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 오늘의 교육 총서
한낱.최형규.조영선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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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반 도희가 울상이 되어 교무실로 나를 찾아 온 것은 닷새 전쯤의 일이다. 도희 말로는 선도부 언니들이 생검(생활검열)을 나와 고대기를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도희는 머리 결이 유별나서 30분 이상을 고대기로 머리를 펴야 학교를 올 수 있다고 했다. 헌데 그날은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대강만 손질을 하고 학교에 와서 마저 머리를 편 모양이었다.


어제 도희가 그 일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는 학생부 담당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도희의 사정을 말해준 뒤에 앞으로는 학교에 가져오지 않기로 나와 약속을 했으니 돌려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부탁을 드렸다. 그러자 고맙게도 학교가 파할 무렵 도희를 학생부로 보내달라는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도희에게 그런 내용을 전해주자 금세 얼굴빛이 환해지더니 내게 한 걸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이번 수련회 갈 때 고대기 가져가도 돼요?”

“너 고대기 없으면 머리가 난리도 아니라며?”

“맞아요.”

“그럼 당연히 가져가야지.”


“정말요? 근데 수련회 가면 소지품 검사할 텐데 어떡하죠?”

“소지품 검사를 왜 해?”

“하잖아요. 거기 조교들인가 그 언니 오빠들이요.”

“내가 못하게 하면 돼.”

“정말요? 근데 선생님이 어떻게 못하게 해요?”


“응, 전에도 소지품 검사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못하게 해서 안했어.”

“정말요? 그래도 만약 하면은요?”

“내가 못하게 한다니까 그러네.”

“그래도요. 선생님 안 계실 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 내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써. 다른 애들도 그러라고 그래. 가방 큰 거 가져갈 테니까.”


도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사실을 동료교사들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건 안 봐도 뻔하다. 나를 보는 눈길이 부드러운 편인 몇몇 후배 여교사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도 이런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도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료교사들과 공감대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나 태도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더욱 대화와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무언가 기본적인 지식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토론은 겉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서로 감정을 상하거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전체의 그림을 보지 못하면 장님 코끼리 이야기 하는 식으로 자신이 지각한 것만을 열띠게 주장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 한 권의 책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전체의 그림을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을 얻게 되면 부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럴만한 책이 있느냐는 것이다. 다행히도 있다.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교육공동체 벗)을 펴면 이런 글을 먼저 만난다.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정체를 모르니 불안하다. 언론에서는 그것이 몹쓸 것이라고 난리를 친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권을 조금 먼저 만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왜 학교에 인권을 들여야 하는지, 학교에 들어온 인권이 학생들의 삶을, 교사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낼 수 있는지, 인권이 우리에게 어떤 세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말을 해보기로 했다. -<책을 펴내며>가운데’ 


‘학생 인권이 교육에 묻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뜻밖의 선물’로 어느 날 교문 안으로 들어온 인권이 우리가 밥처럼 물처럼 먹고 마시는 교육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촘촘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혼란을 통한 성숙’은 경기도와 서울 등의 학생인권 조례 제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6명의 필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절만만 뿌리 내린 학교 인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영선(서울 경인고)는 ‘체벌금지와 학생인권 정책이 학교에 혼란을 주고 있고, 혼란을 주어야한다’고 역설한다. ‘이 혼란으로 약자에게 냉혹하고 강자에게 관대한 이 사회 전체에 균열을 내야한다’고도 말한다. 혼란과 균열이 미덕이 되는 사회는 문제적 사회다. 말하자면 필자는 지금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 근거는 이른바 학교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거하려는 정부의 무지몽매한 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들은 학교 폭력이 체벌금지 조치와 학생인권 조례 제정 이후에 더욱 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2010년 11월, 서울시 교육청이 ‘체벌 전면 금지 조치’를 내린 후 언론은 연일 학생이 교사를 폭행한 기사로 도배했다. 대부분 기사의 논조는 체벌 금지 이후 무서울 것이 없어진 아이들이 교사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정당한 지도도 우습게보고 대들다가 폭행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참 재밌는 논리다.(…) 지금 언론을 도배하는 상황은 그렇게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아니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가 길러낸 아이들의 모습일 뿐이다. (11-12쪽)’


제 2부의 제목은 ‘교육과 인권, 그 사이’이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최형규(수원 유신고)는 교육과 인권 사이에 낀 교사의 딜레마를 털어놓는다. 그는 좋은 교사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교사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비록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지만 ‘교사는 학생의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생각에 ‘그 만큼 교사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내면화하는데 일말의 회의나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학생인권을 만난 뒤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그는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러다 ‘학생인권’을 만났고 요즘 내 머릿속은 ‘인권’ 문제로 가득하다. ‘인권친화적인 교사의 모습은 무엇일까’가 가장 큰 고민이며 과제다. 명쾌하게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교육을 하면 되지.’하고 말하기에는 교사로서 딜레마가 크다.(99쪽)’


듣기 싫은 수업을 거부하는 것도 인권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깨워 수업을 듣도록 만드는 게 교사의 역할인가? 여기에 교사의 딜레마가 있다.(101쪽)’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 아이를 깨워야 하는가, 그대로 둬야 하는가. 이런 상황은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아이들이 책상에 엎어지는 이유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서는 교사는 대강의 상식선에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헌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학교에 인권이 들어온 뒤에 생긴 변화이다. 이제 교사는 그 상식 너머를 사유해야만 한다.    


이혁규(청주교대 사회교육과)는 ‘학생의 탄생과 인권의 유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학교 제도와 함께 근대적인 아동에 대한 관념이 생겨났지만 서양의 경우 그 과정이 아주 급격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한국사회에서 학교 제도는 세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팽창하였고, 학교의 팽창과 더불어 학생이라고 불리는 집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굳이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제 한국사회에서 ‘학생’은 그 연령대의 아이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귀속적 호칭이 된지 오래이다. 다만, 필자는 거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왜 많은 사람들은 학생과 인권을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할까? 아마도 학생을 미완의 존재로 파악하고 성인기를 위해 학생들의 현재적 욕망이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통념이 우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위한 준비기로서만 학생 시기를 이해하면 할수록 학생들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학생들에게 당연히 보장되어야할 인권을 유보 혹은 박탈하는 기제로 작용한다.(112쪽)’


제 3부에서는 ‘인간적인 학교는 어떻게 가능한기’를 사유한다. 한 낱(인권교육센터 ‘들’)은 소비되는 인권과 유행하는 인권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먹인다. 지금 ‘인권교육은 분명 그 어느 때보다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인권 교육인지는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열악한 인권 현주소를 이렇게 아프게 짚어준다. 


‘2011년 5월,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경기 지역 청소년들이 <우리는 허락받아야만 인권의 자격이 생기나요?>라는 이름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학생참여위원회‘를 모집하는 도교육청이 학교장 직인과 부모 동의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부 학생들이 직인 없는 신청서를 접수하기 위해 민원실에 찾아가자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므로 받아줄 수 없다는 장학사의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164쪽)’


길은 멀지만 가야한다. 그 먼 길 끝에 고작(?) 고대기를 되돌려 받고 싶어 하는 한 아이가 서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소박한 견해를 ‘욕망은 인권의 다른 이름일 수 있기 때문이며,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기 이전에 삶을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요약 정리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에필로그의 부제는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하기까지’이다. 여기에 소개된 세 꼭지의 글 모두 주목을 요한다. 뜨겁고 아픈, 그리고 아직은 걸음마에 불과한 우리나라 학생 인권의 역사가 한 눈에 밟힌다. 제목만이라도 일별해보자.


학생조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파란만장 학생인권 조례운동이 던지는 질문들


학생인권은 왜 우리를 뜨겁게 하지 못했나

-전교조 키드‘교사가 본 참교육과 학생인권


학생인권조례는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다

-학생들의 저항과 학생인권 제도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름 아닌 ‘서울시 학생인권 사용 설명서’이다. 필자인 이형빈(전 서울 이화여고 교사)은 자신이 학교에서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학생인권 조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다음은 그 맛보기이다. 


 체벌금지


초보 담임 시절, 난 무모한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 교사였다. 모든 아이들을 사랑해야한 할 것 같았고, 모든 아이들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한 녀석이 담배를 피우다 걸렸다. 큰일이 난 줄만 알았다. 그 아이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아차 싶었다. 그 아이의 종아리에 빨간 회초리 자국이 났다. 그 아이는 “왜 담배를 피웠느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느냐?”는 식의 나의 어설픈 추궁에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 사실 그 아이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체벌은 그 아이와 나의 소통을 완전히 가로 막았다. 그 예쁜 종아리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회초리 자국이 내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다.


제6조(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①학생은 체벌, 따돌림, 집단 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260-261쪽)


강제 보충 야자 금지

강제 보충수업이 버젓이 시행되자 이제는 별별 반인권적인 작태가 벌어졌다. 소수 상위권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심화반 보충수업’, 소수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제공되는 ‘야간 자습실’ 운영 등 눈에 보이는 차별이 부끄럽지 않게 진행되었다. 강제 보충 야자에 저항하던 학생들도 아제는 스스로를 성적 경쟁에 내던지며 그 차별선 안쪽에 서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자발적 복종’이란 그러한 경쟁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제 9조(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교육 활동의 자유)

③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 의사에 반하여 학생에게 자율 학습, 방과 후 학교 등을 강제해서는 아니 되며,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교육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263쪽)


차별받지 않을 권리


우리 반 아이 중에 학생인권운동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괜한 겉멋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진지했고, 다른 학생들의 인권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 아이는 성소수자, 흔히 말하는 동성애였다. 자기 안의 ‘마이너리티’로 인해 타인의 소주사성과 남모를 아픔에 대해 감수성이 깊은 아이였다. 그 아이와 나는 서로 못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 아이는 자기가 동성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도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표현을 썼더니 그 아이는‘범성애자’가 옳은 표현이라고 고쳐 줬다. “양성애‘는 세상의 성을 여성/남성으로만 나누는 이분법적 표현이기 때문에 ’범성애‘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제 5조(차별받지 않을 권리)

①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275쪽)

 

이쯤해서 다시 도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왜 수련회 때 고대기를 가져가려는 도희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을 자청했을까? 은연중에라도 나는 도회가 머리를 예쁘게 손질하고 싶은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혹은, 건강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도희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한 행위는 아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 것뿐이다. 그런 나를 동료교사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낯설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많은 사람들이 학생과 인권을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 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어제 도희는 수련회 때 고대기를 가져갈 수 있게 되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남학생들이랑 함께 수련회를 가는데 잠자고 일어나 머리를 제대로 손질하지 못하면 얼마나 마음이 찝찝할까? 그것이 도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권이 학교에 들어 온 이후 우리 사회가 치르고 있는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비하면 도희 이야기가 너무 한가한, 적절하지 못한 예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인권 감수성이 그쯤에 있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인권이란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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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교사인가 - 윤지형의 교사탐구 윤지형의 교사탐구 1
윤지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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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교사인가


물음이 당혹스럽다. 가령, ‘교사로 산다는 것은?’ 혹은 ‘교육 불가능 시대, 교사는 가능한가?’ 이런 정도의 물음이라면 좀 덜 당혹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왜라니? 이 다분히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이 외려 너무 빤해보여서 그랬을까? 그것도 그렇지만, 이 물음(혹은 책 제목)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은 짜증도 났다. 도대체 뭘 묻는 거야? 이런 걸 물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등등.   


‘최근 한 중학생의 자살 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또다시 슬픔과 분노와 혼란에 빠졌다. 학교 폭력, 집단 괴롭힘. 성적 비관 자살이 새삼스런 사건은 아닐진대 우리는 이를 내부로부터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번만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게 무망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책을 펴내며 5쪽)


저자 윤지형(부산 내성고, 국어)도 알고 있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그래서 ‘병든 사회가 병든 학교를 만든다는 것’을. ‘그러기에 누군가가 “학교는 죽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사회의 죽음, 인간의 죽음을 경고, 증언한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왜 교사인가’라니? 너무 한가한 질문이 아닌가. 아니, 이것은 교사에게 불편하고 무서운 질문일 수도 있다. 한국 교육의 총체적 난국의 책임을 교사 집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저간의 움직임에 기름을 끼얹는. 저자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다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아이들은 학교에 오고 간다. 학교가 죽었든 살았든, 교육이 가능이든 불가능이든 간에 초중고 학생 700만여 명이, 전국 방방곡곡의 1만 1천여 학교에, 밤하늘의 별들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6쪽)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교사라면 누구도 이 엄연한 사실을 비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늦은 밤 우르르 학교를 빠져나가는 아이들, 교문을 나서면 대기한 봉고차에 실려 학원으로 직행하는 아이들, 아침 조례 시간이면 졸음과 피곤에 못 이겨 겨우 고개를 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곤 한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6쪽)


고맙긴 한데, 그 다음이 문제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우리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사가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여야 가까스로 살아 있는 아이들을 계속 살아남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안고 저자 윤지형은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교사들을 만난다. 그들을 계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틈만 나면 교사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 대는 세상을 향해 “이런 교사를 보라”고 외치고도 싶었고, ‘세상이 학교를, 교사를 조금은 따듯한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라서’였다. 그래야 ‘벽의 학교 벽의 교사들도 변화해갈 것’이라는 슬프고도 희망찬 생각을 하면서.


<나는 왜 교사인가>(교육공동체 벗)는 지난 2002년과 2005년 두 해 동안 월간 《우리교육》에 〈윤지형의 교사탐구〉라는 꼭지로 연재한 내용과 2009년과 2010년 새롭게 인터뷰한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더불어 길게는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교사들의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 어떻게 전개되어 변화하고 발전되었는지 책 속의 주인공들이 직접 쓴 편지를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저자가 발품을 팔아 만난 교사들에게서 전염된 아픔이기도 했다. 이 아픔은 개인의 아픔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아픔이었다. 책이 저자의 인터뷰 기사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책의 주인공들로부터 받은 편지로 구성되다 보니 갈수록 인간의 꼴을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험한 세월의 아픔도 보태졌다. 헌데 묘하게도 그 아픔과 부끄러움 속에 치유의 길이 보였다. 이 땅의 교사들에게, 학부모들에게, 혹은 조숙한(?)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1부 ‘어쨌든 아이들이 좋다’, 2부 ‘교사로 산다는 것’ 3부 ‘바람에 맞서거나, 바람이거나’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첫 꼭지의 제목이 ‘보리밭, 작은 연못, 풀벌레 그리고 미술시간’이고 3부 마지막 꼭지가 ‘래디컬한 인문주의자가 된 까닭’이다. 꼭지 제목만으로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교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임종길 교사는 (경기 수원 대평중, 미술) 어느 날, 학교에 보리밭을 일구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게 생각이나 하고 말 일이지 어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인가? 무릇 농사란 자연의 때를 거스를 수 없는 법. 우선 내년 보리농사를 위해서 올 가을에 땅을 일구고 파종해야 한다. 겨울엔 보리밟기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임 교사는 동료교사들과 학생들을 설득하여 기어이 그 일을 해내고 만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보리밭으로 뭔지 모를 생기가 돌면서 싹이 트고, 그것이 하루가 다르게 힘껏 쑥쑥 올라오면 아이들은 그 싱싱한 초록의 생명을 보고 느끼고 또 그린다. 그림도 번듯한 도화지에 그리지 않는다. 우유팩을 재활용한다. 그걸 쫙 펼쳐 씻어 말리고 안쪽의 얇은 비닐을 벗겨 내면 튼실한 그림 종이가 된다. 어느 틈에 풀벌레, 메뚜기도 날아든다. 들꽃도 잡초도 보리와 함께 자란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삼삼오오 보리밭으로 달려간다. (15쪽)


얼마나 실하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하지만 이것은 오래 전 그가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저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는, ‘새벽같이 등교해서 밤늦게까지 전혀 자율적이지 않은 야간 자율학습과 지나친 규율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 인문계고’로 옮겨온 뒤였다. 다행히도(?) 임 교사는 꿈에도 그리던 그때 그 학교로 다시 발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임 교사가 저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4년 전 지금의 학교로 왔습니다. 오랜만에 담임을 했는데 중학교 생활은 마치 하루가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성능 좋은 컴퓨터와 비싼 기자재가 들어찬 학교지만 학급당 학생 수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 선생님들은 불필요한 업무가 많아 아이들과 이야기 한 번 여유롭게 할 수 없고 아이들은 더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 무한경쟁에만 내몰린 아이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지요.(31쪽)


하지만 임 교사는 이곳에서도 화단과 연못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다행히 옥상과 빛이 잘 들어오는 복도가 있어서 그것이 임 교사와 아이들의 새로운 터전이 되어준다. 처음에는 경계심을 갖던 교장선생님도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주는 바람에 빗물 저수통을 설치해서 수돗물 대신 빗물을 모아 화단과 작은 연못을 가꿀 수 있게 된다.


임동헌 교사(광주 전자공고)는 ‘왜 선생이 되었는가?’라는 저자의 ‘진부한’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을 한다. ‘생계형 교사’로 시작했다고. 전문계고 교사인 그는 학교에서 야간에 운영하는 산업체 특별학급과 관련된 학교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면서 선생이 되는 공부를 톡톡히 하게 된다. 그는 ‘학생들에게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위해 항상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른바 문제반 담임은 임 교사의 몫이었고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배 교사들도 그를 대견하게 여겼고 그도 자기가 잘하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한 지 4년이 된 제자 하나가 그를 찾아오면서 그의 교사로서의 삶이 확 달라진다. 그를 찾아온 졸업생이 단단히 마음먹은 듯 던진 한 마디. “선생님은 아직도 애들을 무자비하게 때리세요?” 순간 임동헌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몸이 굳어 버린다. 긴 침묵 끝에, “미안하다….” 한 마디를 던지고 정신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술부터 찾으며 한없이 울고 만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임동헌 교사가 인권 교사로 거듭나고 청소년 노동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기까지의 스토리는 영화 속의 이야기 같다. 


나는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서 “선생님은 아직도 애들을 무자비하게 때리세요?”라고 물으면 누구라도 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질까? 물론 내 스스로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럼 무엇이 그를 변화시킨 것일까? 그것은 “나는 왜 교사인가”라는 물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교사 임동헌은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나는 왜 교사인가?’ 라는 물음은 <가르칠 수 있는 용기>의 저자 파거 J 파커가 제기한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저자가 발굴(?)해낸 임 교사를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은 그 물음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물음이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을 때 와주지 않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와 줄 수도 있다. 그것이 세월의 힘이겠지만 그런 지혜를 얻기까지는 진한 아픔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담임 전문가이자 수업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는 박춘애(광주 서광중/현 운리중)’ 교사와 “국어에 관한 한 나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라. 학원에 갈 필요 없다.”라고 호언장담할 만큼 전문 교육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이 하늘을 찔렀던 김명희(경북 안동여중/현 복주여중)교사 이야기는 의외로 다소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다.


한때 박 교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담임 전문가요, 수업 또한 가히 예술가 수준이었다.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동료교사들의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그 혁혁한 공을 다 소개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 교사는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저자 윤지형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다.  


‘저는 여전히 교사로서 행복하고 싶고 담임으로서 행복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교실 안에서의 자치 경험과 공동체 교육을 통해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요즘 좀 괴롭습니다. 지금 학교는 교사에게 기다릴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나에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경우 나는 그 아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배려고 하고 인내도 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뭐든 당장 해결해야합니다. 경고 몇 번 주고, 그 다음은 선도위원회, 그 다음은…하는 식이지요.’(48쪽)


김명희 교사(당시 안동여중 근무)는 한 술 더 떠서 저자가 인터뷰를 하러 안동으로 김 교사를 찾아가고자 전화를 할 때부터 이런 넋두리에 가까운 힘 빠진 고백을 한다. 


“몇 년 전부터 감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지요. 근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는 인터뷰 날짜를 뒤로 미루었으면 한다. 아니, 가능하면 인터뷰 약속 자체를 없던 일로 할 수 없겠느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저자로서는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 교사가 ‘걸어 다니는 감탄사’요 ‘감동의 명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호소에 가까웠다.


“도무지 할 말이 없는 걸요.”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일차적인 진단 결과, 여자의 생리적 나이가 주범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에 수긍하지 않고 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그녀의 화려하고 행복했던 이력을 샅샅이 뒤지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저자는 김 교사가 한 사람이 성취해놓은 것이라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교사로서의 성실성과 상상력을 고루 발휘해온 성공 케이스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래서 꼭지의 제목을 미래 소망형인 ‘다시 활짝 펴질 그 마음의 파라솔’로 정한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두 여교사의 진한 아픔이 내게 전해지면서 책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공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슬픔이나 절망의 공감 같은 것은 흔해빠진 유행가 가사처럼 돼 버린 지 오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를 책 속으로 더욱  빠져 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저자 윤지형이 그랬듯이, 나도 그 답을 빨리 찾은 것을 포기해야할 것 같지만, 여기까지 책을 읽고는 다시 책 제목으로 눈길이 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할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는 왜 교사인가?’ 당장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헤매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나는 왜 교사인가?’ 하는 물음은 ‘나는 왜 인간인가?’ 라는 물음과 별단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이 책에는 ‘체육의 창(窓)으로 철학하는 한 체육교사의 꿈’(이명준, 서울 목동중/현 경상대 체육교육과)와 ‘나는 수학(數學&修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김홍규, 서울 광신고)와 같은 교과와 관련된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소개된다. 그런가 하면, 미술 교사이지 예술 노동자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그 자신도 영어의 몸이 된 김인규 교사(충남 에니메이션고/현 천안 오성고)며, 0교시 폐지와 학교 학생생활규정을 개정하기 위해 분투한 조향미(부산 금정여고/현 개금고)교사와 홍은영 교사(경기 안성여중/현 공도중)의 반인간화교육의 바람에 맞서 싸워온 생생한 투쟁의 기록과 사례들도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이 저자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보면 마음이 바닷속처럼 숙연해진다.


여기에, 어느 학교를 가든 자신이 구상한대로 도서관을 끝내 변화시키고야 마는 도서관의 달인 여태전(경남 진주 삼현여고/현 창원 태봉고) 선생님의 좌충우돌과 그런 류의 사람들이 흔히 겪는 아픔과 번민.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래디컬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 시대의 잠수함 속의 토끼인 이계삼 선생님(경남 밀양 밀성고)의 교육철학과 교사로서의 고민들이 책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들을 필경 “나는 왜 교사인가?” 라는 물음을 끼니처럼 먹고 살았을 것이다.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소개할 박원식(경북 군위 부계중) 교사는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 지상에 있는 동안 그는 관객(학생)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배우(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 느닷없이 가발을 쓰고 교실에 들어가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를 짜낸다. 어느 날인가는 자장면 배달부가 들고 다닐법한 철가방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가는 ‘깜짝쇼’를 벌인다. 틈만 나면 엎어져 자는 게 일과인 녀석들까지 철가방에 초점이 모아지자 은근슬쩍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다가 이렇게 화룡점정을 찍는다.    


“철가방 속에서 짜장면만 나온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책이 나올 수도 있다. 책은 영혼의 양식이다. 그래서 나 오늘 국어 40인분 배달 왔다.”(130쪽)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편지를 쓸 수가 없다. 대신 저자 윤지형이 그에게 바쳤던 ‘고별의 편지’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유달리 눈물을 많이 노래했던 시인 박원식, 너는 사이버 공간에 ‘눈물 사이트’를 연 적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누구보다도 사랑과 찬탄과 존경을 받았던 교사 박원식. 너는 책과 분필과 사탕이 든 철가방을 들고 교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 7년 전 네가 ‘숨바꼭질이야/제발/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라고 노래했듯이, 술래잡기하다가 잠깐 숨어버린 어린 동무처럼 늘 우리 곁에 살아 있을 원식아, 부디 잘 가라. 잘 가라.(144쪽)


이제 나에게 물을 차례이다. 나는 왜 교사인가?


지면 관계상 미처 전하지 못한 선생님들의 눈부신 활약상과 같은 교사로서 본받고 싶은 참된 마음가짐들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전국방방곡곡으로 발품을 팔아서 만난 이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요, 등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선생님들을 달랑 책 한 권으로 만나게 해주신 저자 윤지형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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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러면서 크는거야 - 류명숙의 ‘열세 살’ 이야기 벗 교육문고
류명숙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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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니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가 용서받았던 많은 기억들 때문에 마음이 따듯해질 것이다. 

-괜찮아, 그러면서 크는 거야(류명숙) 139쪽 

 

어제 오늘 사이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일박 연수를 다녀오고, 한 잠 푹 자고 일어나 늦은 오후에 산을 다녀오고, 아내 생일 축하해주고 그런 바쁜 틈새에서 눈이 빠지게 읽었다. 그 중 한 권은 두 번을 연거푸 읽으면서 또 두번을 연거푸 울었다. 그게 무슨 책인고 하니 안준철의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내가 쓴 글을 보고 내가 울다니! 

 

지금 나는 류명숙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다가 이 글을 쓴다. 눈이 빠질 것 같은데도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마치 조미료를 치지 않은 음식 같은 단백한 글이 주는 매혹에 빠져든 것은 3장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아이들을 용서한다는 것에 대하여.., 나도 아이들을 많이 용서하는 편이지만 이제 그것을 억울해하지 않을 것 같다. 참 좋은 선생님이시다.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책을 통해 어떤 정보를 얻는 것보다도 마음을 얻어가는 것이다. 오늘 나는 류명숙 선생님의 아이들을 향한 어진 마음을 얻어가게 되어 기쁘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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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불가능의 시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기획, 엮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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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교육불가능의 시대>다.  제목 만큼이나 내용도 어둡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이 단숨에 읽혔다. 그것은 지금 우리(내)가 앓고 있는 교육불가능의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은 내내 뭔가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교육불가능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필자들의 속내가 읽혔다. 그래도 어둡긴 어둡다. 지금 우리 교육이 어둡듯이. 뭔가 대안을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섣부른 대안에 앞서 지금 우리의 어둠의 깊이를 헤아려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그 진단의 아픔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 아픔을 치유하고 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그 처방에 대한 고민도 짚어진다.    

-매니저 엄마의 관리 밑에서 아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연구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몇몇 에피소드들을 매니저 엄마의 자녀들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단면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뽑은 급훈 중 인기 있는 것 중 하나가 '엄마가 보고 있다'라는 것, 작년인가 10대 여중생이 개설한 '엄마 안티 카페'에서 엄마를 향한 욕설이 난무해 결국 폐쇄되었다는 뉴스 기사는 '관리자'로서 어머니에 대한 아이들의 저항을 보여준다. (....)

 미국에서도 중산층 가정에서는 자녀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하는 매니저 엄마와 닮은 꼴인 '알파맘'에 대한 희의가 커지면서, 요가를 하고 스스로 삶의 속도를 늦추면서 자녀의 성장을 자녀 스스로에게 맡기는 소위 '베타맘'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 사교육시장을 누비며 자녀교육의 성공의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짜는 불안하고 버거운 매니저 엄마 대신, 삶에 대한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자신과 자녀가 모두 스스로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배려하는 '배타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구성해가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61쪽 

이 책에는 탈학교 아이들과 특수학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아픈 마음으로 책을 읽다보면 바로 그 아픈 마음이 바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반 교사들의 인식에는 내가 가르칠 수 있는 학생과 내가 가르칠 수 없는 학생에 대한 구분이 뚜렸하다.  그리고 내가 가르칠 수 없는 학생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 또한 분명하다. 내 아이와 내 아이가 아닌, 아이. 장애 학생은 일반 교사들에게 내 아이가 아닌 아이들이다. 아무리 정부가 장애 이해 교육을 해도 일반 교사들은 장애 학생을 자신들이 가르쳐야할 학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학교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장애 학생이 아닌 '일반'학생들을 위한 교과 교육 및 생활지도 말이다.-115쪽   

북유럽의 학교는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이 전체 학생의 50%에 육박한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모두 장애 학생은 아니다. 그들은 장애학생처럼 특별한 교육적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이며, 학교는 이들이 개별 특성에 맞는교육게획을 세워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를 확대하여 특수교육 대상자 외에 다른 모든 학생들도 자신들의 개별 학습계획을 근거로 공부하도록 한다. 장애 학생들만 특별히 교육과정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각자 자신의 특성에 맞는 교육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학습속도에 따라 공부한다. 이곳에서 장애 학생은 장애 학생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학생보다 다만 특별한 지원이 좀 더 필요한 학생일뿐이다.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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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2011.3.4 - 창간호
교육공동체벗 편집부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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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창간호에서 새터민 청소년들의 삶과 교육이란 부재가 붙은 '북에서 온 친구들의 희망과 아픔'이란 글을 읽었다. 마음이 아팠다.  

새터민(북한에서 온 친구들을 그렇게 부른다) 청소년들은 탈북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 장기간 체류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불법 채류자 신분이 발각되면 강제로 송환되는 등 절박한 인권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탈북해서 남한에 입국할 때까지 평균 2년 정도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새터민 친구들은 제 나이를 두 세살 낮춘 학년으로 학교에 편입하고 싶어한다. 북한에서 겪은 기근 때문인지 남한 아이들보다 키가 작고 어려보이는 것도 이러한 결정을 부추기게 된다고 한다.  

남한에 넘어와 이들이 겪는 고통을 글을 통해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직 내 주변에는 탈북자가 없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중에서 북한에서 온 친구들은 없지만  

만약 그들을 담임하게 되거나 가르치게 된다면 내가 교사로서 그들을 대해야할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 것 같아 고마웠다.  

이 외에도 <오늘의 교육>에는  교사로서 읽고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것들이 많았다.  

특히, '학생인권조례는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은 교사로서, 혹은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지금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운동이 교사 조직을 비롯하여 많은 '어른 단체'들의 비협조와 무관심 속에 좌초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미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경기도에서는 학교 현장의 왜곡과 거부 사례들이 알려지고 있다고도 한다.  

이는 우리 나라의 인권 수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삶과 교육에 대한 철학의 빈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교육>에 거는 기대가 크다.   

<오늘의 교육> 창간호 특집 제목은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내면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나'라는 부재가 붙어 있기도 하다.  

그 중 한 꼭지인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적 불가능에 대한 사유'는 읽는 내내 우리 한국 교육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글쓴이는 맨 뒤에 이렇게 말한다.  

'나도, 우리들 모두도 폐허 위에 있으면서 또한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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