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편집자의 베스트셀러 읽기>
『언어의 온도』, ‘섬세함’과 ‘무심함’의 기묘한 이중주
첫인상이 좋다.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본 사진 속 저자의 단정하고 수려한 얼굴을 불현듯 떠올리게 한다.
디자인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solution)을 제시하는 일이라면, 이 책의 디자인은 칭찬받을 만하다. 이 책 디자이너가 직면했던 주요 과제는 두 가지였을 법하다. 하나는 친근하되 가볍지 않은 인상을 주는 것, 다른 하나는 독자가 여운을 느끼면서 되도록 천천히 읽게 하는 것.
문고판의 세로를 조금 잘라 낸 판형이 편안하고, 표지의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보라색 바탕이 눈길을 끌면서도 차분하다. 저자 이름과 제목,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는 캐치프레이즈와 최소한의 디자인 요소만으로 구성된 앞표지의 절제미가 인문적 향취를 은은히 풍긴다.
내지 디자인에서는 여백의 유연한 활용이 돋보인다. 세로쓰기한 제목이 고전적인 인상과 더불어 시작부에 충분한 여백을 제공하고, 띄어쓰기를 포함해 평균 800~1,000자 내외의 짧은 글을 3~4쪽에 넉넉히 나누어 실은 본문부에도 여백이 넘쳐 난다. 자칫 내용에 비해 공백이 너무 많다는(종이 낭비가 심하다는) 비판을 들을 만한데, 곳곳에 잉크 무늬를 넣어 빈 곳조차 디자인된 것이라는 인상을 빈틈없이 독자에게 심어 준다.
행과 서체의 운용도 눈여겨볼 만하다. 의미단락과 무관하게 거의 문장마다, 길어야 두세 문장 단위로 행갈이를 했는데, 그 덕분에 실제보다 내용이 많아 보이고 문장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행과 행 사이를 자주 띄워서, 독자로 하여금 중간에 한 박자씩 쉬면서 앞 문장의 여운을 음미하고 이어질 문장에 대한 기대를 품도록 유도한다. 문고판임을 감안해도 역시 작은 서체는 자연스럽게 텍스트에 집중하게 하고 읽는 속도를 늦추는 효과를 낸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 소곤소곤 말을 건넨다는 인상을 주는 부수 효과도 있겠다.
요컨대,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풀어낸, 기능적 디자인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제목도 잘 지었다. 말로 상처 주고 상처 받기 쉬운 요즘 세상에 필요한 책임을 직관적으로 알게 한다. 표지의 캐치프레이즈와 「서문」을 통해 ‘언어의 온도’에 민감할 필요성을 적절히 강조한 것도 제목에 대해 독자가 느낄 법한 호감을 효과적으로 강화해 준다. ‘그래, 중요한 문제인데 별 의식 안 하고 살았지.’ 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한번쯤 손을 내밀게 하기에 충분하다.
제목과 디자인이 좋아서 샀다는 독자 리뷰가 꽤 많은 것을 보면, 내용을 담을 틀은 잘 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빌려 “나를이 책을 키운 건 팔 할이” 디자인과 제목이었다고 평하고 싶을 정도인데, 그러면 저자에게 실례가 되려나?
어쩌면…….
*
책 안으로 들어가 보면 가장 먼저 저자 소개 글이 눈에 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가끔은 어머니 화장대 위에 은밀하게 꽃을 올려놓는다.”(저자 소개 글, 전문)
참으로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하던 윤동주 시인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 참, 저자가 “계절이 변화하는 미묘한 시기에, 수분크림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양산을 어머니 화장대 위에 은밀하게 올려놓는 편”(「계절의 틈새」, p.287)이라는 것도 독자는 나중에 알게 되지만, 꽃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기에 족하니 첨언하면 사족이겠다. 다만, ‘은밀하게’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편이니 ‘슬그머니’나 ‘슬며시’가 낫겠다. 언어의 쓰임새에 예민해야 할 책으로서는 ‘옥에 티’다. 저자 이력을 두고 ‘세탁 논쟁’도 벌어지는 듯한데, 어차피 상업 출판에서 독자에게 보이고 싶은 이미지를 정하는 것은 저자의 권리일 테니 그 문제를 따로 톺아보지는 않겠다.
이어지는 ‘일러두기’도 자상하다. “‘언어의 온도’라는 숲을 단숨에 내달리기보다, 이른 아침에 고즈넉한 공원을 산책하듯이 찬찬히 거닐었으면 합니다.”로 독서의 방법을 안내하고, “본문 곳곳에 스며 있는 잉크 무늬는 디자인적 요소입니다. 창작자의 의도를 너른 마음으로 헤아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로 디자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는 없던 것을 나중에 넣었는데, 아마 글이 너무 쉽게 읽힌다는 독자나 디자인 의도를 오독하는 독자가 적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한자어의 한자를 밝히거나 어려울 듯싶은 우리말을 풀이해 주는 것도 독자를 위한 자상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리 어렵거나 중요하지 않은 한자말들에 굳이 한자를 달거나 우리말 주석도 “톺아보다_‘샅샅이 톺아 나가면서 살피다’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 하나만 달아 놓아서, 어떤 원칙으로 대상 어휘를 선정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본문 구성도 치밀하다. 총 3장 88절(꼭지)인데, 1장이 29꼭지에 94쪽, 2장이 29꼭지 95쪽, 3장이 30꼭지 94쪽으로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서문」에서 책을 내게 된 경위나 글들을 가르고 묶은 원칙을 밝혔다면 그 비결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각 장 제목인 ‘말言, 마음에 새기는 것’, ‘글文, 지지 않는 꽃’, ‘행行, 살아 있다는 증거’에 어울리는 글끼리 모았나 싶어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성격이 비슷한 글들이라 그렇게 구분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그렇다면 멋진 장 제목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글을 작성한 시기에 따라 묶는 것도 한 방법일 텐데, 같은 영화를 다룬 글들이 앞뒤에 나뉘어 실려 있거나 시점이 명확한 소재들의 시간 순서가 뒤얽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아니다. 다만, 글의 완성도는 뒤로 갈수록 확실히 떨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글이 잘된 순서로 줄을 세운 뒤 세 개의 장이 물리적 균형을 이루도록 세심하게 분량 조정을 한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지는 저자만이 알 일이다.
물론 저자의 섬세함은 일상의 장면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데에서 가장 돋보인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몸뚱어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기 마련”(「우주만 한 사연」, p.63)이라고 믿는 저자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장면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모습을 관찰해 사연을 알아내고, 관련된 기억을 되살려 사연의 의미를 음미하고, 그로부터 삶에 관한 깨달음을 이끌어 낸다. 하나같이 주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잠언 같은 깨달음들이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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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문」에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문장과 문장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적당히 뜨거운 음식을 먹듯 찬찬히 곱씹어 읽어”(p.9) 달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이 책을 그렇게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디자인으로 여러 감속장치들을 마련해 두었건만, 이 책은 쾌속으로 읽힌다. 글은 짧고, 문장은 쉽고, 멈추어 의미를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은 거의 없다. 스윽 읽어가다가 좋아 보이는 문장에 밑줄을 치면 끝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읽어야 앞서 말한 이 책의 장점들이 살아난다고 할까. 저자의 부탁대로 찬찬히 곱씹어 읽다 보면 ‘섬세함’보다는 거친 면이랄까 ‘무심함’이 도드라지니, 이 일을 어쩌랴!
우선, ‘언어의 온도’를 따질 만한 자격을 못 갖춘 언어들이 너무 많다. 필요 없거나 적절치 않은 수식어, 감정 과잉 수식어, 진부한 비유, 장난스러운 표현, 요령부득인 문장, 공연히 멋 부린 문장 따위인데, 1장에서는 그나마 덜하지만 2장 이후에 부쩍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아래에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둔다.
- 거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그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다.(p.34)
√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온다고?
- 그러면서 녀석은 “괜찮아요. 곧 잊을 테죠…”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전두엽이 잘려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p.42)
√ ‘전두엽이 잘려나간 사람’이라……. 표현 의도는 알겠지만 좋은 비유는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라는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다.
- 매장 안에서 한 아이가 우사인 볼트로 빙의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p.51)
- 기차 속도에 비례해서 그의 목소리 데시벨도 줄기차게 상승했다. 사내의 입에 ‘부부젤라’ 같은 응원 도구를 이식해 목소리를 증폭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p.89)
- 참, ‘우메레’와 심형래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공상과학 코믹 액션 판타지 블록버스터인 ‘우뢰매’를 혼동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설마.(p.171)
- 이 장면에서 난 “오, 맷가이버맷 데이먼+맥가이버”라고 외칠 뻔했다.(p.172)
- 어머니는 구차한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살포시 창밖을 응시했다.(p.225)
√ ‘구차한’, ‘살포시’ 모두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이다.
- 기억의 속성은 머리가 둘 달린 야누스처럼 이중적이다. 진한 기억은 가깝고 흐릿한 기억은 멀다.(p.261)
√ 야누스는 얼굴이 둘이다. 진한 기억이 가깝고 흐릿한 기억이 먼 것은 ‘이중적’인 것이 아니다.
- 한 남성이 욕신辱神으로 빙의를 했는지 동물 명칭과 숫자 등을 창의적으로 조합해서 친구의 이름을 격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 콧물도 심했다.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두통은 더했다. 섬세한 성격의 국가대표 사격 선수가 내 오른쪽 관자놀이를 과녁으로 삼아 날카로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한 놈만 팬다”는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명대사가 떠올랐다.(pp.290~291)
√ 종합선물 세트 같은 예문. 그나저나 국가대표 사격 선수가 왜 바늘로?
- 조금 과장하면, 꽃 한 송이가 내 가슴에 들어와 정중동靜中動의 요소가 잘 어우러진 한 편의 춤사위를 펼친 셈이다.(p.305)
- 공연히 축제의 수준 탓만 했다는 생각에, 돌연 얼굴이 달아올랐다. 체온이 0.5도 정도 상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p.306)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쩌면 아래의 예를 드는 것만으로도 족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입은 벌리지 않았지만 귀는 더 크게 열었다. 어르신이 내뱉은 문장과 내쉰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사연과 한숨에는 회한과 슬픔과 삶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지금도 어르신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수첩을 볼 때마다 그가 어렵게 내뱉은 한마디를 떠올리곤 한다.”
(「경비 아저씨가 수첩을 쓰는 이유」, p.198, p.199)
앞의 예문들에 나오는 ‘어르신’은 저자에게 귀를 더 크게 열어야 할 만큼 소중한 깨달음을 전하는 분이다. 그분이 ‘내뱉은’ 문장이라……. ‘내뱉다’의 뜻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섬세한 것은 대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민합니다.”라고 한 책에서 두 번(p.7, p.151)이나 강조하는 저자의 언어감각이 이때만 무뎌진 걸까. 앞의 ‘내뱉은’들의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인가?
사소한 실수일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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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겐 이름이 없다. 영화나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은 이름이 있고, 출처를 밝힌 인용문의 원작자에게는 이름이 있고, 유명 인사나 신문 기사의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있지만, 정작 저자가 일상에서 마주친 장면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무명씨이다. 그냥 어떤 할머니와 손자, 나이 지긋한 의사, 어떤 노부부, 주지 스님인 듯한 어떤 스님, 어떤 어르신, 어떤 후배, 어떤 친구, 어떤 경비 아저씨, 어떤 선배, …… 들이다. 친구 A와 친구 J는 좀 대우해 준 것 같지만, 그래 본들 ‘행인 1’ ‘관객 2’와 다를 바가 없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밝히자면 딱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기주’가 여섯 번(p.79, p.101, p.103, p.149, p.191, p.222), ‘영희’가 한 번(p.226)이다. 그나마 ‘영희’는 어머니와 친구 분의 만남 자리에서 감탄사(“영희야!”)인 호칭으로 쓰였고, ‘(이)기주’는 저자 이름이니……. “이름을 부르는 일은 숭고하다./숭고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이름을 부르는 일」, p.279)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가 왜 이토록 사람들의 이름에 무심한 것일까?
이유를 대자면 몇 가지 꼽을 수야 있겠다. 우연히 관찰하게 된 장면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 만나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게 다인 사람들에게 이름을 묻는다면 실례가 될 터이다. 친구나 선후배들은?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려고 그러지 않았을까? 다 설득력 있는 설명 논리다.
하지만, 애초에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저자가 등장인물의 이름에 무심한 것은 집필 전략의 필연적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글들은 짧다. 가장 긴 글 두 편이 띄어쓰기 포함해 2,000자를 조금 넘고, 가장 짧은 글(「타인의 불행」)은 70자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부분이 800~1,000자이다. 다시 말해, 가장 흔한 신국판 책으로 치면 1.5쪽도 안 된다. 이미 여섯 권의 책을 낸 저자의 문장 호흡이 워낙 짧아서 그렇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 정도 길이가 요즘 독자의 독서 호흡에 맞는다고 판단해서 짧게 썼으리라고 보아야 할 터이다. 집필 동기나 방법에 관한 정보가 책에 전혀 없으니 저자가 아니고서야 모를 노릇이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짐작할 수 있다. 그 짧은 글 안에서 장면을 제시하고 의미를 음미하고 깨달음까지 전하려면 등장인물에게 이름을 주면 안 된다. 아니,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이름을 얻는 순간, 그 인물은 개성을 가진 존재, 캐릭터가 된다. 캐릭터는 성격, 관계, 살아가는 공간 등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독자가 그가 등장하는 이유와 맥락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유명 인사나 예술 작품 속 인물, 신문 기사의 주인공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필요한 정보가 이미 공유된 존재들이고, 따라서 그냥 등장해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무명씨로 등장해서 저자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따름이다.
저자와 등장인물 사이에 인간적 교류가 거의 없는 것도, 있다 한들 서로 두세 마디 주고받는 데 그치는 것도 그러니 당연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저자는 장면 밖 관찰자로 머물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이끌어 내 줄 질문을 던질 뿐이다. 저자는 이런저런 등장인물의 말이나 질문에 대한 답변, 책ㆍ영화ㆍ신문 기사 등에서 보고들은 말들을 깨달음의 문장으로 갈무리한다. 아니면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의 의미를 음미해 자기 나름의 깨달음을 문장으로 정리해 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주요 기능은 말 또는 앞으로 말이 될 소재(사연, 행동, 사건 등)를 전달하는 것이고, 그 점에서 그들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 존재라기보다 말이나 말의 소재가 지나는 통로, 즉 ‘미디어’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몰개성의 존재인 미디어에 대해 세심하게 인간적 예의를 갖추기를 바라는 것은 독자의 과욕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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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전략과 관련해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 모델은 ‘으응?―호오!―아하!!’로 요약될 수 있을 법하다.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장면을 보여 주고, 독자의 예상과 다른 말이나 행동을 제시한 다음, 그로부터 인생에 관한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SNS에서 자주 인용되는 첫 번째 글의 지하철 장면에서, 아픈 손자가 걱정해 주는 할머니에게(보통은 그 반대일 텐데)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라고 묻는다. 상식적인 대답 몇 가지를 떠올린 저자는 “나의 어설픈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고 실토한다. 할머니의 대답은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깨달음의 문장.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더 아픈 사람」, pp.18~19)
실은, 이 3단계 글쓰기 모델은 대중적 글쓰기의 정석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게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고, 그 장면에서 일반적 예상이 철저하게 빗나갈 만한 말과 행동을 접하기는 더 어렵고, 그로부터 깨달음의 문장을 얻는 일은 충분한 음미 과정을 거쳐 사후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미 책을 여러 권 내 본 저자도 그 어려움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이다. 글이 짧으니 더 어렵다. 그래도 3단계 모델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일상의 장면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한다는 이 책의 콘셉트가 그 모델을 요구하니까. 그렇다면 돌파구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여러 경로를 통해 인상적 장면을 수집한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깨달음의 문장을 수집하거나 자기 나름의 깨달음을 문장으로 정리해 둔다. 그러다가 괜찮은 연결고리가 떠오르면 둘을 이어서 한 편의 글로 완성하는 것이다. 물론, 깨달음의 문장을 만지작거리면서 수집해 둔 장면을 그에 어울리게 손보고 적당한 연결고리를 지어내기도 한다.(그 역도 가능하다.)
이 책은 그 고심참담과 고투의 산물이다. 결과는? 완성도가 천차만별인 글들의 집합이다. 모델을 비교적 잘 구현한 글이 있는가 하면, 한 단계 또는 두 단계를 생략하거나 미진한 대로 넘어가는 식으로 절충하는 데 그친 글도 있다. 물론, 애초에 모델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 글도 꽤 있다. 이질적인 글, 단순한 감상문이나 메모에 가까운 글 들인데 뒤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글들은 주로 장면과 깨달음을 사후에 조합하는 방식으로 쓴 듯하다. 저자의 독특한 언어 습관이랄까 표현법에서 그 판단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이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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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유의 단어나 표현들이 이 책에서는 꽤 자주 등장한다. ‘불현듯’, ‘돌연(히)’, ‘별안간’, ‘문득’, ‘느닷없이’, ‘순간’, ‘(~하려는) 찰나’, ‘슬그머니’ 따위인데, 총 15회 쓰였다. 물론 ‘조합 기능’을 가진 것만 헤아리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순간, 교통사고 현장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껴안던 모습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게 눈앞에 펼쳐졌다./난 무릎을 탁 쳤다.(p.39)
-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글귀가 있었다. …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pp.109~110)
- 별안간 김중식 시인의 ‘완전무장’이라는 시가 내 뇌리를 뜨겁게 달구었다.(p.131)
- 느닷없이 ‘기다림’이란 낱말과 함께 황지우 시인의 시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p.162)
-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 찰나, 한동안 잊고 지낸 기억이 머릿속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렁였다.(p.195)
- 별안간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p.230)
- 불현듯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p.263)
대표적인 사례는 마지막 글에서 찾을 수 있다.
- 불현듯, 전에 영화를 보다가 몸에 소름이 쫙 돋아서 책 귀퉁이에 적어 놓았던 대사 한 줄이 떠올랐다./순간 그 짧은 문장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운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입을 벌려 또박또박 발음했다./“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아름다운 걸 아름답다 느낄 때」, p.306)
예문들에서 보다시피, ‘불현듯’ 유의 어휘와 표현들은 장면과 기억, 장면과 깨달음, 기억과 깨달음을 이어 주는 장치다. 짧은 글에서 효율적으로 짜임새를 높여 주는 데다, 마치 느닷없이 영감이 폭발하는 순간 같은 분위기마저 더해 주니 금상첨화다. 다만, 역시 과유불급이라고, 그렇게 소환되는 장면이나 기억, 깨달음의 중요성을 스스로 강조하는 표현을 남발하는 것은 좀 볼썽사납다. 그냥 별안간 생각이 떠올랐다고 하면 될 것을 “생각에 휩싸였다” “뇌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기억이 머릿속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렁였다”이고,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무릎을 탁 쳤다”이고, 궁금증은 “치밀어 올랐다”이다. 그 순간에 떠올린 영화 대사 한 줄은 “몸에 소름이 쫙 돋아서 책 귀퉁이에 적어 놓았던” 것이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문장이다. 혹시 독자가 조합이 부자연스럽다거나 필연성이 약하다는 인상을 받을까 봐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으나, 글을 읽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일기 같은 사적인 글쓰기라면 모를까, 공적인 글쓰기에서 과장된 감정 표현이나 깨달음의 중요성을 직접 강조하는 표현은 자칫 독자에게 저자의 생각을 강요한다는 인상을 주어 오히려 글의 가치나 떨어뜨리기 십상인 금기 사항이다.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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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호오!―아하!!’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글들은 오히려 그래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앞에서 예로 든 「더 아픈 사람」만 해도 그렇다. 있을 법하면서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다. 손자가 할머니에게 그렇게 물을 것 같지 않고, 할머니가 손자에게 그렇게 답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깨달음의 문장이라니……. 괜한 트집 잡기일까?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대학 시절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틈 그리고 튼튼함」(p.26)에서: 농활농촌 봉사 활동 갔다가 우연히 들른 작은 사찰에서 마당 한가운데 있는 오래돼 보이는 석탑을 보며 저자는 ‘몇 살쯤 됐을까?’ 속으로 궁금해 한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주지 스님인 듯한 이가 등 뒤에서 “얼마나 됐을 것 같나?” 묻더니, “이곳에 있는 석물石物들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궁금증을 풀어 준 뒤, “이런 탑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라고 오래가는 것의 비결을 알려 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자는 완벽을 기하다가 틀어진 지난 관계들을 반추하고, “틈은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 오래전 기억을 다룬 짧은 글 「길가의 꽃」(p.48)에서: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동료가 회사 앞 화단에 핀 꽃을 보고 “예쁜데. 우리 조금만 꺾어 갈까?” 하며 손을 뻗는다. 경비 아저씨가 끼어들어 꺾지 말고 “그냥 지나가며 보도록 하게.”라고 만류한다. 왜냐고 묻는 우리에게 아저씨는 “주변 풍경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은 반감될 걸세.”라며 “책상 위에 올려놓는 꽃은 지금 보는 꽃과 다를 걸세.”라는 깨달음의 말씀을 전한다.
- 집 근처 타이어 전문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마모의 흔적」(p.73)에서: 타이어를 갈러 그곳에 들른 저자가 불현듯 궁금증이 떠올라 실례를 무릅쓰고 엔지니어에게 “타이어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라고 묻더니, 이어서 “그러니까, 타이어가 운전자랑 닮았다거나, 뭐 그런….”이라고 부연한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엔지니어는 “네, 타이어의 마모磨耗 상태에 따라 고객의 운전 습관이나 성향을 미루어 짐작하곤 해요.” 하며 맞장구를 치더니,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tired 게 타이어”라서 다들 ‘타이어’라고 부른다고 덧붙인다. 타이어를 교체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청년의 말을 되씹어 음미하던 저자는 “청년의 증언처럼, 사람 성격은 아주 사소한 데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건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고 즉흥적으로 변조變造할 수도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고, “이러한 이치는 우리네 일상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삼라만상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보편성에 관한 성찰을 거쳐,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떤가? 너무도 일상적인 장면에서 참으로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잘 짜인 각본처럼 박자가 딱딱 맞는다. 말투마저 문어체에 가까워 마치 연극 대사를 듣는 듯하다. 대화 상황은 아니지만 다음 글도 덜할 게 없다.
- ‘사랑의 어원’을 소재로 한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p.119)에서: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던 저자가 실수로 ‘삶’을 친다. 그러고는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사람ㆍ사랑ㆍ삶이 모두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했다는 몇몇 언어학자의 주장을 디딤돌 삼아,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굳이 실수할 것도 없고, 슬며시 받침을 바꿀 것도 없고, 은밀하게 모음을 뺄 것도 없다. “‘사람’에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세 단어의 친연성에 관한 ‘새삼스러운’ 발견의 빛이 바랠 터. 그렇게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직진이다. 세 단어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했다는 주장이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론의 깨달음을 강화해 줄 그럴듯한 근거로서, 그런 주장을 하는 언어학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가져다 쓸 따름이다.(어차피 논리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어원이 같다고 해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저자의 고심참담과 고투를 상찬해 마땅하거늘, 잘되었다는 글마저 ‘억지 춘향’ 같아 마냥 칭찬만 할 수 없다고 이렇게 토를 달고 있노라니, 이야말로 ‘트집쟁이’의 전형이 아닌가 싶어 문득 스스로 민망해진다. 한 권의 책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아닌가? 어떤 식으로 글을 썼든 독자가 받아들일 만하면 그만 아닌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장면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주는 위안으로 마음의 온도가 0.5도쯤 상승해 독자가 살아갈 기운을 더하게 되었다면, 이 책은 제 할 일을 다한 것 아닐까?
다 타당한 질문이고,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
이 책의 고갱이라 할 그 ‘깨달음’이란 것이 또한 수상하다.
우선, 깨달음을 밑받침하는 근거들이 석연치 않을 때가 많다. 잘못된 어원과 해석, 인용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사례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들어 보자.
- ‘피곤한(tired)’에서 ‘타이어(tire)’로, ‘타이어’에서 삼라만상의 ‘본질’로(「마모의 흔적」, pp.73~74)
→ 앞에서 이미 살펴본 이 글에서 엔지니어는 “원래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러버 휠rubber wheel이었다고 해요. 고무바퀴라는 뜻이죠.”라고 만만치 않은 지식을 과시한 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타이어’라고 불러요. 왜일까요.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tired 게 타이어라는 거죠.”라고 ‘타이어’의 어원에 관한 속설을 전한다. 저자는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고 “아하, 재미있네요.”라고 웃어넘기지만, 엔지니어의 말을 곱씹어 음미한 뒤에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 이 책 발간 이전에 이미 두 단어의 형태적 유사성에서 어원 관계를 추론하는 속설이 있었고, 인터넷에서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쓴 기사(《매일경제》, 2014. 5. 19.)까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백과사전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는 수고를 조금만 들이면 알게 되다시피, 속설은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다. 원래 타이어의 정식 명칭이 러버 휠인 것도 아니다. 최초의 ‘타이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철제 링’이었다. 엔지니어의 말은 전문 지식인 양 독자를 현혹하는 가짜 정보인데, 공교롭게도(?) 저자가 하고 싶은 말에는 이쪽이 더 어울린다. 변하지 않는 본질을 논하기에는 마모가 덜한 철보다 고무 쪽이 더 나은 것이다. 겉보기에 저자는 그에 대해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설을 숨은 전제로 해서 본질에 대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때, 그릇된 전제를 바탕으로 도출한 결론은 타당한가? 혹시 누군가가 문제 삼는다면, 저자는 그 엔지니어를 탓할 텐가?(아니, 애초에 ‘엔지니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에서 ‘사랑의 힘’에 관한 깨달음으로(「애지욕기생」, p.110)
→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게 된 한 여성이 병상에 있는 남편과 하는 전화 통화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된 저자는 “당신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인 것 같아요. 나도 당신 덕분에 버티고 있나 봐요.”라는 여인의 말에, “환자 보호자가 환자 덕분에 버틴다니, 무슨 말이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번쩍하고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라는 글귀를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이 말을 통해, 녹록지 않은 삶을 버텨 내게 해 주는 ‘사랑의 힘’을 깨닫는다.
√ 이 구절을 이 책처럼 풀면서 사랑에 관해 논하는 글 역시 예전부터 인터넷에 적잖이 떠돌았다. 이 책 출간 후에는 『언어의 온도』에서 보았다며 저자의 풀이(?)를 인용한 글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풀이도 틀렸고, 인용하는 방식도 적절하지 않다. 인터넷에서도 비교적 정확한 해석(“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살아가기를 바란다.”)을 찾을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쪽을 버리고 애매한 해석 쪽을 택했다.
출전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궁금한데, 『논어(論語)』 「안연(顏淵)」 편에 나온다. 맥락에 충실하자면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은 짝을 이루는 ‘오지욕기사(惡之欲其死)’와 함께 써야 한다. 덕을 숭상하고 의혹을 분별하는 방법을 묻는 자장(子張)에게, 공자는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며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면서 또 죽기를 바라니, 이것이 바로 의혹이다(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라고 답한다. 사람을 미혹케 하는 사례를 든 것이지, 따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힘’ 따위를 논하려던 게 결코 아니다. 하기는 풀이와 맥락에 맞게 이 구절을 인용한다면, 이 책의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은 애초에 태어날 수 없었겠다.
- ‘이름 명(名)’에서 ‘이름을 부르는 일의 숭고함’으로(「이름을 부르는 일」, pp.277~278)
→ 사무실 근처의 카페를 찾은 저자는 한 남성이 온갖 욕을 하면서 친구의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는 것을 듣는다. “이름을 뜻하는 한자 명名이 저녁 석夕 밑에 입 구口를 받친 구조”임을 아는 저자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인류의 생활 방식이 수렵과 채집에서 유목과 농경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 저녁, 온종일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캄캄한 밤夕에 굶주린 채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입口을 벌려 목 놓아 외치는 것이 바로 이름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 “이름을 부르는 일은 숭고하다./숭고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 예컨대 이름 명(名)을 저녁 석(夕)과 입 구(口)로 쪼개는 것이 파자(破字)인데, 그럴듯해 보여도 그 한자의 원래 쓰임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세계적인 한문학자이자 한자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는 『漢字의 世界』(솔출판사, 2008)에서 “名의 상부는 夕이 아니라 제사지낼 때 쓰는 고기의 모양”이고 名의 아래는 ‘축문(祝文)’을 의미한다면서, “名도 또 제사 고기를 바치고 축문을 아뢰어서 이름을 지어 붙이는 의례를 행한다는 의미의 문자”라고 결론짓는다.(앞의 책, p.64) 시라카와의 말이 맞는다면, 전제가 처음부터 잘못된 셈이다.(게다가, 저녁 석夕도 슬그머니 “캄캄한 밤夕”으로 바꿔 놓았다.) 또,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유지만, 결론에서 상상을 슬그머니 기정사실화하는 것도 문제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는 일은 숭고하다.”가 독립된 주장(의견)으로서 받아들일 만하더라도, 앞의 두 근거의 논리적 귀결일 수는 없다.
이 밖에도 “동사 알다知가 알卵에서 파생했다고 한다.”(「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p.69)나 “‘글’이 동사 ‘긁다’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긁다, 글, 그리움」, p.115)처럼 진위가 의심스러운 어원을 제시하고 글을 전개하는 경우가 몇 군데 더 있지만, 저자도 아닌 터에, 사실 관계 확인은 이제 그만두려 한다. 다만, 처음에는 일설(一說)이 그렇다는 식으로 얘기한 다음에 슬그머니 그것이 사실인 양 전제하고서 그로부터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식의 글쓰기 습관은 고치는 게 좋겠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고, 다툼의 소지가 있는 경우 그렇다고 밝히거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공적인 글쓰기에서 상식에 속한다. 그런 노력을 소홀히 하면 결론(깨달음)의 타당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
타당성은 둘째 치고 ‘깨달음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하지만 안 그럴 수 없는 것이, 이 책에는 인용과 자기표현의 경계가 모호한 대목이 너무 많다. 인용 처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생각해 봄직한 출처와 함께 아래에 소개해 둔다.
-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더 아픈 사람」, p.18)
√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호되게 아파 본 사람이다.”(이현승, <병간>, 《현대시학》 2013년 3월호) “아픈 손이 아픈 손끼리 마주 잡는다/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끼리 손이 겹친다”라는 허영자 시인의 시구(<아픈 손끼리>)도 문득 떠오른다.
- 몇몇 작가들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라고.(「당신은 5월을 닮았군요」, p.40)
√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으나 패배하진 않는다”고 했고 어느 작가는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읊조렸다.
√ “인생이란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다.”(피천득, 『수필』)
-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링거 주사를 맞는 동안 핏기 없는 입술을 겨우 벌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련어머니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사람을 살찌우는 일」, p.126)
√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박후기, <꽃기침>)
-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다.(「행복한 사전」, p.148)
√ “누구나 가슴 속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누구는 일찍 알았고 누구는 늦게 알았을 뿐, 누구는 지금 바다를 보고 있고 누구는 잠깐 고개를 숙였고 누구는 바다를 잠시 잊었을 뿐, 누구나 가슴 속에는 때 묻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아득한 파도 소리에 햇살이 눈부신 푸른 바다가 있다.”(오병욱, 「누구나 가슴 속에는」, 『빨간 양철 지붕 아래서』, 뜨인돌, 2005)
- 기다림은 무엇인가./어쩌면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시간의 공백 메우기」, p.162)
√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부정을 희망이라는 긍정으로 바꿔 나가면 곤궁함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입니다.”(민중가수 이지상 인터뷰 중에서, 《민중의 소리》, 2006년 7월 9일)
- 어떤 유명한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더군.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성 간의 사랑은 그 가운데 가장 배타적이라고. 어쩌면 사랑이 두 사람을 단위로 한 이기주의일 수도 있다고.(「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p.229)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내용이다. 같은 글의 “별안간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상대보다 앞서 걸으며 손목을 끌어당기는 사랑도 가치가 있지만, 한 발 한 발 보조를 맞춰가며 뒤에서 따라가는 사랑이야말로 애틋하기 그지없다고. 아름답다고.”라는 대목에서는 함민복 시인의 <부부>라는 시가 별안간 떠오르기도 한다.
- 어느 책에서 이 얘기를 읽고는 내 분노가 훑고 지나간 스키드 마크를 되짚어 보았다.(「분노를 대하는 방법」, p.232)
√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의 현명한 분노 다루기 방법을 소개한 후, 어느 책에서 그것을 읽었다고 하는 문장이다. 출전은 김정운의 『노는 만큼 성공한다』(21세기북스, 2011)가 아닐까?(2부 5장 다섯 번째 글이 「에스키모의 막대기를 꽂자!」이다.)
-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아름다운 걸 아름답다 느낄 때」, p.306)
√ 이 인용문의 네 번째 앞 문장에서 “전에 영화를 보다가… 책 귀퉁이에 적어 놓았던 대사”라고 출처를 언급해 두었는데, 두 문장 사이의 거리가 멀어 이 문장이 그 대사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참, 이 책에서는 이처럼 출처와 인용문 사이를 띄워서 그것이 인용문임을 잊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영화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사치코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이유가 뭘까? 아예 인용에 관한 언급조차 없는 문장은 저자가 우연히 들은 말, 저자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인용임을 저자 스스로 인식하고 있을 때조차 왜 “몇몇 작가들”이고 “어느 작가”고 “어느 시인”이고 “어떤 유명한 사회심리학자”고 “어느 책”이고 “전에 (본) 영화”인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잘 아는 섬세한 심성의 소유자인 저자가 인용문의 출처를 대충 기억하거나 아예 기억 못 할 리 없을 텐데……. 학술서도 아니고 에세이집에서 그 정도는 허용될 만하다고 판단한 걸까? 원문대로 인용할 때에는 출처를 분명히 밝혀야 하지만, 표현을 조금 바꾼 경우에는 안 그래도 된다고 보는 걸까? 그냥 SNS에서 떠도는 말들을 가져다 쓰면서 출처를 확인하지 않은 건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등장인물들 이름에 무심한 것처럼 단순한 글쓰기 버릇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는 심각하다. 이 책에서 나온 문장들이 SNS 세상을 풍미하고 있다.(예컨대 ‘#언어의온도’로 검색한 인스타그램 게시물만 해도 8만 개가 넘는다.) 그중 상당수가 이 책의 백미인 ‘깨달음’의 문장들이다. 그중 또 상당수가 인용문과 관계가 깊다. 그런데, 충분히 예상되다시피, 그 수많은 재인용문들에 “몇몇 작가들” “어느 작가” “어느 시인” “어떤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어느 책” ‘어떤 영화’의 자리는 없다. 인용문에서 도출된, 때로는 인용문 자체이기도 한 깨달음의 문장들은 거두절미하고 “이기주, 『언어의 온도』에서”로 출처가 표기된다. 이때 그 깨달음은 누구의 것인가?(더 나아가, 인용과 무관해 보이는 다른 깨달음들은 과연 저자의 것인가?) 인용문의 원작자로서는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만한 상황이다. 혹시 그렇게 출판 윤리 문제가 불거진다면 어쩌려는 걸까? “이기주, 『언어의 온도』에서”라고 착실하게 출처를 밝힌 독자들에게 책임을 넘길 수야 없을 테고, 미흡하나마 그것이 인용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눙칠 심산일까?
하……
*
그 결과가 정확히 계산한 바라면? 저자가 바란 바가 정확히 “이기주, 『언어의 온도』에서”만 남기는 것이었다면?
이 글은 한 권의 책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를 밝히려고 쓴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한 권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주는지를, 다시 말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가진 고유한 힘이 무엇인지를 내재적 분석을 통해 발견하려는 글이었다. 그래서 찬찬히 곱씹어 가며 읽었고, 진지하게 읽었다. 결론은? ‘어떻게 이런 책이……?’였다. 디자인과 제목, 누구 것인지 불분명한 몇몇 깨달음의 문장을 빼고는 평가할 만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디자인과 제목이 잘된 책, 그 정도 수준의 깨달음을 담은 책이 많은 터에, 그런 요소들로 이 책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시 ‘어떻게’의 문제였던가?
아니, 이 글을 쓴 B급 편집자가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저자가 상정한 독자는 B급 편집자가 아니었다. 책의 만듦새로 보면,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 그의 타깃이었을 터이다.
“대한민국의 소비 시장에 컨셉러(컨셉+er, 컨셉을 중시하는 소비자라는 의미의 신조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직관적인 미학, 순간적인 느낌, 가볍고 헐거운 컨셉에 빠르게 반응한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콘텐츠에 열광하고 이성적인 이해보다 감성적인 공감을 선호한다. 이러한 모든 컨셉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당연히 내가 가장 돋보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에게 맞는 컨셉을 잡고 그에 맞는 아이템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19』, 미래의창, 2018)
저자는 이 새로운 유형의 독자들에게 딱 맞는 글쓰기 모델을 제대로 적용한 책을 완성했다.(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한 콘텐츠 유통ㆍ소비 채널인 SNS를 통해 끈질기게 그들과 소통함으로써 대형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다.) B급 편집자가 무심하다고 눈 흘긴, 지금까지 살펴본 이 책의 흠결들은 사실은 성공 요인들이었다. “직관적인 미학, 순간적인 느낌, 가볍고 헐거운 컨셉”,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콘텐츠”, “이성적인 이해보다 감성적인 공감”…….
저자는 세심하게 성공 전략을 완수했고, ‘이성’ ‘논리’ ‘깊이’ ‘진지함’ 따위로 무장한 B급 편집자의 화살은 빗나갔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독자—결국 자기와 같은 독자—는 여러 독자 유형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독자인가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미 주류가 되었을 새로운 유형의 독자를 눈앞에 두고, 그는 다음 질문들을 찬찬히 곱씹어 음미해야 할 터이다.
“진지한 글쓰기와 읽기는 아직도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누구와 함께, 어떻게?”
『언어의 온도』를 읽는 내내, 편집자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이렇게 많은 흠들을 어떻게 보아 넘길 수 있었을까? 판권 면을 보니, “편집자|이기주”이다. 역시……, 그렇군. 처음에는 “발행인|이기주”였는데, 중간에 바뀌었다. 이 또한 저자 이기주의 의도를 충실히 구현한 편집자 이기주의 자부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본 저자의 사진이 다시 떠오른다. A급 편집자로서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텅 빈 객석, 이미 텅 빈 지 오래인 객석. B급 편집자의 ‘의문의 1패’와 더불어 그의 모노드라마는 쓸쓸히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