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
백운희 지음 / 책구름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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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광고대행사 인턴 시절 카피라이터 수업이 새삼 떠올랐다. 맨 처음 수업으로 기억하는데 뭔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붙었을 때 뭔가 기가 막힌 느낌이 난다는 사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에 나온 두 단어 '엄마', '히말라야'는 적어도 내게 그런 느낌이었다. 두 단어가 붙었을 때 굉장히 생경하다. 왜 그런 느낌이 들어야 하는 걸까? 나 역시도 당장 서울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1박2일 것도 첫날 오후부터 다음날 점심까지 일정을 만들기 위해 나는 남편에게 꽤 정성을 다해(?) 부탁을 하고 협상의 카드를 건네야 한다. 가끔은 '나는 왜?'라는 억울함이 울컥 치솟기도 하지만, 남편 역시 쉽사리 친구와 약속을 안 잡는 것 약속을 잡더라도 꽤 내 눈치를 본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그럼에도 나는 늘 뭔가 모를 억울함이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 이 책의 제목만 봤을 때 그저 '엄마가 자신을 찾아 떠난 히말라야 트래킹 도전기'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단순한 여행 에세이가 아님을 느꼈다. 엄마인 저자가 히말라야를 떠나기 위한 과정 속에서 가정과 사회에 여러 면면들과 부딪히는 장면들 그리고 이 세상의 여자로서 엄마가 되어서 겪었던 불합리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항변하는 모습에 나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나는 아내가 되면서 엄마가 되면서 사회가 좋아하는 모범 답안에 나를 맞추려고 했었구나. 맞지 않는 옷에 몸이 불편하듯 맞지 않는 역할에 나를 숨기려니 자꾸 가슴이 답답해졌나 싶었다. 엄마, 아내 사이를 비집고 그 사이에서 나를 찾겠다고 쭈뼛쭈뼛 고개를 내미려는 것이 내 모습이라면, 작가는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놓고 현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이라면, 히말라야를 다녀오고 판이하게 달라진 개인의 일상이라거나 개인의 위치를 기대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 저자에게는 그러한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눈물이 흘러내렸다. 책 표지에 히말라야인 듯한 산을 향해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 사람이 저자라면, 그 옆에 함께 서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책을 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나를 일깨워준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네팔 히말라야 트래킹 여행기 부분도 참 좋았다. 언젠가 내 체력을 키워서 나도 꼭 홀로 등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로 해외 트래킹은 언감생심이지만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하다니 여행은 정말 묘하다. 늘 메이드 인 네팔 짚모자를 사는 것을 좋아했는데 ㅎㅎ가기 전부터 물욕이 이렇게 솟구쳐 오른다. '랑탕' 저자가 표현하실 자연의 위대함에 순응한 이에게만 고유의 매력을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를 체득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눈으로 직접 꼭 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 전 친정 부모님 왔을 때 각자의 남편의 흉을 봤던 것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 집 와서도 밥해주는 아빠가 같은 연배 남성들 보다 집안일을 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권위적이며 집안일을 나 몰라 한다는 불만과 나 역시도 육아를 할 때 자신의 일이 아닌 마냥 임하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때 엄마에게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 엄마, 아빠랑 오빠가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남자들을 그렇게 하도록 한 거야. 그러니까 애들 때부터 그러지 않도록 잘 가르쳐야겠어." 아들들에게 공평한 세상을 가르치는 일부터 나는 시작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내가 바껴야 할 세상을 향해 실천하는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되기를 바라며...


내가 접은 페이지

p.41

사회는 나의 같은 소위 경력단절 여성이나 전업주부를 향해 '소비만 있고 생산은 없는 삶'이라고 규정했다. 나름 이해할 거라고 여겼던 주변 사람들도 사직한 나를 위로한답시고 "일 안하고 남편 카드로 살아서 편하겠다."말을 툭툭 내던졌다. 동네 단골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 드리며 안면을 튼 할머니들조차 "아기 엄마는 집에서 노느냐?"거 물었다.

p.56

세계적인 오지 탐험가 텔만은 랑탕을 " 세계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계곡" 이라고 평했다. 나는 자연의 위대함에 순응하는 이들에게만 고유의 매력을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를 체득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p.116

월경통이 심한 것을 굳이 감추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극복해야 할 문제로 여겼지 타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p.138

여성이라는 성별은 삶의 궤적에 영향을 미쳤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국적, 인종 , 성별과 같이 본인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우연하고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요소가 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여성으로서 정체성은 성별이 아니고 '체화된 속성'이라고 말이다. 시몬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p.141

젠더 감수성과 다양성에 취약한 언론 환경은 복잡하고 파편화된 사회와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오히려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 시각을 담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커버링의 압력에 놓인다. 사회가 정한 틀과 기대에 녹아들며 주류에 동화되기를 가요받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대놓고 차별하진 않더라도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 생리나 임신, 출산 등을 티 내지 말 것을 명시적이고 암묵적으로 요구받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p.144

애나 잘 키우면서 애만 키우면 안 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단 말인가. 엄마에게 들이미는 사회의 잣대는 가혹하고 이중적이었다. 엄마 외의 정체성을 내세울라치면 엄마 자격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며 비난을 쏟아냈다.

p.181

한국 여성의 노동 생애에서 나타나는 장기간 경력단절은 특수하다. 주요 선진국에선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 배경에는 성별 임금 격차, 미비한 돌봄 정책, 양육하기 힘든 노동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p.250

히말라야는 '바람 길'이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숨으려고 들면 자꾸 바깥 공기를 불어 넣으면 세상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그렇게 스쳐 지났다가 또다시 찾아든다. 바람은 이제는 나처럼 가벼워져도 된다고. 앞으로 마주할지 모를 상념들도 한들한들 가벼이 삶을 지나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히말라야를 찾아올 때는 젊어진 무게도, 남길 흔적도 바람처럼 가져가라는 당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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