 인문학자라 하고, 사냥꾼인 할아버지를 그단스크에서 이주한 이주민이라 했다. 또 어머니가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그뿐인가. 묻지도 않는데, 출신은 우연에 의해 정해질 뿐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p 244


 이런 행동이 작가가 고향을 부끄러워 한다거나, 엄연한 진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건 아니다. 그는 디아스포라다.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 그에게 고향은 어떤 기억의 순간이지, 영토를 말하지 않는다. 시작은 전쟁으로 인한 난민이었지만, '나'가 고향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만큼 그는 디아스포라로 거듭난다. 고향은 잔인하고, 타국은 냉담하다. 고통과 별개로 어떤 소외감, '이방인'이라는 감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나'가 출신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내밀하고 모순된 감정이 얽혀있기 때문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비셰그라드는 항상 그의 안에 남아 있다. 


"지금은 왜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살고 있지 않는지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줄곧 그런 설명을 해오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하는 변명에 가깝다. 비셰그라드. 이 도시의 역사 때문에, 역사와 더불어 갚아야 하는 죄책감 속에서 찾아든 유년 시절의 행운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 도시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않을 때조차 내 이야기가 이 도시를 염두에 둔 듯한 생각이 든다."

p 264.


 작가는 담담하게 자신의 기억 회상하지만 그 아래에는 손쓸 수 없는 역사의 상황에 휩쓸린 상흔이 존재한다. 파이프 공사 일에 노동하며 망가진 아버지의 등, 세탁일을 하는 어머니, 주워온 가구들로 꾸린 집. 아버지 어머니는 힘들게 일하고 아들을 사랑하지만, 사춘기의 '나'는 어쩐지 이런 집과 부모님을 감추고 싶다. 그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아주 자랑스럽지는 않다. 난민이라는, 타 민족 사람이라는 출신은 자랑스러움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타국에서 (환대받던 차별받던)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이질성의 감각. 학교 졸업실날 밴드 공연을 연주하는 '나'를 보러 온 부모님은 멋지게 연주하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처음으로 나를 지켜볼 수 있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집에 있는 나를, 유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서, 어쩌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내 자신감에, 또 그것을 해내고 그 대가로 박수갈채를 받고 있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니면 당연한 일이라곤 별로 없는 우리의 삶에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슬퍼서 그냥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p 287


 그렇다고 '나'의 청소년기가 고독감과 단절감으로만 이뤄진 건 아니다. 그에게는 아랄 주유소와 그 곳에 항상 모이는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가 난민인 건 아니었지만 뿌리깊은 독일 태생의 사람도 없었다. 이민자의 자식들, 이동의 경험이 있고, 독일에서 같은 이질성을 경험하고 있는 이 친구들은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낸다. 먼 산을 보거나, 밤늦게 기차역에 모여 술이나 야한 잡지를 펼쳐 보면서. 작가는 이 소속감을 사랑하고, 설명이 필요없는 친밀함으로 함께 있는 순간에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나의 반항은 일종의 적응이었다.' 독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걸었던 기대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그 방식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 뿐 아니라 민족적 정ㅊ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 그런 소속감과 함께 우리의 가장 작은 공통분모는 '충분하다'였다."

p. 295


 그의 고향이 민족적 정체성으로 인해 참혹한 전쟁을 겪은 곳이기 때문일까, 민족, 출신 등의 특징에 작가는 회의적이다. '출신은 우연일 뿐', 만약 그가 고향을 말해야 한다면 그의 이빨을 치료해준 치과의사를 말하고 싶다고 한다. 그와 할아버지와 치과 의사, 셋이서 했던 낚시가 그에겐 고향이라고. 그에게 고향은 평화로운 분위기, 다정하고 친절한 대화, 그와 그의 가족이 '이질감'없이 어울리는 순간의 소속감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야 했던 '나'가 갈망하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고슬라비아의 가족, 친척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가 말하길 '이기적인 한 사람일 뿐인 나는 가족과 가족의 단결보다 나 자신을 더 돌보았다'


 이런 작가가 과거에, 자신의 증조모부의 역사에, 오래된 용의 전설에 대해 상상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건 크리스티나 할머니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그녀는 많은 걸 잊고, 과거의 사람들을 보며 죽은 남편을 계속 찾는다. "페로?" 페로는 언제 돌아올까? 동시에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나'에게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노쇠한 그녀는 '나'에게 핏줄로 이어진 역사를 상기시키고, 그가 무언가를 전달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할머니가 자신에게서 과거의 사람들을 본다는 게 '나'는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웠다.내게서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가브릴로 노인은 자진해서 친척과 소속감이라는 짐을 짊어지려는 자신들의 마음을, 특히나 조상들의 모든 업적과 유산을 자랑스러워 하는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들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든 그러지 않든 상관 않고 말이다. 그중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가진 '공동 자산'을 우연히 보게 된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너무 늦지 않게 가족사에 엮여 들었을 뿐이다."

p 390


 이해할 수 없음에도, 작가는 할머니의 기대를 단호히 거절하지 않는다. 이 책은 출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밀한 회고지만 동시에 병든 할머니와,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손자의 이야기로 읽혔다. 할머니가 얼마나 기대하던 '나'는 오스코류샤의 묘지에서 단결감, 소속감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가 부계 혈통을 잇는 아들로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너무 멀리 왔으니까. 그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다른 세계가 있고 미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출신> 이야기 속에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질문하고, 돌보고, 그녀를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용이 나오는 곳을 향해 함께 가는 모험 이야기를. 롤플레이 게임같이 선택지가 다양한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선택할 수 있다. 손자로서 할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남편을 찾는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줄까? 아니면 그녀를 데리고 멀리 도망칠까? 용을 만나게 할까? 시시각각 죽어가는 할머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안겨줘야 할까 하는 고민이 '용의 보물'이라는 다층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창조해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용을 타고 날아가도록 하는 일, 남편을 되돌려 받는 일. 요양소가 아닌, 용과 산과 동굴이 있는 세계가 할머니의 목적지였다는 일, 작가로서 자신이 그 목적지까지 그녀를 인도하는 일을 상상한다는 건 상실에 대처하는 얼마나 훌륭한 방법인가. 비록 그녀의 관은 살짝 비뚤게 땅에 묻혔더라도.


 "훌륭한 이야기라는 건, 예전 우리 드리나강 같은 걸 두고 하는 말이지. 거칠고 폭이 넓은 강,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드리나강도 많은 이야기도 하나가 될 수 없고, 드리나강에도 많은 이야기에도 후퇴란 것이 있을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당신을 바라본다. 

"내가 바라는 건 결국 우리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다."

p 448


 나는 작가가 끊임없이 느끼는 이질감, 단절감,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읽으며 더없이 공감했다. 서양권 국가에 오래 있었을 때 겪었던 인종 차별과 외로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느껴지는 시선과 조롱 혹은 호기심의 태도, 내가 한 개인이 아니고 국가, 민족의 일부분으로 취급받는 일에 짜증나도 억울했으면서도, 동시에 한국과는 다른 사회적 분위기, 제도 등을 보며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 양면적인 감정, 설명할 수 없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 감정을 작가가 이렇게 정확하게 묘사하는 걸 보며 문학의 힘을 감탄스럽게 느꼈다. 나는 난민이 아니지만, 태어난 곳에서 이주해 타국에서 살아가거나, 그런 경험이 있는 디아스포라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뿌리없음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다. '나'의 뿌리는 없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전쟁과 폭력이 그의 고향을 두렵고, 증오스럽게 만든다. 난민 문학이라 해서 전쟁에 대한 세밀한 묘사,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증언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내게 <출신>의 담담한 서술은 놀랍고 매력적이었다. 이 책은 전쟁의 고통보다는 전쟁이 만든 상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과 그 이후에 겪은 삶에 대해서. 

 작가인 '나'는 출신이라는 관념에 회의적이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가 조상들에게서 받은 게 무엇인지 말한다. 그건 단결감, 소속감, 핏줄이라는 일체성이 아니라 이야기다. 오래된 우물에 고인 이야기. 이해할 수 없지만 묘지는 거기에 있다. 그 곳에서 그가 우물물을 맛보기를 기다린다. 핏줄은 그가 같은 피를 나눈 이들의 이야기를 '마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길고 환상적인,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와 가브릴로 노인 -거기에 이제 스레토예 노인도 가세해서-추모도 할 겸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우물 맛은 언어로 만들어져 언어로 표현되었다. 그 언어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간다. 그리고 한 사람은 살아남아 자신이 살아온 이해하기 힘든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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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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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을 울리는 서문이다. 한때 <작은 것들의 신>으로 독자에게 카스트 제도의 모순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던 아룬다티 로이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에 읽고 나면 상흔처럼 마음에 깊이 남을 때가 있다. 내게는 <작은 것들의 신>이 그랬고, 아룬다티 로이의 (평론을 포함한) 모든 문장이 그랬다. 그런 그가 20년만에 발표한 <지복의 성자>는 어떤 이야기일까. 서문의 문장이 이 책 역시 쉽게 읽히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소설은 무덤에서 지내는 늙은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 이름은 '안줌'이다. 남성기와 여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당혹스럽게 한다. 안줌은 분명 존재하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 당연히 이 질문은 그녀에게 단어의 조합이나 하나의 명쾌한 문장으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소리 없는 배아의 울부짖음으로 전해졌다.'


어머니는 아이를 성자 사르미드에게 데려가 속삭인다.


'이 아이는 제 아들 아프타브입니다. 제 아들을 당신께 데려왔습니다. 이 아이를 보살펴주소서.그리고 제게 이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하즈라트 사르미드는 그렇게 해주었다. 사르미드의 손길은 안줌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인도의 거센 물결을 자신의 '설명할 수 없음', 히즈라라는 정체성에 기대 헤쳐가고, 아주 늙은 여인이 되어 무덤가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 때까지. 어머니는 자신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사르미드가 안줌에게 선사한 힘은 더 큰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법에 대해 알려준다. 안줌은 언어를 잃은 사람들, 내적,외적 모순에 고통받고, 공포와 체념을 들이쉬며 산 사람들에게 그 모순 속에서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건 묻지 않고 일단 품에 안는 것이다. 그녀는 자이나브를 품고, 사담을 품고, 틸로와 무사, 미스 제빈 2세,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전부 끌어 안는다. 안줌의 존재는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강이다. 영혼에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그 강가로 모여든다.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는 이 책에서, 첫 1부는 안줌이 태어나서, 히즈라들의 거처인 콰브가에서 지내다 그녀가 콰브가를 떠나 새 삶을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1부에서 인도의 '외적'인 문제, 정치,종교적 당파성, 전쟁 등의 문제는 부각되지 않는다. 1부는 히즈라의 이야기를 한다. 콰브가라는 숙소에 모여, 역사에 아무 자리도 없이 그림자로, 또는 '행운'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여기 행복한 사람 없어. 행복이 가능하질 않아.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결국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도-파키스탄 전쟁. 나중에 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외적인 문제들에 대해 말한다. 카슈미르 분쟁같은. 하지만 시작은 안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왜 작가는 안줌에서부터 시작했을까? 가장 비천한 자라서? <지복의 성자>는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처럼) 인도의 장대한 서사를 말하고 있지 않다. 대신 인도의 상황이, 종교가, 역사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드는지 얘기한다.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증오와 침묵을 가르치며 영혼을 불구로 만들려 하는지, 하지만 모든 당파성, 남과 여, 종교 분쟁, 성스러움과 부정의 혼돈을 속에 안고 산 안줌은 굴종하지 않는다. 내면의 인도-파키스탄 전쟁만큼이나 그녀를 이끄는 힘은 모성애다. 태어난 생명을 마땅히 사랑하고 보살피려는 본성. 그녀는 항상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베풀 아이를 바란다. 자이나브는 콰브가에 두고 와야했지만, 공원에서 다시 버려진 아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투사들의 비겁함에 분노하고, 당당하게 아이를 위해 싸운다.


 "이 아기는 신의 선물이에요. 나에게 줘요. 나는 아기에게 필요한 사랑을 줄 수 있으니까. 경찰은 아기를 정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던져넣을 겁니다. 아기는 거기서 죽을 거고."


 안줌이 콰브가를 떠나 무덤가에 집을 짓고, 사담을 만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어느날 시위가 벌어지는 공원에서 아기 하나를 위해 경찰과 맞설 때까지를 2부라고 하자. 3부는 시점과 주인공이 변한다. 안줌은 조연으로, 히즈라들의 안식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도 잠시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3부의 주인공은 버려진 아기를 안아든 묘한 여인, S. 틸로타마다. 그녀의 삶은 안줌과 다르지만, 역사의 그림자, 자신을 설명할 말을 갖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은 비슷하다. 지체 높은 가문의 여자와 하층 카스트의 결합으로 태어난 틸로의 피부는 검다. 수녀원에 버려진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가 입양한다. 틸로는 도도하고, 입이 험하며, 속내를 가늠하기 어렵다. 


 3부는 그런 틸로의 이야기가 세 남자와 엮어 양파 껍질처럼 천천히 드러난다. 남자들의 등장은 이야기에 '외적'인 문제를 불러들인다. 인도-카슈미르 분쟁. 틸로의 세 남자는 모두 이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 비플랍은 지배자/권력층으로서, 나가는 알려진 기자로서, 무사는 투쟁하는 이슬람 전사 지도자로서. 이때까지 <지복의 성자>는 말그대로 그림자, 문 안에 있는 사람들, 누군가 자신을 이끄는 대로 따라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지만, 세 남자의 등장으로 소설은 역사-정치적 강렬함를 두른다. 


 제 삼자, 멀리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비플랍은 견고한 상류층이다. 그는 틸로와 무사에게, 인도-카슈미르 분쟁에서 고뇌할 필요가 없는 권력자이다. 하지만 비플랍이 계속 틸로를 알고자 하기 때문에 카슈미르 분쟁은 독자에게 더 생생한 현장이 된다. 그녀의 내면은 너무나 고요하고 떳떳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틸로는 중력처럼 이 남자들을 추상성의 세계에서 끌어내린다. 비플랍이 한때 틸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틸로를 둘러싼 모든 것(카슈미르 분쟁!)은 당파성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건 서로의 상호관계성, 기억과 감정에 기반한 사건이다. 이게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분쟁이다. 기억과 감정. 분쟁은 '믿음'이나, '의견'의 충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가치들은 추상적이다.


 틸로의 연인, 무사가 이슬람 전사로 나서게 된 건, 믿음의 각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 이야기를 조르는 딸의 목소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작가는 분쟁을 우리 눈높이 가까이에 내려놓는데, 그러면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피와 눈물과 오물에 범벅이 된 사람들이 영혼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신을 부르짖는 걸 보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딘가에 '비유'가 될 수 있는 문제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슈미르 분쟁은 오직 카슈미르 분쟁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추상성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틸로와 무사의 간절함을 어디에도 감히 비유할 용기를 내지 못하겠다. 미스 제빈 2세의 사연을 들은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의 심정이 이 책을 읽고 난 내 감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편지를 들은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먼 곳의 미지의 여인의 이야기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보았다."


 나는 <지복의 성자>가 사랑과 삶에 대해 말한다고 느꼈다. 어떤 세속적인 성스러움에 대해. 존재의 비천함에 대해, 영혼이 부서지는 이유와, 고통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대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아룬다티 로이의 문장은 내 눈을, 뇌를, 가슴을 벌침 쏘듯 마취시키고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의 음영을 가슴에 새긴다. 알몸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틸로, 무사의 어린 딸이 숨어있는 묘비, 다시 돌아오지 않을 다짐을 하면서도, 곁에 누운 연인을 끌어안는 무사. 


 이 책을 읽고나서 해야할 일은 이미 책 속에 나와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나무나 어른 코끼리의 대형처럼 미스 제빈 2세를 둘러싸고 간격을 좁혀, 미스 제빈 2세가 자신의 생물학적 어머니와는 달리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물샐틈없는 요새를 만들었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있을까. 땅에서 한뼘도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자꾸만 납작해지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이야기의 마지막은 쇠똥구리 귀 키욤이 장식한다.


"모두가 함은 쇠똥구리 귀 키욤은 제외한 것이었다. 그는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혹시 하늘이 무너지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공중으로 다리를 뻗은 채로. 하지만 그조차도 결국엔 모든 게 다 괜찮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하니까. 

 왜냐하면 미스 제빈, 미스 우다야 제빈이 왔으니까."


 어떤 책은 그저 읽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책을 읽으라고, 아름답고, 비통하고, 절박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해야한다. 나는 <지복의 성자>에게 그저 감사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내게 새로운 성스러움에 대해 가르쳐주어서. 지복의 성자가 무엇인지 알려주어서. 

 성인 사르마드는 힌두교인 소녀를 사랑하여 인도로 건너온 17세기 아르메니아 상인이다. 진정한 이슬람교도임을 증명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아직 충심으로 알라를 받들수 없다 주장해 목이 잘린다. 인도인들은 굴종하지 않는 자유와 사랑을 추구한 그의 정신을 기려 영묘를 만들고 그를 '지복의 성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으로 추앙한다. 동성애자로서 그는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들의 영혼이 다 성자의 품 안에 있다. 역사의 얼룩 아래를 흐르는 깊은 강, 이 강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야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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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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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예전에 어느 그릇 가게 주전자에서 본 적 있다. 그 때는 애나 모지스라는 화가가 누군지는 모르고, 따듯한 외국의 분위기가 좋아서 그 주전자를 탐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책에 나오는 그림들이 왠지 낯익다. 어린 시절 책장 액자에서 본 게 틀림없다. 친숙한 느낌에 나는 동화책을 읽는 기분으로 천천히 책을 펼쳤다.

 

 


 애나 메리 로버스튼 모지스. 1860년 워싱턴에서 태어나 1961년 타계한 미국의 화가다. 76세에 붓을 잡기 시작해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는 등 명성을 얻은 그녀는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16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 책은 그런 모지스 할머니가 남긴 자서전이다.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면 다들 너무 늦었다고 말릴 나이 76세에 그림을 그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삶이란 어떤 걸까? 그녀는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일을 했기에 화가가 된 걸까? 


 모지스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고 명성을 얻는 부분은 전체 286 페이지 중 끝의 30페이지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삶에서 그림과 세간의 명성은 그렇게 소소한 분량을 차지한다. 대신 모지스 할머니의 이야기는 탄생과 죽음, 병, 전쟁, 무엇보다 그녀와 함께했던 사랑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하다. 볕 좋은 날 할머니와 마주 앉아 레몬차를 홀짝이며 그녀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책은 따듯하고 포근하다. 할머니의 삶은 시냇물이 흘러가듯 잔잔하게 어이잔다. 오래된 소설처럼.

 

 워싱턴 카운티에서 어린 시절과 12살에 다른 농장에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하고, 남편 토마스를 만나 자신만의 가정을 또 만들어 가는 20세기 여인의 삶은 재밌다. 모지스 할머니는 지난 삶을 얘기할 때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굴지 않지만, 그녀의 단정한 태도만으로도 그 때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과를 수확해 시럽을 담그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는 시골 사람들의 삶. 중간중간 삽입된 그녀의 그림들이 모지스 할머니가 살았던 세상을 우리에게도 보여준다. 아름답고 평화롭다.


 모지스 할머니는 죽음에 담담하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게 당연하다는 듯, 가족의 죽음, 아이들의 죽음, 남편의 죽음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려 죽고, 갑작스럽게 죽고, 때론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자기 다섯 아이들의 죽음에 그녀는 한 마디를 할 뿐이다. '아름다운 셰넌도어 밸리에 나는 조그만 무덤 다섯 개를 남겨두고 왔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나오는 남편 토마스의 죽음에 있어서는 모지스 할머니의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 토마스의 죽음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927년 1월 15일, "갑자기 어두워졌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토마스는 떠난다. 이 둘은 책에서 서로 존댓말을 쓰는데 나는 이 번역이 정말 좋았다. 


 토마스가 죽고나서 모지스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젊어서 하던 버터 사업이나 감자칩 사업을 보면 그녀가 참 바지런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에도 모지스 할머니는 그리고 싶은 걸 성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녹아난 그림은 벽난로의 온기처럼 따듯하고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들인다. 나 같은 경우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과일 따고 썰매 타며 자랐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괜시리 행복해진다.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아버지가 그녀에 대해 꾼 꿈이야기다. 인생을 설명할 때 꿈이라는 미신적 요소에 기대는 


 '오래전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가 들려준 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애나 메리야, 내가 어젯밤에 네 꿈을 꾸었단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좋은 꿈이었어요, 나쁜 꿈이었어요?" 내가 물었지요. "그야 어떤 미래가 펼쳐지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꿈은 위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운단다." 아버지의 꿈에, 내가 널찍한 홀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보내더랍니다. 아버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대요. "그런데 돌아보니 애나 메리 네가 남자들의 어깨를 밟으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게 아니겠니? 내게 손을 흔들면서 남자들 어깨를 번갈아 밟으면서 다가왔어." '




 '인생에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란 결국 우리에게 기다릴 시간이란 없다는 뜻 아닐까? 뭔가를 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라. '무언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을 때이거든요.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 말이에요.'

 애초에 뭔가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전문가가 되기에? 명성을 얻기에? 돈을 벌기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런 부수적 대가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다. 최적의 때란 없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래도 모지스 할머니의 삶에서 배운 건 무얼하건 인생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 거기다 내가 오래 전 책에서 읽고 가슴에 새겼던 문장도 떠오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열광이 없어야 한다'. 간만에 지혜롭고 따듯한 책을 읽어 행복했다. 어릴 적 집에 있던 그림들을 그린 사람이 누군지 이제야 알았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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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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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태고가 마을 이름이란 걸 읽었을 때는 너무 낯설었다. '태고적'에나 쓰일 법한 음절이 한 마을의 이름이라니. 예슈코틀레, 게노베파 등 입에 달라붙지 않는 이름이 첫 장부터 나와 나는 초반에 집중하는 데 살짝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이름에 익숙해지면, 순식간에 읽힌다. 토카르추크 특유의 짧게 나뉘는 장과 깔끔한 문체 덕에 상상하고 빠져들어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태고의 마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사를 그려낸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신이 지켜보고 천사가 아이들의 탄생과 함께 한다. 토카르추크는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을 번갈아 보여준다. 모든 인물은, 신도 천사도 성모도 동물도 같은 시/공간 속에서 관찰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이 신화적 상상력은 예전에 읽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오르게 한다. 땅에서 인간의 삶과 풍파, 전쟁, 출산, 배신과 사랑을 겪는 동안 신은, 초현실적인 세계의 힘은 중간중간 삽입되어 그들과 함께, 같은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게 꼭 그 때와 같다. 


 하지만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마을, 태고는 소박하고, 조금 덜 강렬하다. 대신 안젤리카의 꽃내음과 어머니의 모유에서 날 법한 포근한 젖냄새가 나는 듯 부드럽다. 내가 이 '태고의 시간들'이 유기적이고 더 안정되었다고 느끼는 건 태고와 함께하는 신의 존재 때문이다. 이 신은, 과격하지 않고 고요하며 고요히 굽어보며 마을의 시간이 차곡차곡 포개어져 강물에 떠내려 가는 걸 지켜본다. 그는 신이지만, 창조할 뿐 쥐고 흔들지 않는다. 신은 시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신마저도 손댈 수 없는, 근본적인 세계의 질서다. 그렇기 때문일까? '태고의 시간'들 속 모든 장의 제목은 '시간들'이다. 하나의 인물이 지나고 있는 한 순간. 행동과 느낌과 공간을 포괄하는 무자비하고 고요한 흐름. 마치 강처럼, 모든 오물과 아름다움을 속에 품고 태고의 강물은 끝없이 흘러간다.


 게노베파의 시간은 미시아의 시간으로 미시아의 시간은 아델카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흐름. 딸은 딸을 낳고 그들은 남자와 결혼해 수천 년간 계속되어 온 세계에 다시 한 생명을 더한다. 하지만 토카르추크의 마을, 태고에서 여인들은 딸을 원한다. 

 '모두가 딸을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텐데 말이지요.'p 13


 신화적 상상력, 마을을 둘러싼 삼대에 걸친 서사, 이런 기법은 낯설지 않다. 남미 문학이 즐겨 사용했으니까. (마르케스!) 하지만 토카르추크의 서사가 특별한 건 서사가 여성에 의해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간을 연민하는 시선은, 신이 하늘을 덮듯 세상을 덮어싸는 그 시선은 전부 여성의 시선이다. 잉태하고 출산하고, 여성은 예지의 힘이 있고 자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과 땅에서 세상의 경계를 마주한다.


 남성은 조연이다. 태고의 마을에서, 남성들은 아이를 배게 하지만, 여인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이지만, 그들의 세계는 태고의 마을을 위협할 뿐이다. (남자들의 전문인) 전쟁은 외부에서 들이닥쳐 태고의 마을과 여인들을 숲으로 좇아내고 파베우의 직업에는, 우클레야에게 신이 가 닿지는 않는다.

 오직 여성들만이 세계의 경계를, 신의 존재를 알고 느낀다. 미시아의 아들, 크워스카와 바뀌었다고 믿는 (살짝 모자르다고들 하는) 이지도르만이 신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가 그를 인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심하고, 잘 믿지 못하며,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반 무크타가 신이 없음에 대해 설명하자 그는 그 사실이 무슨 뜻인지 온 몸으로 깨닫는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게 공허하고 의미없음을. 

 반면 여자들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신인 그녀가 존재함을 이미 (선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여성 인물들의 시간은 충만하고 주술적이며 강렬함으로 빛난다. 토카르추크의 세계가 모성과 여성성이 중심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또 하나는, 여성들의 선택이다. 게노베파는 젊고 잘생긴 유대인 엘리를 사랑한다. 그녀가 이미 유부녀이기 때문에 그를 아주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에 빠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짧고 비극적으로 끝나는 둘의 사랑은 게노베파의 온 몸을 마비시킬만큼 강렬했다. 남자들은, 멀리서 와서 여자들을 임신시킬 뿐이다. 여자들은 몸을 팔고 (크워스카) 마을을 떠나고 싶어하고 (루타) 아버지에서 벗어나고 싶고 (스타시아) 사랑에 빠지며(게노베파) 결혼하고 싶어하기도(미시아) 한다. 그녀들의 삶은 194-50년대 폴란드 여느 마을이나 그랬을 법하게 흐르지만 모두가 자신의 무지와 열망에 기초해서 선택한다. 남자들은 나타나지만 보통 힘없이 세계의 흐름에 휩쓸릴 뿐이다. 엘리는 죽고 스타시아의 남편은 떠나며 우클레야도 파베우도 선택이란 과정 없이 삶을 남성이라는 자아에 기대어 살아갈 뿐이다. 흠결이 있는 이지도르만이 무언갈 원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끝없이 탐구하며 계속 가족의 다락방에서 마을를 관찰하는 인물이다.

 이지도르는 남성이지만 여성들의 아들인 것이다. 자연의 목소리를 듣고 신을 찾는. 하지만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의문 없이 신의 존재에 한껏 젖어들기 힘들다. 남자들은 그를 자신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성들은 그저 연민을 가고 보살필 뿐이다.


 토카르추크의 신은 새롭다. 그녀의 세계관은 새롭다. 그건 무엇보다 변화가 세상의 질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개념, 신과 신에게 연결된 존재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사, 개 등) 세상은 순간의 풍경이고 매 순간은 영원하다. 하지만 그렇기 않은 존재들에게, 번민하고 무지하고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성모는 축복을 베푼다. 이런 신의 촉복을 얻느냐 마느냐는 인간 자신에게 달렸다. 신은 그저 줄 뿐이다. 그저 지켜보고, 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을 굽어살필 뿐이다. 세상이 당연히 변화한다고, 그것이 수순이라는 걸 알기에 막지 않는다. 그는 그럴 힘도 없다. 시간을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변화를 막겠는가?

 그건 방앗간이 없어지고 펜션이 생기며 루타가 엄마 품에서 벗어나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사진기 앞에 서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왜 필요한 걸까? 신은 왜 있고 무엇을 하는 걸까? 예슈코틀레 성모상은 이 고통스런 질문에 가만히 미소짓는다. 그녀는 축복을 원하는 자에게 축복을 준다. 거짓없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살아가는 자에게 신은 그들이 소원하는 것을 줄 뿐이다. 그게 창조한 자의 의무이니까. 

 토카르추크의 태고에는 성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지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천국에 대한 얘기도 없다. 천사들만이 있다. 신의 사자들. 태고가 폴란드의 가슴아픈 역사에 따라 전쟁에 망가지고 무수히 많은 죽은 영혼이 흑강을 따라 행진할 때도, 산 사람은 지켜볼 뿐 따라갈 수 없다.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니까. 게노베파도 죽고, 미하우도 엘리도 무크타도 이지도르도 모두 죽는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태고를 떠난다. 세계로 더 넓은 세상으로 신과 '태고적' 전설과 신화를 뒤에 남기고 배기가스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버섯의 소리를 듣는 크워스카가 숲을 걸어다니고 털이 수북한 나쁜 사람이 종종 나타나는 오래된 유년의 마을이 폴란드 어느 구석에 있다. 그 곳의 신은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호기심과 두려움과 낮고 깊은 연민으로 지켜볼 뿐이다. 한 늙은 남자가 게임의 주사위를 돌리는 것을, 고통받고 시들어가는 삶을, 무지하기에 용기있는 선택들을. 그 모든 간절함이 강물에 스며들어 그녀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 스며들어 뻗어나가는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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