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평전 - 비운의 혁명가 무정의 삶 그리고 생각
안문석 지음 / 일조각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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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이 100세나이로 죽었단다.현충원에 묻히긴 하는데 서울이 아니고 대전이라고 미통당에선 "이게 나라냐"라고 했단다.이게 해방된지 75년이나 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백선엽은 일제가 세운 만주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이제이"전략으로 세운 간도특설대의 장교출신으로 일제의 개가 되어 충성을 다했던 인물이다.한국전쟁당시 공을세워 33세의 나이에 대장이라는 직책까지 올랐다고 일제의 개를 현충원에 묻는다고...,

,야스쿠니신사가 어울릴만한 작자다.

그런면에서 보면 북한 건군 주요인물들은 어찌됐든 항일독립투쟁에 몸바쳤던 인물들이 주역이다.그중에서 "무정"은 조선팔로군 포병사령관출신으로 소련군 대위출신인 김일성보다 명성이 훨씬 높았던 인물이다.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선택한것이 중국공산당이었고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군사기질을 발휘하여 최고의 포병사령관이 되었던 것이다.무정은 공산주의자라기 보다 민족주의자에 더 가까웠던 인물이다.몽양 여운형과도 무척 가까웠던 사이라고 한다.이런 인물이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다면 남북은 분단보다는 협상에 의한 통일에 더 가까이 갈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당시 남북한 권력의 제 1변수는 외세의 힘이었다.남한에서는 미국의 힘을 얻은 이승만세력이었고 북한에서는 소련의 힘을 얻은 김일성 세력이었다.

해방후 북한의 여러정치세력중에 숫자상으로나,학력수준으로나,항일투쟁의 경험으로 보아도 가장 앞서있던 연안파였지만 뭉치지 못하고 분열되었고,뭉쳤던 만주파(김일성파)에 의해 숙청되어 사라졌다.

무정은 어찌보면 순수한 무인에 가까웠던듯 하다.정치적인 전략에 있어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보다 약했다.든든한 중국의 지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되다가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평소 앓던 위장병이 도져 병으로 사망했다.

그후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북한정권설립자로 인정받지 못했고,북한에서는 1990년대에 와서야 복권되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일제치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조선의 청년들이 가장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곳이 중국이었고,국민당보다는 공산당의 지원을 훨씬 많이 받아 항일무장투쟁도 펼칠수 있었다.

중국이 국공내전을 성공적으로 마칠당시 중국팔로군/신사군 소속으로 실전을 경험한 조선의용군소속 조선병사들이 북한에 들어와 실질적인 북한군 주력이 되었다.그래서 김일성이 1950년에야 전쟁을 일으킬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각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싸웠던 조선청년들을 생각한다면 일제의 개노릇을 했던 백선엽/박정희/정일권등 대한민국 창군주역이라 하는 작자들은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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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2023-11-2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김일성 왕조의 폭압하에 살아야 올바른 민족정기가 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