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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평점 :
나는 비 오는 날이나 흐린 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꾸물꾸물한 날씨는 내 기분마저 가라앉게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계절도 해가 쨍쨍한 날이 많은 여름이다. 그런 내가 엄마를 잃은 슬픔의 기록인 <애도일기> 책을 펼치게 되었다.
<애도일기>의 저자는 프랑스 최고
지성으로 손꼽히는 롤랑 바르트이다.(난. 잘. 알.못) 하지만 저자 소개에 보면 기호학, 신화학, 문화, 분류학, 패션, 글쓰기, 사진, 독서론
등 전방위적 글쓰기를 했다고 하니 그의 지성을 알만하다. 그런 그가 평생을 함께 한 홀어머니를 잃고 남긴 애도의 기록들을 모아다 한 권으로 책을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하루에 한 번, 혹은 몇 번씩 슬픔이 솟구칠 때마다 쓴 기록들, 메모에 가까워 보이나 내용은 자꾸만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표현 하나, 바로 '찬란한 슬픔'이었다. 슬픔이란 그저 부정적인 감정으로
피하려고만 했던 내가 이 책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끔 만들었다.
때로는 시의 한 구절같이 비유를 통해, 때로는 있는
그대로 지금의 자신의 상태, 주변 상황에 직설적으로 롤랑 바르트는 써 내려갔다. 2여 년의 시간 동안 저자의 감정선을 오롯이 느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이 책을 받아들이기에 내용적으로 몇 가닥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부분마다에서 감명 깊었던 구절들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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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관한 생각 그리고 기억
" 내가 늘 두르고 다니는 검은색 혹은 회색의 목도리처럼 내가
입고 다니는 외투도 침울하다. (중략) 그러자 내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좀 색깔이 있는 옷을 입고 다엄니렴.
처음으로 색깔이 있는 목도리를 두른다(체크무늬가 그려진)."
p.109
"
그녀와 함께 살았던 시간 내내, 그러니까 내 평생 동안,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질책한 적이 없었다."
p.266
어머니가 빠져버린 시공간 속에 어머니를 떠올려 보고
행동하는 것, 나 역시 생각만으로 슬픔에 벅차다. 그리고 내가 이제는 그런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엄숙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려 어머니가 했던 말 없는 가치들과 함께 지내는 일 (주로 집안일인듯)을 하며 저자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표현을 했는데 참 와닿았다.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기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
p.62
죽음을 기억하라는 '모멘토'란 말이 있는 것의 반증은
분명 사람들이 죽음을 인지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것일 거다. 각자에게 의미 있는 사람의 죽음은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듯 하다.
얼마전 읽었던 책 속에도 저자의 친한 친구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저자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고픈 욕망을 일깨워 놓았으니 말이다. 롤랑
바르트에게서 어머니의 죽음이 새 삶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분명 인간의 '죽음'에 관하여 눈뜨게 했다.
# 슬픔은 글이 되고......
"나는 이 일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p.33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p.235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롤랑 바르트는 이 기록들을 쓰는 순간에도 여러 종류의 글을 쓰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본인이 쓰는 것의 진정성에 대해, 그리고 문학의
의미에 되새긴다. 그리고 슬픔 속에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문학, 글쓰기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 역시도,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할 때
누군가와의 대화보다 글쓰기가 더 절실해질 때가 많다. 대화 상대들이 절대 못들어줘서가 아니다. 기분이 슬플 때는 정작 자신을 정면으로 두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들의 위로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해주는 위로가 간절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글쓰기라 생각된다.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기록이 끝났을 무렵, 나는 저자의 슬픔이 치유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슬픔의 치유 종결점과 저자의 종결점은 달랐나
보다. 그는 엄마와 같은 죽음을 택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받지 않았고, 그리고는 이 세상을 달리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였다고는
하지만 혹자는 자살이라고 보기도 했다. 어쩌면 책 속에서 엄마와 같은 죽음을 함께 하지 못함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에서 그의 죽음은
예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는 것마저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던 그였으니까. 이 책을 펼칠 날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는
더욱 한 장 한 장을 붙들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그런 상황을 겪은 이들에게는 선물로 해주고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