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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ㅣ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푸가쵸프의 난은 러시아 근대화 과정에서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이란다. 작품은 역사소설의 뼈대를 착실하게 축조한 것으로 평가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러시아라면 혁명사의 어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가 그려내는 사회, 그 이상에 대한 사전지식이 터무니 없이 초라해서 .. 겨우, 예카테리나 쯤만을 알아들었을 뿐이다. 문제의 최종 해결자, 울트라 조력자로 등장하는 여제에 대한 나의 사전 지식은 퀴리부인 전기 중, 어린 마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억눌린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이름이었다는 정도가 모두이다. <대위의 딸> 속에 그려진 여제에 대한 평가가, 역시 마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경외의 표현들처럼 영혼없는 수사이거나 일종의 반어일 거라는 자연스러운 인식이 바탕에 깔릴 수 있었던 이유가 겨우 그 정도에 근거하고 있다는 건...참..초라한 식견이다.
열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마지막 장의 전개가 폭풍이다. 전반과 중반부에서 성격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상당히 공을 들여, 들인 만큼의 효과가 매우 컸던지라, 14장의 폭풍전개와 가히 설화적이라 할 만한 마무리가 당황스럽다.
'러시아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예고하며,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으로 이어지는 유장한 역사소설의 지류를 형성한 근원지로 평가된다.'는 것은 펭귄클래식 한국판 서평에서 알게 된 바다.
저 당황스러운 설화적 종결과 작품 외 서술자의 이런저런 논평이나 너스레에 가까운 간섭의 말들은 작품의 문학사적 입지점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고, 그 서평을 근거로 미루어 짐작해본다.
러시아 문학에 대해 평균적 교양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과문한 터라 추정이 조심스럽지만, 근 현대 교체 과정에 놓인 사회가 구사하는 서사의 말투가 대체로 유사하지 않을까?
설화를 대체해가는 소설, 한 겹 더, 서사의 커튼 뒤로 물러서는 서술자들의 절제되었으나 더 강렬해진만큼 교묘해진 기술수법. 드러내고 싶은 열망을 아슬아슬하게 숨기다가도 천연덕스럽고 뻔뻔하게 툭 튀어 나오는 서술자.
말하자면, 이 작품의 해당국 문학사에서의 가치는 한국문학에서 이광수의 <무정>쯤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바로 그래서, 갈등의 내용에 있어서라면, 시대에 마주선 인물의 성격을 마주하는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대위의 딸>은 우리의 근현대 시조소설들과 확실히 다른 면이 뚜렷이 드러난다.
서술의 방식에서는 바다 건너편과 이쪽, 대륙 깊숙한 그곳과 이곳이 그리 멀지 않을지 몰라도, 인물과 사회가 앓고 있는 지점, 치유하고자 하는 지점, 열정을 사르는 대상이 무엇인가, 어떻게 그 전투에 임하는가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사뭇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푸쉬킨의 시기, 이들이 근현대를 맞이하고 시작할 때의 관심이란 결국 내부의 분출하는 욕구와 욕망이 오래 쌓인 묵은 것들 - 예컨대, 전통의 품격과 뒤섞인 낡고 둔감한 차르의 봉건같은- 과 벌이는 싸움이다. 반란을 일으키는 폭도의 우두머리도,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온 젊은 근위중사도 소설 속에선 '젊다.' 젊기에 요령도 없고, 도무지 좌충우돌이지만, 날 것 그대로의 열망을 가졌으며,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치기와 불안정한 허영이 뒤범벅일지언정 열망을 향해 돌진하는 길에 속물적 계산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목마름의 대상이 가진 의미를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전력을 다해 목말라 하며 전력을 다해 그 가치를 옹호하며, 투신에 회의를 갖지 않고, 다음 걸음에 망설이지 않는다. 존재를 거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을 만큼 대상이 간절하며 자신의 간절함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사랑과 열망에 정직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군복과 깃발의 색이 다를지라도, 서로가 가진 순수함을 알아보고 공감하며 그 열정의 순수함에서만큼은 어떤 시선도 개의치 않고 연대한다. 그럴 수 있었으므로 또한 그들은 서로의 깃발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비판한다.
우리도.....우리도 그럴 수 있었을까? 일본이, 서구가 가고자 하는 곳이므로 우리도 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가야할 곳이어서, 내가 열망하는 것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개항의 압력이 없었더라면, 제국주의의 탐욕이 우리를 노리지 않았더라면...... .
우리 안의 우리들끼리 민란이든 반란이든 개혁이든 반정이든을 거듭하며 우리의 상을 향해, 우리의 열망을 사를 수 있었을까?
백수십 년 전까지 올라갈 필요 없이, 지금은 어떨까, 어떨 수 있을까? 깃발이 다르면 모든 순간 모든 개체가 다 똑같이 적(敵)이기만 한 우리의 현실을 넘어 우린 최소한의 공유지점 위에서 신뢰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손으로 열어 놓는 창과 문으로 햇살과 바람을 받아들이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원하며, '네가 열망하는 그것을 열망하는' 어리석음과 가련함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시대가 우리에게 허락한 '대위의 딸'은 어디에 그 가녀린 몸을 숨기고 떨고 있을까, 언제 그 자신의 올곧고 용감한 모습을 드러낼까?
"내 말을 들어보게나." 푸가쵸프는 섬뜩한 영감이라도 떠올랐다는 듯이 운을 뗐다. "내 자네에게 어릴 적 칼미크 노파가 들려준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어느 날 독수리가 까마귀에게 물어보았다네.
'까마귀야, 말해 보아라. 너는 이 세상에서 300살까지 사는데 나는 어째서 고작 33년밖에 살지 못하는 거냐?'
까마귀가 대답하기를, '나리, 그건 말입죠, 나리는 산 짐승의 피를 마시지만 저는 죽은 짐싱의 피를 마시기 때문이랍니다.'
독수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까마귀와 똑같은 걸 먹어보겠다고 했다네. 까마귀는 그러자고 했지. 독수리와 까마귀는 함께 날아갔어. 그들은 눈앞에서 스러져 있는 말을 발견했네. 그러곤 내려가 앉았지. 까마귀가 부리로 쪼아 먹으며 맛있다고 했네.
독수리는 한두 번 쪼아 먹어보더니 날개를 휘저으며 까마귀에게 말했다네. '이봐, 까마귀, 죽은 짐승을 먹으며 300년을 사느니 뒷일이야 어찌 되건 간에 단 한 번이라도 산 짐승의 피를 실컷 마시는 편이 낫겠다.' 칼미크 이야기를 들은 소감이 어떤가?"
"그럴 듯하군요."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살인과 강도 행각을 일삼으며 사는 죽은 짐승을 쪼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가쵸프가 놀란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각자의 상념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 11장. <폭도들의 소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