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딩의 여덟째 날
리루이 지음, 배도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리루이 <장마딩의 여덟째 날> 삼화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은 참 거창하면서도 단순하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시선을 오로지 내가 속한 곳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사실을 요즘 깨닫기 시작할 때 <26년>이라는 막 개봉된 영화를 보고 들어오면서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런 무관심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중국의 역사속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 더 나아가 문학작품속에서는 '나'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두 가지를 노렸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그것은 신중한 선택이었는지 읽어가면서 의문이 들었다. 전반적인 지식도 없이 이야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함께 수록된 옮긴이 후기와 중국어판 서평까지 읽으며 작품 해석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리루이. 자유로운 문예 창작활동을 통제하는 정치적인 검열과 어용담론에 반대하며 오로지 작품으로만 외로운 싸움을 하는 몇 안되는 중국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장마딩. 그는 고아원에서부터 수도원에 갈때까지 줄곧 바랄로에 살았다. 5년 전 레 꼬르비노 신부를 따라 중국에 왔고, 스승과 같은 선교사가 되는 게 그의 꿈이었다. 꼬르주교는 자신을 따라 나선 지오반니 수사에게 중국식으로 이름을 붙여 준다. 장마딩. 그런 장마딩이 스스로 성당을 떠나 낯선 이국 땅에서 나뒹굴고 있다.

광서 25년. 꼬박 1년 동안 가뭄 끝에 찾아온 1989년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사람 죽이는 가뭄이 계속 되고 있다. 레 꼬르비노 신부는 중국으로 건너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보냈고, 이제는 이 행로가 자신의 육신까지 중국에서 끝나리라는 그런 마음의 다짐을 가지고 중국땅을 다시 밟게 된다. 그러나 하늘어미 강 교구의 하늘바윗골 삼신할미사당은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산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차에 챠오, 친, 가오 라는 성씨를 가진 예순다섯 명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거기에 성당을 지으라고 자신들의 땅 2천 평방미터를 헌납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이 제안을 털컥 물었던 꼬르 주교는 나중에서야 사건의 중심에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삼신할미사당의 대표적인 장텐츠와 시비가 붙고 그 시비끝에 장마딩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장텐츠의 참수로 이야기는 마무리 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장마딩이 깨어났고, 피를 부른 이 사건은 계속되는 복수로 치닫고 만다.

 

"이게 모두 가뭄 때문입니다. 만약 가뭄의 재난이 아니었다면 그런 기우 같은 집회를 하겠습니까? 굶주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고, 아마 그런 충돌도 없었을 겁니다...."

 

"지오반니, 네 말은 잘못됐구나. 그것은 가뭄의 재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p.170

 

이 가련한 여인은,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남편을 잃은 이 여인은, 꽁꽁 얼어서 뻣뻣하게 굳어 버린 원수를 기적처럼 자신의 몸으로 살려 주었다. p.230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과 무력으로 그들을 무너뜨리려는 서양세력 그것도 역사에서 기독교가 그런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에는 참 어려움이 따른다.  성경에서는 신에 의해 7일간 천지창조가 이루어진다. 작가의 의도는 아닐지 모르겠으나 7일간의 날은 신의 영역이라면 나머지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처럼 여덟째날부터는 무엇인가? 거기서부터는 인간에 의한 날이라고 딱 구분하여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통해 각 개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는 각자의 몫에 달려있지 않나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마지막 길에 이교도들을 없애고자 밀어붙인 레 꼬르비노 신부,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밝히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장마딩, 자신이 믿는 삼신할미를 위해 참수를 당한 장텐츠, 그리고 그의 씨를 전파시키고자하는 왕석류. 역자의 말처럼 이들의 모습은 종교적인 맹목성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하여 역사속에서 행해진 참극들은 7일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달리 전달되고 행해졌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미움으로 치닫고 마음의 빗장을 굳게 닫은 채 말이다.  

 

 

쎄쎄쎄! (손뼉을 치며) 높은 산에 올라,

말을 타고 싶지만 안장이 없어요.

쎄쎄쎄! (손뼉을 치며) 큰 강을 건너,

다리를 건너고 싶지만 수레바퀴가 없어요.

쎄쎄쎄! (손뼉을 치며) 밤이 깊으니,

등불을 켜고 싶지만 바람이 불어요.

쎄쎄쎄! (손뼉을 치며) 달이 밝으니,

놀러 나간 아이는 집에 갈 생각이 나요.

-북방동요-

 

등장하는 아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한 마당의 놀이처럼, 그저 전쟁놀이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 현장에서 어른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다. 어릴 때 꿈꿨던 어른의 세상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하루하루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세상을 어른들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는가는 나에게 주어진, 남겨진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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