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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에이전시’와 ‘가든’으로 대표되는 두 세력들 간에 오랜 시간 전쟁이 펼쳐진다. 이들은 기존의 역사를 두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시간의 가닥을 엮고 해체하며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한다. 그 선봉에 선 블루와 레드는 여러 작전 속에서 맞부딪치며 각자의 존재에 대해 자연스레 의식하게 되는데, 전장에 같이 선 전우이자 라이벌로서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후일담 같은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조소하기 위해, 약 올리듯 주고받았던 전쟁 속 편지들은 어느새 고통을 같이 겪고 외로움을 공유한 인간이자 공통된 유머와 취미, 감정을 가진 동료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진실한 대화의 장이 된다. 시공간을 넘나들고, 최첨단 과학적 방식이 동원되어도, 아이러니하게 이들을 엮는 게 아주 오래 전의 교류 방식인 '서간'이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아말 엘모흐타르와 맥스 글래드스턴이 공동으로 쓴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흥미로운 설정과 매혹적인 어투를 지닌 작품이다. 소설은 이들 간에 왜 싸움이 발생했고, 어떤 전황을 보이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시공간을 오가는 타임슬립도, 육체를 바꾸고 서간의 형태를 조절하는 방식도, 이들이 서로 공작을 펼치는 역사적 사건들도 슬쩍 언급될 뿐,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편지를 주고받는 상황과 편지 그 자체다. 서로를 타겟으로 의식하던 두 적군이 어떻게 교류하고 이해하며 사랑에 빠지는지, 그 과정에 몰두하고, 절절히 묘사하는데 더 공을 들인다. 서사의 미학이 옅여진 대신 분위기와 감정에 집중한 현란한 수사는 책의 스타일리쉬한 외향처럼 아름답고 황홀하게 눈을 홀린다. 지나간 혹은 다가올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몰래 훔쳐보듯 두근거린다.
그런데 일면 참 어려운 소설이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은 경장편에, 뚜렷해 보이는 전쟁 속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설정, 다양한 시대를 거스르며 여러 방식으로 전해지는 서간체 형식인데 웬만한 대하 서사시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다시 읽고, 또 문장을 음미하며 내가 뭘 놓쳤는지 되새김해봐도 온전히 이 소설을 이해하기엔 더 많은 시일이 걸릴 것 같다. 두께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인 인용과 문화적 비유, 실제 역사를 품고 있는 시간선의 다양성과 구구절절한 감정을 포괄한 방대한 문학적 야심을 원어민의 언어가 아닌 제3국의 번역으로 체화한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친절한 각주와 해설, 고심한 언어적 선택이 고려되어도, 현재의 시공간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로 몰입해가는 복잡한 여정을 따라가는 건 여전히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그럴 만한 가치는 있다. 이들이 목숨 걸고 바뀌어가는 시간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을 쟁취하려 했던 것처럼, 독자로서 이 지적인 허영과 유희가 잔뜩 담긴 장르적 재미를 한낱 문장 앞에서 포기할 순 없지 싶었다. 시대적 조류에 앞서 나간다고 할 수 있는 과학소설에서 어찌보면 가장 고리타분하고 오래된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 사랑을 몰래 주고 받으며 서서히 감화되는 이들의 진지한 교류는 독자들도 매료시키며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궁금하게 만든다. 시인과 소설가가 함께 만들어낸 아름다운 묘사와 중의적인 표현, 깨알같은 언어유희와 경배는 물론, 퀴어 문학으로서 가치까지도 담아낸 진취적인 색채는 이 소설이 왜 그리 많은 상들을 석권하고, 평단의 호의를 얻었는지 충분히 증명한다. 간략한 스토리를 뛰어넘은 아이디어와 문학적 깊이가 던지는 파고도 상당하다.
"나에게 너는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부족한 편지야."라는 본문 속 문장처럼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도 수없이 반복해 읽어봐야 할 도전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