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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새우
김광규 지음 / 답게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그리움의 돛배 한 척 띄우다
-김광규 시집 <환생한 새우>를 읽고-

김우출
최근에는 저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시집을 사 본 기억도 희미하고 어쩌다 샀다고 하더라도 한 권을 끝까지 읽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환생한 새우>라는 제목을 붙인 시집 한 권을 받았습니다. 물론 저자이신 김광규 선생님을 조금 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단숨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평소에 시를 쓰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호기심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내용도 크게 어렵지 않고 평이(平易)한 문체여서 쉽게 읽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느낀 개인적인 첫 감정은 우선 ‘사이비 난해시(似而非 難解詩)’가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요즘과 같은 출판물의 홍수 시대에 무작정 쏟아내고 있는 시 같지 않은 시를 담은 시집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지요. 한 마디로 지적 허영에 빠진 유한마담들의 시는 ‘치열함’이 없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에 가장 먼저 제 눈에 띈 시는 ‘환생한 새우, 게, 반전(反轉)’ 이 세 편이었지요. ‘환생한 새우’ 는 표제작이니 일단 시인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내놓는 시이기가 쉬운 법이라고 생각했고, 저는 그 중에서 내용은 ‘게’, 형식은 ‘반전’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글이라도 ‘무엇을(내용) 어떻게(형식) 썼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겠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게’는 내용이 ‘반전’은 형식이 먼저 눈에 들어오더라는 거지요. 시인께 서평이나 리뷰를 올려달라는 메일을 받고 다시 꼼꼼하게 읽었답니다. 시인의 삶이 시 한 편 한 편에 그대로 묻어 있더군요. 저는 제가 본 김광규 시인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욕망과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 시인은 진솔한 자기 성찰로 일상의 굴욕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는 KBS 뉴스에서 조성훈 기자가 소개한 멘트입니다.
“욕망과 속도가 상징기호로 지배하는 시대이다. 탐욕의 풀무질을 하면서도 한 점 회오조차 같지 않는 시류속에 진솔한 자기성찰로 일상의 굴욕과 모순을 대면하는 것을 보는 것은 종교의 경전만큼이나 고전적으로 느껴진다. 김광규의 시들은, 그가 언제나 자신을 누추하게 만드는 그 모든 삿된 것들을 대면하고 일탈을 꿈꾸나, 그 또한 “하루에 몇 번씩 죽”으면서도 (<다섯 번씩 죽는 조기>)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의 기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못 박힌 고통처럼 일탈하지 못하기에 오히려 형형한 성찰로 가득차서 자기 정화를 하는 순백의 미학이 느껴진다.
그의 시 <톱니바퀴로 도는 우리들>에서 그는 “송곳니뿐인 섬뜩한 이빨로/서로의 살점을 찌르지 않고(도)/정답게 맞물려 지내는 일상/주인과 노예가 누구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톱니바퀴로 도는 우리들>) 살아가는 굴욕을 말하지만, “문득 내 몸속에는 호두알 속같이 부드러운 내가 없음을 알게 되”고(<분노의 호도>), 지금껏 자신을 찾아 헤맨 길이 “메마른 길”임을 깨닫고, “가로수 울며불며 쓰러지려 하는 바람휘몰아치는 날”에도 “빗길을 가”려하고 “빗길에 서”려 (<진흙길을 가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인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고통을 함께하며 나를 정화할 수밖에 없고, 독자들도 그렇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라는 이경희 씨의 해설입니다.
시인 김광규 씨는 문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벽지(僻地)나 오지(奧地)라고 할 만한 청정지역 봉화에서 자신의 순수한 감성과 느낌을 건져 올린 것입니다.
제가 시인 김광규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입니다. 몇 명의 교사 들이 부부 동반하여 자비로 뉴질랜드 관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김광규 시인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인대신에 딸과 딸의 친구를 데리고 함께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그 딸이 지금은 독일에 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호텔에서 흔히 말하는 빠징꼬라고 하는 것을 처음 구경하고 어느 한국 유학생을 만나 10달러씩만 학습해 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날리고 말았는데 김광규 시인에게 코인이 쏟아졌었지요. 그 때 김 시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해맑은 얼굴로 좋아하면서 벼락부자가 된 기분이라고 했지요. 영어 교사인 그는 바로 코인을 돈으로 바꾸고 일행들 전체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렸는지 맥주 한 캔씩을 돌렸는지 그랬었지요.
그런 그의 표정들이 그의 시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봉화 유곡에 가서 알밤 몇 개를 주워오고도 “쌀독에 쌀이 그득해도/청설모의 겨울나기 양식을 갈취한/ 부끄러운 나의 양심.”(<탐욕>)이라고 했고, 자신의 삶을 “색동옷 입고 외발로 선 채/곁길을 넘보지 않고/한곳에만 맴돌아도/현란한 춤”(<팽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도 (<기차 바퀴의 꿈>)에서는 “무료한 대지를 통과할 때마다/조금씩 흔들리는 지축/졸음에 겨운/궹한 눈의 기관사 앞에/끝없는 직선과 곡선의 강이/무섭게 범람하고 있다-(중략)-결코 교차되지 않는/평행의 길/적막의 레일을 구르며/어지럼증에 걸린 바퀴는/탈선을 꿈꾸고 있다.” 이렇게 탈선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고구마를 먹으면서도 목이 메이고(<고구마를 먹으며 목이 메이다>) “아내 몰래 비자금 통장을/고스란히 건네주어도 아깝지 않으리”(<누이가 있으면 좋으련만>)라고 현실에 없는 여동생을 원하는 그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생이/차단기 앞에 가로막힌다.”(<세 사람의 건널목>) 1955년생인 그는 나와 동갑내기입니다. 전후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 세대는 그 당시 우리 부모들이 너무 많이 낳았지요. 중학교 입학 때부터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었고 다 자란 후에는 승진에 힘이 들었습니다. 물론 요즘과 같은 88만원 세대의 취업경쟁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는 우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중년의 쓸쓸함을 다음 시에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훈계가 끝이 나면/각자의 방에 돌아가/안으로 문을 잠그는/포플러 나무로 자란 아이들/말참견이 잦은 아내로 인하여/말은 어둔해지고/뱃살 오른 몸은/거실을 박차고 나가지도 못한 채/어정거릴 따름이다/전신 거울에 비친 상반신/굴욕의 무게에 눌려 균형을 잃은 어깨/검은 서까래처럼/분노도 삭는 것일까/빈 집 조금씩 허물어지듯/삶이 무릎으로 내려 앉아/내 키가 점점 작아진다.”(<중년을 위하여1> 전문)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신사복 매장/읽다가 발아래 내려놓은 책은/낡은 표지의/찰스 디킨즈의 영문판 소설/그것은 한평생 버릴 수 없는/너의 지성이다”(<마네킹1>) 마네킹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읽고 있는 시인은 <게>에서 “항상 곁길로 향한다고/옆으로만 빠진다고 빈정대는 당신/한 평생 앞길로만 갔지/아니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물러났지/아픈 사람이 있는 옆으로/다정하게 다가가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게>전문) 하고 자신을 질타(叱咤)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온몸 구석구석/피가 나도록 할퀸/뾰족한 나의 손톱을 싹둑 잘라/한 평생 무디게 살아가렵니다”(<참회>) 이러한 뼈저린 참회 끝에 도덕 교과서와 같은 <타이어 펑크 나지 말라고>와 같은 미숙한 시를 보여주기도 하는 시인은 드디어 <반전>을 노립니다.
“버스 안의 우리는/우리 속에 갇힌/초라한 동물일 뿐/풀밭 위에 동물들은/게으른 자유를 누린다.”(<반전>) 시인은 아직 실직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재택 근무자인양 착각이 들까봐/인터넷 검색은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실직>) 와 같은 실직의 아픔을 노래하였고, <강물>을 통해서 “이제는 다시/작은 나무 뿌리로/외로움 흔들며 일렁이다가/흰구름 따라갈/그리움의 돛배 한 척 띄워봅니다.(<강물>)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환생한 새우>라는 시집을 감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옥의티를 가려내 보면 <다섯 번씩 죽는 조기>에서 3행에서 4행 넘어갈 때에 “어부의 거물에 잡혀/ 을 거두고”(<다섯 번씩 죽는 조기>) 목적어가 빠진 것 같네요. 교정볼 때 빠트린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