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이다 -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왕 세종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왕세종.



작년한해 여러가지 트렌드중 하나는 세종대왕이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왕이였던 세종대왕. 만원짜리 지폐에 당당하고 풍채좋고 자애로운 얼굴로 맞이하는 세종대왕. 한글창제라는 가장 위대한 업적을 비롯해 도대체 세종대왕의 어떤면때문에 그 많은 업적들을 달성할수있었는지, 세종대왕은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이였는지 많은 궁금증을 끌어안고 이 책의 첫장을 넘겼다.



태종 이방원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던 세종대왕은 아버지에게 그리 기대받는 아들을 아니였는듯하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관심은 첫째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에게 가있었고 똑똑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능력있는 아들이였지만 셋째라는 타이틀은 그저 왕족으로 한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살아가는 그런 운명에 처인 위치였을뿐이였다.



그러나 충녕대군 즉 세종대왕은 이러한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살아가거나 절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며 태종에게 자신의 학식을 뽐냈고 결국 유교국가의 절대원칙이나 다름없었던 적자계승원칙을 깨고 왕좌에 오를수 있었다.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 태종의 뜻에 따라 정사를 돌보나 태종 승하 후부터는 하나씩 계획했던 일을 실현하기 시작한다. 세종의 시대에 그토록 많은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달성할수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많은 전문가들이 활약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정치, 군사, 과학, 음악등 많은 분야에 전문가를 확보하여 당대 최대의 인재들을 선택해서 실무를 맡겼고 맡긴이상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은 이러한 인재들을 알아보고 등용한 최고의 인사담당자라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인재가 있어도 그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에도 불구하고 노비였던 장영실을 등용하며 그의 과학적 재능을 알아봐주고 뜻을 펼칠수있는 길을 마련해준다. 이외에도 명제상이였던 황희, 왕과 신하의 조율자 맹사성, 원리원칙 주의자 허조, 도승지 안숭선, 기술자 이천, 음악의 박연, 집현전의 신숙주·성삼문등 과연 최고의 인재들이라 할만하다.



또하나.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대로 한글창제와 6진개척이였다. 그러나 이 외에도 유교식 예절과 제사들을 정리하고 또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정립하는 등 자잘하지만 작은 것들을 챙기고 결과가 나올때까지 참고 견디며 먼 훗날을 생각하는 정책들을 시행하는데에서 세종은 진정 조선의 백년지계를 닦은 왕이라 할수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진정 존경할만한 위인이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완벽할수 없다고 했던가. 세종대왕 승하후 자식들사이에서 일어났던 비극과 세종대왕의 좋은 정책들이 계속해서 이어질수없었던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 최고의 왕이자 최고의 위인인 세종대왕은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밀고나가는 고집도 있었지만 때로는 누구보다도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한사람의 말에도 귀기울여주던 민주적인 왕이였으며 유교의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유연하고 또 열린 사고로 생각하던 현명한 왕이였고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군주였다.



" 합(閤)에 있을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책 한 권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에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를 행하고, 다음에 경연에 나가가기를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과 원용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 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았다. 이로써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없이 잘 되었고, 예약(禮藥)의 문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과 역상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다. "

라고 세종의 졸기에 실린 인물평은 적고있다.



세종은 나라가 자라나고, 문화가 자라나고, 사람이 자라날 수 있는 때를 마련했다. 그의 안목은 현재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수백년, 혹은 그 훨씬 너머까지도 뻗어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낸 많은 결과들은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세종은 과거의 왕이되 동시에 미래의 왕이였으며, 그리고 조선, 그 자체이다.



정말 초등학생정도의 발상일지 몰라도 정말 본받고 싶고 닮고싶다. 세종대왕이 위인인 이유는 한글창제의 업적 그 이상을 넘어 세종대왕이 가지고 있는 덕. 끈기, 인내, 노력... 과 같은 덕이 있는 인물이기에 진정한 위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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