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검색창에 인내심을 넣어봤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마음'이라고 뜬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몸뚱이 어딘가로만 느껴지는 괴로움은 나도 꽤 잘 참는 편이다. 예컨대 그토록 두려워하는 치과 진료도 막상 시작되면 꽤 잘 참는다. 힘껏 벌린 입 속으로 차가운 것들이 침투해 오랫동안 굉음을 내는 순간에도 퍽 의연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도 '금방 끝난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라는 식으로 달래주는 말을 들은 적은 별로 없다. 오히려 아프면 말해라,라는 주문을 들은 기억은 꽤 있다. 치과에서뿐만이 아니다. 뼈에 이상이 생겨서 거동이 불편했을 때를 빼고는 몸살이나 생리통 등의 이유로 결석 혹은 결근을 한 기억이 없다. 손발에 굳은살이 점점 심해지는데도 운동을 계속 가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짜 하나도 안 아프냐는 가벼운 걱정을 듣기도 했고. 미련한 성향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자세가 노예근성보다는 건강 내지는 깡을 더 증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작은 자부심을 느껴본 적마저, 우습지만 분명 있었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눈에 띄게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따로 있다. 안타깝게도 억압이나 불의 같은 건 아니다. 내 세계관을 흔드는 것도 아니며 시민으로서의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없는데, 바로 누군가가 '스튜디어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직면하면 표정의 변화를 어떻게 참아야 할지 아직도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어떻게 참아야 하냐며 누군가에게 실제로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스튜디어스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안 하는 수밖에 없다는 답변을 듣고는 곧 실망했었다. 

잘 안다. 스튜디어스라는 말보다 그런 말에 특정한 반응을 하는 내 성정 자체가 훨씬 더 고약하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제라도 작정하고 스튜디어스에서 좀 자유로워져보려고 한다. 인내심을 발휘하기 힘들다면 급한 대로 꼼수라도 동원할까 한다. 꽤 그럴듯한 방책도 하나 떠올려봤다. 스튜어디스라는 말을 써야 할 것 같은 대화에서는 나부터 나서서 '승무원'이란 단어만 사용하는 거다. 괜찮은 대비책이라며 사실 스스로 조금 대견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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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한 번 본 걸로 끝내면 얼마나 좋아. 왜 자꾸 질척거려. 그리고 당신 기억 안 나? 내 앞에서 린다 얘기는 그쯤 하면 됐다고 얘기한 것 같은데.

유튜브를 시도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것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는지, 급기야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팬픽까지 쓸 기세. 공연이란 게 이렇게 무시무시하다. 기네스랑 폴 라이브 영상이 날 이미 저어기 저 너머로 데려다줘서 그렇다고 일단 둘러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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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낱의 사람을 만나기란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 배우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회사를 '우리'라는 대명사로 칭하거나, 자신의 근황을 알린다고 해놓고 자식의 성장을 중계하는 이들은 이쯤이면 됐다. 내가 재생목록에 추가한 노래, 내가 밑줄그은 문장, 날 식겁하게 한 장면, 내가 요새 잡고 싶은데 못 잡고 있는 홀더, 내가 연습하고 있는 곡, 내가 지은 밥의 맛, 내가 맡은 비 냄새에 대해 조금은 길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나 좀 더 보고 살기로 하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올바른 얘기 혹은 어디선가 주입당한 티가 물씬한 그럴듯한 의견을 들려주는 사람도 지루하니 일단 어디로 좀 치워두기로 한다. 프레시안이나 한겨레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투박한 정견이라 할지라도 나름의 입을 통해 그것이 궤변만은 아님을 최대한 흥미롭게 전달할 줄 아는 개인을 좀 찾아보는 거다. '선생님, 선생님' 잘하는 사람이나 어떤 경계 안쪽에 한 발 걸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치들은 사실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온전히 자기 목소리를 통해 나온 소박한 무엇을 정념없이 내보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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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남은 자의 음악을 라이브로 듣고 있으려니까 한때는 오래도록 남은 자의 윤택함을 쉬운 길을 택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되먹지 않은 시절 지녔던 편견이 떠올라 말도 안 되게 부끄러워지고 만다. 무대를 보고 있노라니 생기는 감흥이 죄다 비현실적이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기운이 어느샌가 사악 스미는데, 내 요 근래 언제 또 이런 온기를 느껴봤나 싶었으니 말이다. 비록 듣고 싶었던 몇 곡을 안 들려줬다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eight days a week도 lady madonna도 live and let die도 들었는데 대체 뭐가 문제겠는가. 


이십 년쯤 들어온 음악을 라이브로 듣고나서 생각해보니 이십년 가까이 읽어온 책은 없다.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책 없이는 살 수 있다. 그것도 얼마든지. 그런데 음악 없이는 아마 사는 게 훨씬 짐스러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짐작하는 바 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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