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여섯 살에 난 의문의 신경 발작으로 응급실에 갔다. 팔에 주사를 꽂고 약물을 주입했는데 부작용으로 혈압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기계가 삑삑 거리는 소리를 냈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왔다. 구급차에 날 태우면서 아빠와 간호사들이 어떻게든 날 깨우려고 소리를 쳤다. 일어나! 눈 떠! 안 뜨면 죽어! 이 장면이 기억나는 건, 내가 눈을 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했고, 잠이 왔고, 죽고 싶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기회가 오니 다시 삶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아! 왜 살아야 하지?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을 거야…

나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았다. 구급차의 빠른 속도와 현대의학의 힘이다. 눈을 떴을 때 병실을 보고 느꼈던 실망감. 그것이 죽음에 대한 내 씁쓸한 아쉬움이었는데 책 <자유죽음>을 읽으니 문턱에서 고뇌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자 장 아메리는 191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강제 수용소에 수 년간 갇혀 있었다. 그는 <자유죽음>을 출간한 지 2년 뒤에 수면제를 먹고 65살의 나이에 자살한다. 


그렇다면 장 아메리의 유작인 <자유죽음>은 어떤 내용일까. ‘심리학과 사회학, ‘자살학’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이 책은 분류나 해석 이전에 자살 상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에서 흔들리는 사람에게 자살을 선택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자살자는 치료가 필요한 가여운 사람인가, 아니면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 죽음은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될 금기라는 인식 속에서 자살자는 오랫동안 소외된 채 분석의 대상으로만 해부되었을 뿐이다. 


“자살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현상학의 안목에서 보자면 자살자들은 일종의 “무시당한 집단”이다.” -162p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자살을 용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살자에 대해 쉬쉬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침묵한다.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건 죄가 되는 것일까? 왜 제 손으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인간에게는 없단 말인가? 장 아메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삶이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 자살자의 내면으로 뛰어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기이하기만 한 그 세상에서 이들이 한 선택의 존엄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게 무언지 묻는 일이고, 결국 삶이 무엇인지 우리 산 자들에게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장 아메리는 손전등 하나 들고 동굴을 탐험하는 사람처럼 독자들을 이끌고 자유죽음의 불가해함을 파헤친다.


“자유죽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에세크(échec)’라는 것을 경험한다. (...)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상인은 ‘에세크’를 당했다. 바꿔 말하면, 죽음이 상인을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버렸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게 아니다. (...) 남자는 ‘에세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이라고 생각했다.” -90p


여기서 말하는 ‘에세크’란 무엇인가. 에세크는 프랑스어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다.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말. 총체적인 실패를 뜻하는 운명적인 단어다. 삶에서 에세크를 당한다. 문득 자신이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외통수에 당했다는 걸 깨닫는다! 각자가 어떤 상황에서 에세크를 맞는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에세크를 당한 사람은 삶이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외통수를 당한 자신에게 자유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커다란 문처럼 놓여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죽음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사람은 에세크 속에서도 살기를 결심할 수 있다. 패배가 뻔한 게임을 그저 질질 끄는 것처럼. 외통수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선택으로 ‘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외통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유죽음밖에 없으므로. 

장 아메리는 묻는다. 외부인으로서, 사람들이 에세크를 당한 자에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살아라! 어째서? 인간이 선택자이자 존엄한 개인으로서 에세크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그 선택지는 자유죽음뿐이다. 체크메이트 상태에 놓인 킹을 스스로 눕히는 것만이 게임을 끝낼 수 있다. 


존엄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죽음은 완전한 없음이다. 죽는다는 건 나를 ‘없음’의 상태로 던져버리겠다는 것이다. 죽음은 소멸일 뿐 거기엔 존엄도 선택도 없다. 그렇다면 자유죽음은 대체 무엇인가! 모순이 반복된다. 장 아메리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앞으로 세 발짝 갔다가 뒤로 두 발짝 후퇴하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궤적을 밟고 있다. 다만 그가 마지막까지 붙든 손전등의 빛은 인간은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야 하며 죽음은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건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존엄하다. 하지만 에세크가 들이닥쳐 그를 옭아맬 때, 무엇으로 그와 싸우겠는가. 존엄한 개인으로서 그 부자유가 그저 운명이라며 순종할 수는 없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살지는 않겠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자유죽음이 그 대답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맞서 그에 응전하는 일종의 대답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 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118p


장 아메리는 자살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삶은 늘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이라는 후광을 벗겨내고 삶과 죽음을 똑같은 저울에 올려놓는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무거운 짐이자 허위, 구토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부조리라는 게 밝혀지고 죽음은 무의미하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유일한 선택지로 여겨진다. 묘한 일이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낫지 않다면(의미가 무의미보다 낫지 않다면) 동전의 앞면이 뒷면으로 넘어가는 차이일 뿐이라면 죽음은 소멸일 뿐 두려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수치스러워 할 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건 선택이고, 개인이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존재로서 내릴 수 있는 존엄한 결정이 아닌가?


장 아메리는 이 모든 의문이 자살자의 변명처럼,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는 자유죽음에 대해 ‘증언할 뿐, 설득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장 아메리가 깊게 영향받은 사르트르는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다.” 라는 말을 남겼다. 장 아메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실패를 견딜 수 없는 자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로서의 선택이 무엇인가까지 나아간 것이다. 


자유 죽음의 언어가 우리 안에서 부유할 때, 이상하게도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에세크는 언제 밀려들지 모르고 누군가는 떠난다. 자살자는 학문의 일부도, 사회의 일부도, 타인의 일부도 아니다. 그는 그 자신에게 속한 유일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소멸해버렸다. 우리는 거기에 박수를 쳐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외면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생이란 짐을 아직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산 자의 몫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가. 

자살자는 타인에게 속하지 않지만, 나는 살아있고 아직 타인에게 속한 존재다. 타인 없이는 나의 존재도 없고, 사랑도 없고, 에세크를 무시하고 짐스런 인생을 이어갈 힘을 얻을 방도도 없다. 나는 타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외통수에 당하지 않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타인이 에세크로 떠나면 그게 나의 에세크가 되고,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바로 쓰러져버릴 무수히 많은 킹들이고, 체스판은 자비가 없고…그래서 이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상은 반짝거리면서 이어져 왔단 말인가. 


1976년 출간된 이 책을 오십여 년 뒤에 읽은 나는 한 문단에서 이것이 지난 세기의 책이라는 걸 실감했다.

“동물은 분명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임이 밝혀졌다. (...)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없다. (...)” -93p


책이 출간된 이후로 동물의 개체수는 무자비하게 늘어났고, 끔찍한 에세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동물들의 개체수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들 모두가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스스로 죽음을 추구하는 행동은 동물에게도 심심찮게 관찰된다. 더해, 찾아본 바 국내 최연소 아동 자살의 나이는 6세였다. 그 사이 기후 위기라는 새로운 에세크가 등장했고 우리 위를 뿌옇게 덮고 있다. 스스로를 위해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게 어찌 일정 연령을 달성한 인간만의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유죽음이 존재하는 건 인간이 너무나 지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산물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생명의 근원에 존엄한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것이 우리만의 특별성이며 다른 생명 안에는 없을 것이라 가정할 이유가 있을까? 장 아메리가 완전한 소멸 속으로 떠난 지금, 그 의문에 답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