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접은 페이지
p.41
사회는 나의 같은 소위 경력단절 여성이나 전업주부를 향해 '소비만 있고 생산은 없는 삶'이라고 규정했다. 나름 이해할 거라고 여겼던 주변 사람들도 사직한 나를 위로한답시고 "일 안하고 남편 카드로 살아서 편하겠다."말을 툭툭 내던졌다. 동네 단골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 드리며 안면을 튼 할머니들조차 "아기 엄마는 집에서 노느냐?"거 물었다.
p.56
세계적인 오지 탐험가 텔만은 랑탕을 " 세계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계곡" 이라고 평했다. 나는 자연의 위대함에 순응하는 이들에게만 고유의 매력을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를 체득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p.116
월경통이 심한 것을 굳이 감추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극복해야 할 문제로 여겼지 타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p.138
여성이라는 성별은 삶의 궤적에 영향을 미쳤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국적, 인종 , 성별과 같이 본인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우연하고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요소가 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여성으로서 정체성은 성별이 아니고 '체화된 속성'이라고 말이다. 시몬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p.141
젠더 감수성과 다양성에 취약한 언론 환경은 복잡하고 파편화된 사회와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오히려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 시각을 담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커버링의 압력에 놓인다. 사회가 정한 틀과 기대에 녹아들며 주류에 동화되기를 가요받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대놓고 차별하진 않더라도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 생리나 임신, 출산 등을 티 내지 말 것을 명시적이고 암묵적으로 요구받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p.144
애나 잘 키우면서 애만 키우면 안 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단 말인가. 엄마에게 들이미는 사회의 잣대는 가혹하고 이중적이었다. 엄마 외의 정체성을 내세울라치면 엄마 자격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며 비난을 쏟아냈다.
p.181
한국 여성의 노동 생애에서 나타나는 장기간 경력단절은 특수하다. 주요 선진국에선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 배경에는 성별 임금 격차, 미비한 돌봄 정책, 양육하기 힘든 노동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p.250
히말라야는 '바람 길'이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숨으려고 들면 자꾸 바깥 공기를 불어 넣으면 세상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그렇게 스쳐 지났다가 또다시 찾아든다. 바람은 이제는 나처럼 가벼워져도 된다고. 앞으로 마주할지 모를 상념들도 한들한들 가벼이 삶을 지나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히말라야를 찾아올 때는 젊어진 무게도, 남길 흔적도 바람처럼 가져가라는 당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