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은 일반적으로 자기실현Self-realization에 대한 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기실현이란 매우 근대적인 현상 중의 하나로 만약 중세 사람에게 자기실현에 애쓰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는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실현이라는 개념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생각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세계가 불변하는 본질로 구성된 정적인 질서로 간주되는 반면, 근대적 세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근대의 세계는 그 자체로 변화의 모든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신과 같은 외부적 존재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하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근대인의 역할은 이미 주어진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패션:철학> 273~4페이지 중에서




패피라는 줄임말에 기겁을 하는 나라고 해서 옷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비록 '힙'하고 '핫'하다는 트렌드를 알기 위해 잡지나 블로그에서 금쪽같은 팁을 구하고 그로부터 얻은 영감을 다음날 복장에 반영하는 부지런한 부류는 전혀 아니지만, 심지어 그러한 부류는 어쩐지 느끼하다고 느끼는 촌스러움까지도 장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옷차림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인정한다. 내가 올해 에프더블유 시즌을 주도할 컬러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며, 놈코어룩이란 말도 오로지 대화상대를 웃기기 위한 용도로만 써본 처지임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옷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적어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 조금 더 즐거워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옷을 좋아하는 나도 자기실현을 위한 성찰로써 입기를 실행하고 있는 날은 매우 드물다. 반드시 지드래곤 정도나 되어야 옷으로 발언을 할 수 있는 건 아닐진대, 그저 게을렀던 것이다. 이 게으름을 단박에 타파해줄 뭔가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패션:철학>에는 의외로 건질 만한 팁이 있었다. 즉 "패션은 의미를 가진 듯 보이는 매우 다양한 현상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는 상당히 한정된 수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말하자면 패션과 관련된 성찰을 하지 않는 것도 자기 자각을 팽개치는 일에 가깝겠지만, 동시에 "삶의 인도자"로서의 역할 따윈 할 수 없는 패션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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