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흔의 서재

  장석주 지음

  한빛비즈 펴냄

 

 

서평은 생선회를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책의 바다에서 건져낸 언어(言魚)의 상처 몇 점을 앞 접시에 옮긴 탓에 원형을 맛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죽은 생선이 몸속에서 피와 살로 헤엄치듯, 혹 죽었다 여겼던 문장 몇 점이 싱싱하게 펄떡거릴지도 모른다는 억측에 떠밀려 적는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장석주 시인이기 때문이었다. 시인! 헤르만 헤세가 되고 싶어 했던 유일한 존재. 내가 정의하는 시인은 쫓겨난 자라는 인간의 운명을 언어로 달래는 사람이다. 시인이 쫓겨난 마흔을 달래기 위해 권하는 책과 그 속에서 뽑아낸 언어들이 궁금했다. 게다가 시인의 장서가 3만권에 이른다는 점은 선택의 여지를 삭제했다.

 

하지만 시인의 문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터. 처음에는 쉽게 읽히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난해함에 걸려 넘어질 듯 문장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대뇌피질은 동양화 가득한 갤러리가 되었다. 마흔의 서재는 그림 한 점 없는 그림책이다.

 

무리하게나마 마흔의 서재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마흔이라는 혹시(惑時)에 시인이 책을 통해 부르는 안빈낙도의 노래쯤이 될 것이다.

 

혹시(惑時)란 정해지지 않은 때를 의미한다. 약속 없이 그냥 간이역 벤치에 앉아 철길을 응시하는 것이다. 꼭 오기로 하였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시간인 것이다. 마흔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오고 간다.

 

그러나 시인에게 찾아 온 마흔이라는 손님은 뜯어 낸 달력을 폐지로서 수거하지 않는다. 그 동안 읽어왔던 책속에서 밥을 지어 꾹꾹 눌러 담는다. 마흔의 서재는 먼 길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밥을 지어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공간이다.

 

시인과 마흔은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을 먹고 강물과 대면하면서 노자와 장자의 문장을 나눈다. 그리고 고독과 침묵 속에서 편지를 쓴다. 마흔은 시인의 등을 두드려 준다. 도시라는 비위 상한 생활을 토해내게 하고, 외로움에 들썩이는 등을 잠재우기도 한다. 마흔이라는 쉼과 회복의 시간은 시인을 서재 속에 우두커니 그러나 뿌리깊이 심는다. 마흔의 서재는 지적 혁명이 일어나는 광장이다.

 

나 역시 생물학적 마흔을 넘겼다. 그래서 시인이 한없이 부럽다. 부러움의 막장은 오기던가. 오기가 오기(誤記)가 될지언정, 시인도 아니요 도시를 떠나지도 못한 마흔으로서 잠시 내 서재를 소개하면 이렇다.

 

첫째 딸아이에게 주기로 했던 옥탑방을 빼앗아 내 서재로 삼은 지 2년이 넘었다. 중력은 옥탑방도 가만두질 않아 쌓아올린 책들이 가끔 무너지곤 한다. 책을 정리하다가 한 권 잡아 물곰팡이 핀 평상 위에서 읽는다. 잠자리, 말벌이 난다. 방울토마토가 익는다. 아내가 빨래를 넌다. 막내가 같이 자자며 베개를 권한다. 서재가 침실로 변한다. 이것이 나의 서재이다.

 

쫓겨난 자의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미 그 땅에 도착해버린 시인이 부럽다. 하지만 천형(天刑)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시끄러운 도시도 과분한 삶의 요람이 아닐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나와 인연을 맺어 준 가족과 친구 혹은 동료들에게 충만한 감사의 인사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제공하는 음식도 귀하고 귀한 누군가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을 미분하면 언어가 되고 적분하면 책이 된다. 무의식을 포함한 인간의 사고 체계를 클라우딩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독서를 통해 선배들의 생각을 다운로드 받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업로드하는 셈이다. 결국 서재는 책이라는 파일명을 저장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닐까. 아직까지 도시에서 버텨야 하는 나로서는 시인의 마흔의 서재를 시샘하면서 지금 업로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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