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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선택권이 있나요?"
나는 묻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다. 이 문장을 말하는 화자 '나'가 할머니에게 묻는 것이다. 그는 할머니와, 할머니와 친한 노인과 함께 조상의 묘지에 왔다. 자신의 성인 스타시니치가 쓰인 인 묘석이 가득하다. 그는 이 장소가 낯설다. 이 곳의 우물물을 마셔야 하는 의례의 순간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이걸 거절할 수 있는지. 핏줄로 이어지는 역사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는 "유머를 잃지 않고 조금이라도 익살스럽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 할머니가 속삭였다. "배은망덕하게 굴지 말아라."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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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창 밖의 어린 소녀를 보는 할머니로 시작한다. 2018년 3월,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있다. 그런 할머니를 보는 화자 '나'는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지만 보스니아 전쟁을 피해 독일로 온 난민이다. 10년 전 '나'는 독일 이민국에 자필 이력서를 써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출신과, 그간 내력에 대해 설명해야 할 입장에 놓인다.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독일 출신이 아니면서도 왜 독일에 머무르고 싶어하는지, 작가가 채워야 할 빈 종이를 바라 보는 순간은 <출신>이라는 내밀한 이야기가 시작하는 장면이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등장인물은 증조모님, 증조부님에서 아랄 주유소의 친구들까지 다양하다. 등장하는 장소들도 비셰그라드, 오스코류사, 하이델베르크, 크로아티아 등 많은 곳을 오간다. 하지만 중심은 크리스티나 할머니와 '나'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위로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은 마지막에 '용의 보물'이라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2018년 11월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책은 끝나지만 그 과정에 가기까지 작가가 고백하는 이야기는 아름답고 인상깊다.
책은 짧은 이야기, 두 서넛 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를 중첩해 <출신>이라는 하나의 긴 서사를 만드는 구성이다. 호흡이 짧게 짧게 끊겨 띄엄띄엄 읽기도 좋지만, 지역 이름이 낯설어 집중이 필요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날잡고 하루종일 이 책만 읽어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기분은 설명할 수 없는 감화, 감명이었다. 처음에는 과거, 미래를 왔다갔다 하는 서술, 복잡한 명칭과 이름들, 그 이름에 얽힌 사연이 얽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내가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에 대해 얼마나 익숙하지 않았는지를 반증하는 것뿐이다. 중반부로 가면서 명칭이 눈에 익고 이야기의 흐름이 느껴지면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치매에 걸린 크리스티나 할머니와 '나' 사이의 대화를 읽고 있으면 이들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을 품지만, 책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너는 기묘하고 음울한 시간의 동굴에 이다. 길 하나는 아래쪽으로 나 있고, 다른 하나는 위쪽으로 이어져 있다. 네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너를 과거로, 위로 올라가는 길은 미래로 이끌 것이다. 자, 어떤 길을 가기로 결정할 것인가?" p 50
작가는 아래로 내려가기를 택한다. 아버지, 어머니의 증조모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는 과거를 더듬어간다. 그가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가 기억하는 건 완벽하지 않고, 아주 적기 때문에 그는 목격의 부재를 상상으로 채운다. 작가의 서술은 창 밖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집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탐색적이다.
"(나는) "다음에 또 오스코류사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 그때 할머니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되살아나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번엔 할머니가 "어떤 한 남자와" 왈츠를 추고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페로"라거나 "네 할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남자가 할머니의 발을 밟는다.
나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
p 115.
증조모부의 역사로 시작한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맞춰 어머니, 아버지로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이란 단어는 덜 등장하지만, 대신 사회주의, 민족, 증오심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보스니아 내전의 서막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보스니아 내전의 유고슬라비아에서일어난 내전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을 읽으며 찾아보니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로,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공화국이 참전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유고 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민족 청소, 학살 등 잔혹한 전쟁 범죄가 일어났다. 10-11만 명이 사망하고 220만명이 난민이 되는 등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한 전쟁이다.
책 속에서는 보스니아 전쟁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4살의 '나'가 부모님과 함께 유고 슬라비아를 떠났다는 것, 내전이 끝난 뒤 돌아간 '고향'에는 전쟁의 폭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들만이 보스니아 내전의 잔인함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작가는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족만 전쟁에서 벗어나 그 지옥을 겪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국가의 사람들이 겪은 일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고, 이들의 분노, 고통에 한 몸으로 엮어 있는 일체감을 느낄 수 없다. 유고 슬라비아에서 나고, 십 사년 간 자랐음에도, 이 곳은 이제 낯설다. 그에게 민족은 잔혹한 단어가 되었고, 크리스티나 할머니 같은 가족들만이 그에게 희미한 혈통이라는 무형의 존재를 언급한다.
"1996년, 전쟁이 끝나고 내가 처음으로 비셰그라드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로 꽉 찬 그 도시는 실업자가 넘쳐나는 절망적이고 공격적인 세상이었다. 나는 옛 고향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새로운 곳에 처음 온 듯한 느낌이었다. (...) 나는 비셰그라드에 있는 내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내가 밤중에 하이델베르크 야외 수영장에서 카누를 타고 있는 동안 이곳에서 전쟁을 버텨낸 옛 학교 친구들을 만났을 때, 독일 마르크를 교환했을 때, 라힘이 이 도시에 대해 뭔가 알고 싶어 했지만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때. 학교 친구들 중 거의 모두가 잘 지내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들과 달리 난 잘 지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 351.
독일에 도착한 '나'가 느낀 감정은 슬픔, 비참함, 기구함 같은게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시작, 출발점을 얻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 삶은 난민의 삶이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벗어난 삶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쌓았던 학력과 경력을 버리고 말이 안 통하는 독일에서 밑바닥 노동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를 자식에게 풀거나 하진 않는다. 대신 묵묵히 생계를 유지한다. 망가진 등, 허벅지의 흉터 등 인생은 부모님의 몸에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그런 증거를 바라보며 과거를 유심히 되짚어 본다. 국제 학교에 다니고, 여자친구를 만들고, 아랄 주유소에서 친구들과 모여 먼 산을 구경하는 동안 부모님이 겪었을 좌절감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당시의 '나'는 아직 어리고 성장하느라 바쁘다. 그는 아랄 주유소의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외국인의 비중이 높은 국제 학교에 다녔고, 밴드부로 졸업 공연을 마치기도 한다.
독일로 모여든 각양각국의 사람들은 타지에서의 생활이 편하기만 했을까?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자, 민족 우월주의자 등은 전철, 길거리에 만연하고, 난민들을 배척하는 시선이 항상 이들을 노려본다.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런 차별을 알고 있지만, 어린 난민인 이들이 독일에 갖는 감정은 더 미묘하다.
"이야기의 주제로 독일, 현재, 성취감, 모욕감, 굴욕감이 다루어졌다. 여기서 그리는 것은, 언짢고 불만스러운 일과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황당하게 느꼈던 일뿐 아니라, 왠지 좀 더 참고 견뎌낼 만한 일이 뭐였느냐이다. 왜 난 이런 일들을 겪은 적이 별로 없었는지 모르겠다. 순례자들이 여권에 도장을 받듯이, 우리는 차별 대우를 받은 경험을 수집했다. 우리가 가는 길 끝에는 몹시 화가 나있고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 내는, 토르의 망치를 가진 인종차별주의자가 서 있는 게 아니라, 마리아상과 좋아하는 독일 암벽이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들만 있었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잡은 자리들 말이다."
p 292.
부모님은 후에 추방되지만, '나'는 다행히 학생으로서 계속 독일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는 글을 쓰고, 작가로 살아간다.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다. 고향을 피해 달아난 경험, 독일에서 그가 겪은 '이방인'이란 적대 혹은 소외감들은 출신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가 될 수 없는지 느끼게 했다.
"누군가 내 출신을 물으면 나는 때론 '비셰그라드', 때론 '유럽' 때론 '쿠르팔츠'라고 대답했다. 쿠르팔츠가 가장 호응이 좋았다. 외국에서 '쿠르팔츠'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그것이 도시인지 혹은 말을 잘못했는지 거의 몰랐다.
나는 부모님을 인문학자라 하고, 사냥꾼인 할아버지를 그단스크에서 이주한 이주민이라 했다. 또 어머니가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그뿐인가. 묻지도 않는데, 출신은 우연에 의해 정해질 뿐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p 244
이런 행동이 작가가 고향을 부끄러워 한다거나, 엄연한 진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건 아니다. 그는 디아스포라다.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 그에게 고향은 어떤 기억의 순간이지, 영토를 말하지 않는다. 시작은 전쟁으로 인한 난민이었지만, '나'가 고향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만큼 그는 디아스포라로 거듭난다. 고향은 잔인하고, 타국은 냉담하다. 고통과 별개로 어떤 소외감, '이방인'이라는 감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나'가 출신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내밀하고 모순된 감정이 얽혀있기 때문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비셰그라드는 항상 그의 안에 남아 있다.
"지금은 왜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살고 있지 않는지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줄곧 그런 설명을 해오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하는 변명에 가깝다. 비셰그라드. 이 도시의 역사 때문에, 역사와 더불어 갚아야 하는 죄책감 속에서 찾아든 유년 시절의 행운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 도시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않을 때조차 내 이야기가 이 도시를 염두에 둔 듯한 생각이 든다."
p 264.
작가는 담담하게 자신의 기억 회상하지만 그 아래에는 손쓸 수 없는 역사의 상황에 휩쓸린 상흔이 존재한다. 파이프 공사 일에 노동하며 망가진 아버지의 등, 세탁일을 하는 어머니, 주워온 가구들로 꾸린 집. 아버지 어머니는 힘들게 일하고 아들을 사랑하지만, 사춘기의 '나'는 어쩐지 이런 집과 부모님을 감추고 싶다. 그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아주 자랑스럽지는 않다. 난민이라는, 타 민족 사람이라는 출신은 자랑스러움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타국에서 (환대받던 차별받던)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이질성의 감각. 학교 졸업실날 밴드 공연을 연주하는 '나'를 보러 온 부모님은 멋지게 연주하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처음으로 나를 지켜볼 수 있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집에 있는 나를, 유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서, 어쩌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내 자신감에, 또 그것을 해내고 그 대가로 박수갈채를 받고 있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니면 당연한 일이라곤 별로 없는 우리의 삶에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슬퍼서 그냥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p 287
그렇다고 '나'의 청소년기가 고독감과 단절감으로만 이뤄진 건 아니다. 그에게는 아랄 주유소와 그 곳에 항상 모이는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가 난민인 건 아니었지만 뿌리깊은 독일 태생의 사람도 없었다. 이민자의 자식들, 이동의 경험이 있고, 독일에서 같은 이질성을 경험하고 있는 이 친구들은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낸다. 먼 산을 보거나, 밤늦게 기차역에 모여 술이나 야한 잡지를 펼쳐 보면서. 작가는 이 소속감을 사랑하고, 설명이 필요없는 친밀함으로 함께 있는 순간에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나의 반항은 일종의 적응이었다.' 독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걸었던 기대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그 방식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 뿐 아니라 민족적 정ㅊ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 그런 소속감과 함께 우리의 가장 작은 공통분모는 '충분하다'였다."
p. 295
그의 고향이 민족적 정체성으로 인해 참혹한 전쟁을 겪은 곳이기 때문일까, 민족, 출신 등의 특징에 작가는 회의적이다. '출신은 우연일 뿐', 만약 그가 고향을 말해야 한다면 그의 이빨을 치료해준 치과의사를 말하고 싶다고 한다. 그와 할아버지와 치과 의사, 셋이서 했던 낚시가 그에겐 고향이라고. 그에게 고향은 평화로운 분위기, 다정하고 친절한 대화, 그와 그의 가족이 '이질감'없이 어울리는 순간의 소속감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야 했던 '나'가 갈망하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고슬라비아의 가족, 친척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가 말하길 '이기적인 한 사람일 뿐인 나는 가족과 가족의 단결보다 나 자신을 더 돌보았다'
이런 작가가 과거에, 자신의 증조모부의 역사에, 오래된 용의 전설에 대해 상상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건 크리스티나 할머니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그녀는 많은 걸 잊고, 과거의 사람들을 보며 죽은 남편을 계속 찾는다. "페로?" 페로는 언제 돌아올까? 동시에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나'에게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노쇠한 그녀는 '나'에게 핏줄로 이어진 역사를 상기시키고, 그가 무언가를 전달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할머니가 자신에게서 과거의 사람들을 본다는 게 '나'는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웠다.내게서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가브릴로 노인은 자진해서 친척과 소속감이라는 짐을 짊어지려는 자신들의 마음을, 특히나 조상들의 모든 업적과 유산을 자랑스러워 하는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들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든 그러지 않든 상관 않고 말이다. 그중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가진 '공동 자산'을 우연히 보게 된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너무 늦지 않게 가족사에 엮여 들었을 뿐이다."
p 390
이해할 수 없음에도, 작가는 할머니의 기대를 단호히 거절하지 않는다. 이 책은 출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밀한 회고지만 동시에 병든 할머니와,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손자의 이야기로 읽혔다. 할머니가 얼마나 기대하던 '나'는 오스코류샤의 묘지에서 단결감, 소속감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가 부계 혈통을 잇는 아들로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너무 멀리 왔으니까. 그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다른 세계가 있고 미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출신> 이야기 속에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질문하고, 돌보고, 그녀를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용이 나오는 곳을 향해 함께 가는 모험 이야기를. 롤플레이 게임같이 선택지가 다양한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선택할 수 있다. 손자로서 할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남편을 찾는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줄까? 아니면 그녀를 데리고 멀리 도망칠까? 용을 만나게 할까? 시시각각 죽어가는 할머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안겨줘야 할까 하는 고민이 '용의 보물'이라는 다층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창조해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용을 타고 날아가도록 하는 일, 남편을 되돌려 받는 일. 요양소가 아닌, 용과 산과 동굴이 있는 세계가 할머니의 목적지였다는 일, 작가로서 자신이 그 목적지까지 그녀를 인도하는 일을 상상한다는 건 상실에 대처하는 얼마나 훌륭한 방법인가. 비록 그녀의 관은 살짝 비뚤게 땅에 묻혔더라도.
"훌륭한 이야기라는 건, 예전 우리 드리나강 같은 걸 두고 하는 말이지. 거칠고 폭이 넓은 강,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드리나강도 많은 이야기도 하나가 될 수 없고, 드리나강에도 많은 이야기에도 후퇴란 것이 있을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당신을 바라본다.
"내가 바라는 건 결국 우리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다."
p 448
나는 작가가 끊임없이 느끼는 이질감, 단절감,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읽으며 더없이 공감했다. 서양권 국가에 오래 있었을 때 겪었던 인종 차별과 외로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느껴지는 시선과 조롱 혹은 호기심의 태도, 내가 한 개인이 아니고 국가, 민족의 일부분으로 취급받는 일에 짜증나도 억울했으면서도, 동시에 한국과는 다른 사회적 분위기, 제도 등을 보며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 양면적인 감정, 설명할 수 없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 감정을 작가가 이렇게 정확하게 묘사하는 걸 보며 문학의 힘을 감탄스럽게 느꼈다. 나는 난민이 아니지만, 태어난 곳에서 이주해 타국에서 살아가거나, 그런 경험이 있는 디아스포라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뿌리없음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다. '나'의 뿌리는 없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전쟁과 폭력이 그의 고향을 두렵고, 증오스럽게 만든다. 난민 문학이라 해서 전쟁에 대한 세밀한 묘사,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증언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내게 <출신>의 담담한 서술은 놀랍고 매력적이었다. 이 책은 전쟁의 고통보다는 전쟁이 만든 상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과 그 이후에 겪은 삶에 대해서.
작가인 '나'는 출신이라는 관념에 회의적이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가 조상들에게서 받은 게 무엇인지 말한다. 그건 단결감, 소속감, 핏줄이라는 일체성이 아니라 이야기다. 오래된 우물에 고인 이야기. 이해할 수 없지만 묘지는 거기에 있다. 그 곳에서 그가 우물물을 맛보기를 기다린다. 핏줄은 그가 같은 피를 나눈 이들의 이야기를 '마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길고 환상적인,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와 가브릴로 노인 -거기에 이제 스레토예 노인도 가세해서-추모도 할 겸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우물 맛은 언어로 만들어져 언어로 표현되었다. 그 언어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간다. 그리고 한 사람은 살아남아 자신이 살아온 이해하기 힘든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p.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