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믿음 - 인문학으로 푸는 믿음의 공식
이성조 지음 / 두란노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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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푸는 믿음의 공식 [불편한 믿음]

이성조

두란노


경영학과 신학, 그리고 교육과 철학을 넘나들며 대중과 소통하는 그의 글은.. 이라는 책날개 저자의 소개가 눈에 띈다. 저자의 배움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책에서 '불편한 믿음'이라고 하는 믿음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가 경험으로 만난 주님 때문이리라.

대학원에서 상담을 3년 공부하고 깊이 매료되어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상담에 관련된 책을 접해왔었다. 상담자로써 누군가를 공감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 책도 많이 만나 봤는데 내가 정말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걸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믿음의 본질' 아니 '믿음의 현주소'라는 것도 사실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신의 틀에 갇힌 것으로 어떤 대상을,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고 있구나 라는 것을 요즘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두란노 '두포터7기'로 3월~11월까지를 보내면서 한권 한권 만날 때마다 복음이란 것을,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 마지막에 만난 도서가 바로 이 '불편한 믿음'이라는 책이라는 점에서 두란노 출판사에서 출판하시는 책의 기준이 한결같아서 신앙인으로써 당연한 것이지만 매우 탄복했다고 해야할까.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 믿음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시작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의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곳곳의 말씀들을 소개하였기에 그 말씀들 중에도 믿음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큰 귀감이 되어 사진으로 남겨 본다. 또, 이 공식을  영화 '레미제라블'에 대입하여 풀어낸 것이 좀더 빠른 이해로 다가온다.

교회에서 수요, 금요철야, 주일 저녁 예배 등을 이용하여 이 영화를 열번도 더 넘게 보았다. 영화로 만들어졌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잘 만들어진 작품인데다 그 작품이 주는 울림에 볼떄마다 그저 문화 활동으로만 볼수는 없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장발장과 자베르 그리고 미리엘 신부님으로 등장 인물을 축소시켜도 전체 이야기가 들려주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저 위 수학 공식을!

미리엘 신부님이라고 하는 lim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주고자 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본질이리라.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 거저 받은 무한한 은혜가 자베르 라고 하는 사람의 특징으로 귀결된다. 왜 그럴까?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몇시간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이렇게 하면 기도가 응답된다. 교회가 부흥한다는 비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이건 뭔가 아니지 않는가? 내 기도는 요술램프를 문지르며 능력자 지니를 부르는 주문이란 말인가? 믿음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 은헤를 저버린 건지, 아니면 그런 은혜를 처음부터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 것인지 오늘 한국 교회는 아니 오늘의 나는 미리엘 신부님이라는 주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야 할 통로이지만 어느 것은 가로막고, 이것은 아니라고 치우고, 심판하고 있다.

그런 나의 민낯을 경험할 때마다, 나는 솔직히 이런 경우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혼동 할때가 있다. 그리고 세상의 판단이 맞겠지. 복음으로도 이런 해석은 지나친걸꺼야 한다. 많은 자베르가 교회에 존재 한다. 교회 안밖의 장발장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처음부터 그들을 향하여 가시돋힌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 한다. 그리고 내가 더렵혀질까, 아니 또 그와 같은 짓을 할까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그렇게 쌓아가는 것이 어디 해석이라는 틀 뿐이겠는가? 그것이 때로는 돈 일수 있고, 마음 일수도 있고, 나의 시간 일 수도 있다. 마치, 집 나갔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 처럼 말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 이야기에서처럼 임금님은 실은 벗고 있는데 감히 누구도 그 말을 해줄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 나는 믿음있노라 외치는 오늘 나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실은 벌거 벗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그걸 나만 모르고 있다. 꽤나 상황을 잘 파악한 빌립처럼.

주님은 빌립이 아니라 안드레를 기다리신다고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에 모인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12제자들 모두가 같은 마음 아니었겠는가. 때는 다가왔지,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 준비한 것은 없지? 왜 다급한 마음이 그들에게 없었겠는가? 그러나 자베르가 되어서는 그들을 먹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개척 목회 생활 16년을 경험하며 이제서야 내 힘이 빠지며 그동안 주님 앞에 지녀왔던 나의 마음이 혹은 빌립이 아니었을지? 자베르가 아니었을지? 이리저리 비춰 보는 거울이 되었다. 장발장이어야했고, 미리엘 신부님이어야했다.

왜? 내 주님이, 내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셨으므로. 요술램프 지니처럼 불러내는 하나님이 내 능력이 무너지고, lim 라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만 나는 존재하고,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으므로 타인에게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하기에!!!


from. 오렌지 자몽

**두란노에서 두포터 7기에게 무료로 제공되어 읽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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