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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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태고가 마을 이름이란 걸 읽었을 때는 너무 낯설었다. '태고적'에나 쓰일 법한 음절이 한 마을의 이름이라니. 예슈코틀레, 게노베파 등 입에 달라붙지 않는 이름이 첫 장부터 나와 나는 초반에 집중하는 데 살짝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이름에 익숙해지면, 순식간에 읽힌다. 토카르추크 특유의 짧게 나뉘는 장과 깔끔한 문체 덕에 상상하고 빠져들어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태고의 마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사를 그려낸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신이 지켜보고 천사가 아이들의 탄생과 함께 한다. 토카르추크는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을 번갈아 보여준다. 모든 인물은, 신도 천사도 성모도 동물도 같은 시/공간 속에서 관찰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이 신화적 상상력은 예전에 읽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오르게 한다. 땅에서 인간의 삶과 풍파, 전쟁, 출산, 배신과 사랑을 겪는 동안 신은, 초현실적인 세계의 힘은 중간중간 삽입되어 그들과 함께, 같은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게 꼭 그 때와 같다. 


 하지만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마을, 태고는 소박하고, 조금 덜 강렬하다. 대신 안젤리카의 꽃내음과 어머니의 모유에서 날 법한 포근한 젖냄새가 나는 듯 부드럽다. 내가 이 '태고의 시간들'이 유기적이고 더 안정되었다고 느끼는 건 태고와 함께하는 신의 존재 때문이다. 이 신은, 과격하지 않고 고요하며 고요히 굽어보며 마을의 시간이 차곡차곡 포개어져 강물에 떠내려 가는 걸 지켜본다. 그는 신이지만, 창조할 뿐 쥐고 흔들지 않는다. 신은 시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신마저도 손댈 수 없는, 근본적인 세계의 질서다. 그렇기 때문일까? '태고의 시간'들 속 모든 장의 제목은 '시간들'이다. 하나의 인물이 지나고 있는 한 순간. 행동과 느낌과 공간을 포괄하는 무자비하고 고요한 흐름. 마치 강처럼, 모든 오물과 아름다움을 속에 품고 태고의 강물은 끝없이 흘러간다.


 게노베파의 시간은 미시아의 시간으로 미시아의 시간은 아델카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흐름. 딸은 딸을 낳고 그들은 남자와 결혼해 수천 년간 계속되어 온 세계에 다시 한 생명을 더한다. 하지만 토카르추크의 마을, 태고에서 여인들은 딸을 원한다. 

 '모두가 딸을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텐데 말이지요.'p 13


 신화적 상상력, 마을을 둘러싼 삼대에 걸친 서사, 이런 기법은 낯설지 않다. 남미 문학이 즐겨 사용했으니까. (마르케스!) 하지만 토카르추크의 서사가 특별한 건 서사가 여성에 의해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간을 연민하는 시선은, 신이 하늘을 덮듯 세상을 덮어싸는 그 시선은 전부 여성의 시선이다. 잉태하고 출산하고, 여성은 예지의 힘이 있고 자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과 땅에서 세상의 경계를 마주한다.


 남성은 조연이다. 태고의 마을에서, 남성들은 아이를 배게 하지만, 여인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이지만, 그들의 세계는 태고의 마을을 위협할 뿐이다. (남자들의 전문인) 전쟁은 외부에서 들이닥쳐 태고의 마을과 여인들을 숲으로 좇아내고 파베우의 직업에는, 우클레야에게 신이 가 닿지는 않는다.

 오직 여성들만이 세계의 경계를, 신의 존재를 알고 느낀다. 미시아의 아들, 크워스카와 바뀌었다고 믿는 (살짝 모자르다고들 하는) 이지도르만이 신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가 그를 인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심하고, 잘 믿지 못하며,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반 무크타가 신이 없음에 대해 설명하자 그는 그 사실이 무슨 뜻인지 온 몸으로 깨닫는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게 공허하고 의미없음을. 

 반면 여자들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신인 그녀가 존재함을 이미 (선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여성 인물들의 시간은 충만하고 주술적이며 강렬함으로 빛난다. 토카르추크의 세계가 모성과 여성성이 중심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또 하나는, 여성들의 선택이다. 게노베파는 젊고 잘생긴 유대인 엘리를 사랑한다. 그녀가 이미 유부녀이기 때문에 그를 아주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에 빠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짧고 비극적으로 끝나는 둘의 사랑은 게노베파의 온 몸을 마비시킬만큼 강렬했다. 남자들은, 멀리서 와서 여자들을 임신시킬 뿐이다. 여자들은 몸을 팔고 (크워스카) 마을을 떠나고 싶어하고 (루타) 아버지에서 벗어나고 싶고 (스타시아) 사랑에 빠지며(게노베파) 결혼하고 싶어하기도(미시아) 한다. 그녀들의 삶은 194-50년대 폴란드 여느 마을이나 그랬을 법하게 흐르지만 모두가 자신의 무지와 열망에 기초해서 선택한다. 남자들은 나타나지만 보통 힘없이 세계의 흐름에 휩쓸릴 뿐이다. 엘리는 죽고 스타시아의 남편은 떠나며 우클레야도 파베우도 선택이란 과정 없이 삶을 남성이라는 자아에 기대어 살아갈 뿐이다. 흠결이 있는 이지도르만이 무언갈 원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끝없이 탐구하며 계속 가족의 다락방에서 마을를 관찰하는 인물이다.

 이지도르는 남성이지만 여성들의 아들인 것이다. 자연의 목소리를 듣고 신을 찾는. 하지만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의문 없이 신의 존재에 한껏 젖어들기 힘들다. 남자들은 그를 자신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성들은 그저 연민을 가고 보살필 뿐이다.


 토카르추크의 신은 새롭다. 그녀의 세계관은 새롭다. 그건 무엇보다 변화가 세상의 질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개념, 신과 신에게 연결된 존재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사, 개 등) 세상은 순간의 풍경이고 매 순간은 영원하다. 하지만 그렇기 않은 존재들에게, 번민하고 무지하고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성모는 축복을 베푼다. 이런 신의 촉복을 얻느냐 마느냐는 인간 자신에게 달렸다. 신은 그저 줄 뿐이다. 그저 지켜보고, 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을 굽어살필 뿐이다. 세상이 당연히 변화한다고, 그것이 수순이라는 걸 알기에 막지 않는다. 그는 그럴 힘도 없다. 시간을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변화를 막겠는가?

 그건 방앗간이 없어지고 펜션이 생기며 루타가 엄마 품에서 벗어나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사진기 앞에 서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왜 필요한 걸까? 신은 왜 있고 무엇을 하는 걸까? 예슈코틀레 성모상은 이 고통스런 질문에 가만히 미소짓는다. 그녀는 축복을 원하는 자에게 축복을 준다. 거짓없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살아가는 자에게 신은 그들이 소원하는 것을 줄 뿐이다. 그게 창조한 자의 의무이니까. 

 토카르추크의 태고에는 성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지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천국에 대한 얘기도 없다. 천사들만이 있다. 신의 사자들. 태고가 폴란드의 가슴아픈 역사에 따라 전쟁에 망가지고 무수히 많은 죽은 영혼이 흑강을 따라 행진할 때도, 산 사람은 지켜볼 뿐 따라갈 수 없다.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니까. 게노베파도 죽고, 미하우도 엘리도 무크타도 이지도르도 모두 죽는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태고를 떠난다. 세계로 더 넓은 세상으로 신과 '태고적' 전설과 신화를 뒤에 남기고 배기가스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버섯의 소리를 듣는 크워스카가 숲을 걸어다니고 털이 수북한 나쁜 사람이 종종 나타나는 오래된 유년의 마을이 폴란드 어느 구석에 있다. 그 곳의 신은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호기심과 두려움과 낮고 깊은 연민으로 지켜볼 뿐이다. 한 늙은 남자가 게임의 주사위를 돌리는 것을, 고통받고 시들어가는 삶을, 무지하기에 용기있는 선택들을. 그 모든 간절함이 강물에 스며들어 그녀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 스며들어 뻗어나가는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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