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의 실험정신을 지지합니다. `교육불가능의 시대`를 선포한 깊은 속내에는 교육 가능한 시대가 어서 오길 염원하는 뜨거운 열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작지만 강한 출판사로 오래 남아주길 바라며 함께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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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커리큘럼 -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
이계삼 지음 / 한티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한티재)은 일종의 북 리뷰집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성장이 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가 읽은 책을 많이는 읽지 못했다. 저자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오늘의 교육>이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북 코너에 실린 그의 리뷰를 읽고 몇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은 정도다. 나의 지적 성장이 더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반갑게 다가온 구절이다. 

 

"1986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113쪽)

 

"그도 몰랐구나!" 나도 모르게 의식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는(도) 몰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야에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지 않고도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이명박 정부가 장악하다시피한 대한민국 공영방송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책의 제목이 '청춘'의 커리큘럼이니 이 책을 먼저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교사들이 먼저 읽기를 바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 교사들의 지적 성장이 이미 오래 전에 멈추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넘은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악담을? 적절한 근거가 있긴 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금세기에 터진 가장 심대한 인류의 재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웃나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동료 교사들의 반응은 놀랄 만큼 냉담했다. 여기서 사용한 냉담이란 단어는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나도 뒤늦게야 알게 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서 그 심각성을 말해주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반박을 하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표정이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체르노빌 이야기가 나왔으니 먼저 한 대목만 소개할까 한다. 앞부분은 저자 이계삼의 글이고, 뒷부분은 그가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간이 딱딱했고 심장이 정상이 아니었다. 네 시간 뒤에 죽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 사랑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가 죽었다. 뱃속의 아기는 그의 몸으로 흡수된 방사선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딸이, 나를, 살렸다. (…) 그렇게 작은 아이가……, 딸이 나를 지켜줬다. (…)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사랑으로! 사랑과 죽음은 왜 나란히 있을까? (…)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알려줄까? 무덤에 가면 무릎을 꿇는다. (123쪽)

 

끔찍하지 않은가? 최근에야 이슈가 되기 시작한 핵 방사능 이야기는 그렇다 치자. 꽤 오래 전 일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글을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영어교과서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머지않아'가 고작해야 이삼십 년 뒤라는 것. 그리고 그런 중요한 사실을 명색이 선생(지식인)이란 자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이 더 컸다.

 

그 주범은 햄버거였다. 햄버거를 만들려면 소가 필요하고 소를 먹이기 위해서는 초원의 풀이 필요하다. 결국은 소에게 먹일 풀을 제공할 초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마존 유역을 비롯한 지구의 열대우림이 몽땅 희생될 수밖에 없으며, 이미 그 진행상황이 가히 절망적이라는 것이 정부가 감수한 검정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수업준비를 하다가 옆에 있던 후배교사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자 즉각 이런 반응이 나왔다. 

 

"에이, 그렇게까지 되겠어요? 그 정도가 되면 무슨 조치가 나오겠지요. 그리고 요즘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거 하나 해결 못하겠어요?"

 

<청춘의 커리큘럼>1부 첫 꼭지 제목이 '공황시대의 목전에서 슈마허를 생각하다'이다. 저자가 E.F 슈마허를 천착하게 된 것은 "슈마허의 사상에는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으로서의 적정기술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 탈중심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인간 구원의 초월적 가치와 이것을 구원할 수단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핵심이다. 과학이 이만큼이나 발달했는데도? 그렇다. 아니, 바로 과학이 발달한 것이 화근일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온 삶을 먹다>의 저자 웬델 베리가 한 말이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39쪽)

 

이계삼은 원델 베리와 IT산업의 귀재 스티븐 잡스의 삶을 비교한다. 스티븐 잡스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웬델 베리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계삼이 책을 통해서 만난 웬델 베리는 스티븐 잡스가 실리콘 벨리의 총아로 전 세계의 각광을 받으며 수십 년 간 달려오는 동안, 1960년대 이후부터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43세이던 1977년에는 대학 교수직까지 사임하고 전통적 방식으로 지금껏 농사를 짓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삶을 위해 이바지했느냐고 묻는 것은 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는 우문에 가깝다. 하지만 거기에 몇 글자를 더 넣어서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바지했을까?"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저자 이계삼 생각은 어떨까? 

 

요컨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스가 추구한 첨단의 기술은 인간은 먹는 존재라는 사실, 그 먹을거리가 끊어지면 한순간도 생존할 수가 없다는 존재 조건을 한 치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첨단의 기술 문명이란 실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니겠는가.(41쪽)

 

칼 구스타프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다." 석유고갈과 관련된 사실들은 너무 많은 진실이면서, 또한 너무나 자명한 진실이다.(137쪽)


 

<청춘의 커리큘럼>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커리큘럼(교육과정)이란 용어에 걸맞게 각 부의 소제목에는 모두 '공부'라는 말이 들어간다. 공부의 이유(1부), 이 시대를 공부하다(2부), 희망을 공부하다(3부). 그리고 20개의 꼭지 글마다 제목과 더불어 일종의 키워드가 붙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빨간 약, 쉽게 고르지 마시라! /대중문화
정당정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민주주의
체르노빌 세계사/핵발전
고향 땅에 어린 슬픈 역사/한국 현대사
진실과 불복종의 교육/교육
<죄와 벌>을 거꾸로 읽다/문학
아름다운 하워드 진/지식인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영성

 

저자 이계삼은 책 서문에서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10대와 20대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의 고향 밀양에서 농사와 인문학을 큰 줄기로 하는 작은 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이유는 지금의 학교에서는 불가능한 '진짜 공부'를 함께 해보려는 마음에서인 듯하다. <청춘의 커리큘럼>은 그 진짜 공부를 위한 첫 길잡이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대공황기로부터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카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도로시 데이의 삶을 반추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한 언론인이었다. 먹을 것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취재하다가 그들의 남루하고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인근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고는 일생의 동역자인 피터 모린과 함께 '환대의 집'을 연다.

 

그리고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 집을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진심으로 환대해주고, 그들의 말을 밑도 끝도 없이 들어준다. 

 

저자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생각할 때 이런 그녀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라고도 얘기한다. 이런 타자에 대한 환대의 요구는 그의 미래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연민이 그의 삶을 몰고가는 에너지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다만, 그는 이것을 어느 한 개인의 성품만이 아닌 당대를 사는(혹은 살아가야할) 청춘들의 커리큘럼으로 제시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혹자를 이런 그를 두고 이상주의자 내지는 지나친 비관론자라고 혹평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절실함이 곧 우리 모두의 절실함으로 전이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마땅히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훌륭한 선배 스승들의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면 된다. 청년이나 기성세대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청춘의 커리큘럼>이 읽기에 버거운듯 하면서도 절실하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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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한티재)은 일종의 북 리뷰집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성장이 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가 읽은 책을 많이는 읽지 못했다. 저자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오늘의 교육>이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북 코너에 실린 그의 리뷰를 읽고 몇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은 정도다. 나의 지적 성장이 더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반갑게 다가온 구절이다. 

 

"1986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113쪽)

 

"그도 몰랐구나!" 나도 모르게 의식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는(도) 몰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야에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지 않고도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이명박 정부가 장악하다시피한 대한민국 공영방송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책의 제목이 '청춘'의 커리큘럼이니 이 책을 먼저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교사들이 먼저 읽기를 바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 교사들의 지적 성장이 이미 오래 전에 멈추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넘은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악담을? 적절한 근거가 있긴 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금세기에 터진 가장 심대한 인류의 재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웃나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동료 교사들의 반응은 놀랄 만큼 냉담했다. 여기서 사용한 냉담이란 단어는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나도 뒤늦게야 알게 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서 그 심각성을 말해주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반박을 하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표정이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체르노빌 이야기가 나왔으니 먼저 한 대목만 소개할까 한다. 앞부분은 저자 이계삼의 글이고, 뒷부분은 그가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간이 딱딱했고 심장이 정상이 아니었다. 네 시간 뒤에 죽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 사랑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가 죽었다. 뱃속의 아기는 그의 몸으로 흡수된 방사선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딸이, 나를, 살렸다. (…) 그렇게 작은 아이가……, 딸이 나를 지켜줬다. (…)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사랑으로! 사랑과 죽음은 왜 나란히 있을까? (…)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알려줄까? 무덤에 가면 무릎을 꿇는다. (123쪽)

 

끔찍하지 않은가? 최근에야 이슈가 되기 시작한 핵 방사능 이야기는 그렇다 치자. 꽤 오래 전 일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글을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영어교과서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머지않아'가 고작해야 이삼십 년 뒤라는 것. 그리고 그런 중요한 사실을 명색이 선생(지식인)이란 자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이 더 컸다.

 

그 주범은 햄버거였다. 햄버거를 만들려면 소가 필요하고 소를 먹이기 위해서는 초원의 풀이 필요하다. 결국은 소에게 먹일 풀을 제공할 초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마존 유역을 비롯한 지구의 열대우림이 몽땅 희생될 수밖에 없으며, 이미 그 진행상황이 가히 절망적이라는 것이 정부가 감수한 검정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수업준비를 하다가 옆에 있던 후배교사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자 즉각 이런 반응이 나왔다. 

 

"에이, 그렇게까지 되겠어요? 그 정도가 되면 무슨 조치가 나오겠지요. 그리고 요즘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거 하나 해결 못하겠어요?"

 

<청춘의 커리큘럼>1부 첫 꼭지 제목이 '공황시대의 목전에서 슈마허를 생각하다'이다. 저자가 E.F 슈마허를 천착하게 된 것은 "슈마허의 사상에는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으로서의 적정기술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 탈중심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인간 구원의 초월적 가치와 이것을 구원할 수단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핵심이다. 과학이 이만큼이나 발달했는데도? 그렇다. 아니, 바로 과학이 발달한 것이 화근일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온 삶을 먹다>의 저자 웬델 베리가 한 말이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39쪽)

 

이계삼은 원델 베리와 IT산업의 귀재 스티븐 잡스의 삶을 비교한다. 스티븐 잡스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웬델 베리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계삼이 책을 통해서 만난 웬델 베리는 스티븐 잡스가 실리콘 벨리의 총아로 전 세계의 각광을 받으며 수십 년 간 달려오는 동안, 1960년대 이후부터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43세이던 1977년에는 대학 교수직까지 사임하고 전통적 방식으로 지금껏 농사를 짓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삶을 위해 이바지했느냐고 묻는 것은 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는 우문에 가깝다. 하지만 거기에 몇 글자를 더 넣어서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바지했을까?"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저자 이계삼 생각은 어떨까? 

 

요컨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스가 추구한 첨단의 기술은 인간은 먹는 존재라는 사실, 그 먹을거리가 끊어지면 한순간도 생존할 수가 없다는 존재 조건을 한 치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첨단의 기술 문명이란 실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니겠는가.(41쪽)

 

칼 구스타프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다." 석유고갈과 관련된 사실들은 너무 많은 진실이면서, 또한 너무나 자명한 진실이다.(137쪽)


 

<청춘의 커리큘럼>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커리큘럼(교육과정)이란 용어에 걸맞게 각 부의 소제목에는 모두 '공부'라는 말이 들어간다. 공부의 이유(1부), 이 시대를 공부하다(2부), 희망을 공부하다(3부). 그리고 20개의 꼭지 글마다 제목과 더불어 일종의 키워드가 붙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빨간 약, 쉽게 고르지 마시라! /대중문화
정당정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민주주의
체르노빌 세계사/핵발전
고향 땅에 어린 슬픈 역사/한국 현대사
진실과 불복종의 교육/교육
<죄와 벌>을 거꾸로 읽다/문학
아름다운 하워드 진/지식인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영성

 

저자 이계삼은 책 서문에서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10대와 20대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의 고향 밀양에서 농사와 인문학을 큰 줄기로 하는 작은 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이유는 지금의 학교에서는 불가능한 '진짜 공부'를 함께 해보려는 마음에서인 듯하다. <청춘의 커리큘럼>은 그 진짜 공부를 위한 첫 길잡이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대공황기로부터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카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도로시 데이의 삶을 반추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한 언론인이었다. 먹을 것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취재하다가 그들의 남루하고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인근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고는 일생의 동역자인 피터 모린과 함께 '환대의 집'을 연다.

 

그리고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 집을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진심으로 환대해주고, 그들의 말을 밑도 끝도 없이 들어준다. 

 

저자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생각할 때 이런 그녀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라고도 얘기한다. 이런 타자에 대한 환대의 요구는 그의 미래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연민이 그의 삶을 몰고가는 에너지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다만, 그는 이것을 어느 한 개인의 성품만이 아닌 당대를 사는(혹은 살아가야할) 청춘들의 커리큘럼으로 제시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혹자를 이런 그를 두고 이상주의자 내지는 지나친 비관론자라고 혹평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절실함이 곧 우리 모두의 절실함으로 전이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마땅히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훌륭한 선배 스승들의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면 된다. 청년이나 기성세대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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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 이혁규의 교실수업 이야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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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학교 풍경은 신산스럽기 짝이 없다.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을씨년스런 날씨 탓도 있지만, 학생들을 맞이하는 교사들의 냉랭한 태도가 더 문제다. '3월에 아이들을 잡아야 1년이 편하다'는 말은 학교사회에서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러다보니, 3월의 학교는 마치 <아이들에게 친절한 교사 되지 않기> 캠페인이라고 벌이는 듯하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는 교사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불행하게도 극소수다. 게다가 그 물정모르는 소수의 교사들은 학교 관리자에게 무능교사로 찍히기 십상이다. 

 

왜 학생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학교에서 외려 푸대접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교육의 한 주체이기도 한 학생들은 왜 교사가 잡아야할 대상으로만 존재해야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해마다 이런 일들이 개선되지 않고 반복되는 것일까?

 

이혁규의《수업》(교육공동체 벗)을 읽다 보면 그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습속이 지니는 무서운 보수성' 때문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시선이 왜 필요하고 중요할까? 우리들 대부분이 낡은 습속의 늪에 안주하면서 구질서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간파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행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어릴 때부터 몸에 내면화된 습속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는다. 문제는 습속의 힘이 너무 근본적이어서 그런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9쪽)

 

낡은 습속을 넘어서-우리 교실 들여다 보기

 

그의 '낯설게 보기'의 첫 대상은 교실이다. "교사들은 수업을 하면서 자신의 수업 행위에 대해서 이런저런 반성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반성이 교실의 시공간의 문제에까지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학생들의 요구나 동기와는 상관없이 40~50분 단위로 교과를 배우도록 설계된 시간 운영의 문제가 반성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것은 교사의 현실로 간주된다."라고 지적한다.        

 

'네모난 교실' 혹은 '네모난 시간표'는 교사들에게나 학생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터다. 결국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고안해낸 것일 뿐. 저자는 시간표에 의해서 관할되는 학교의 리듬 또한 근대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교사들에게 그것이 불변의 현실로 간주되어온 것은 앞에서 언급한 '습속의 힘' 때문이다. 무섭지 아니한가? 그는 이렇게 권면한다.        

 

왜 교실에서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학생들을 제자리에 앉혀두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왜 교실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경험했는지를 묻는 대신에 정해진 시간 내에 수업을 마쳤는지를 더 중시하는 지를 성찰해보는 것. 질서와 통제와 훈육과 표준화 대신에 학습과 소통과 성장과 다양성을 더 중시하는 교실의 시공간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 그런 물음과 성찰과 고민들이 배움과 학습의 위기를 노정하고 있는 근대 교육을 전복할 수 있는, 파괴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열림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28쪽)

 

수업의 출현과 교사의 탄생-교사, 가르치는 존재로서의 성찰

 

이 책에는 수업의 기원에 관한 흥미 있는 일화가 소개된다. 독일의 교육학자 쉰켈의《수업 현상학》에 나오는 이야기를 저자가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신석기시대쯤일까? 거기에 활 만드는 기술을 거의 예술의 경기까지 심화시킨 활 제작자가 한 사람 살고 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활 제작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온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소년을 쫓아버렸던 활 제작자는 계속 찾아오는 소년의 열정에 감동받아 어느 순간 활 제작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수업 현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활 제작자는 활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고민과 관심거리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그는 활 만드는 기술의 진보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소년을 더 잘 가르칠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된다.(33쪽)

 

이 일화에서 저자는 수업이 발생하는 최초의 상황에서 활 제작 기술을 배우려고 먼저 시도한 쪽이 아동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물론 오늘날 학생들은 교사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배워야 할 내용이 가르치는 존재 속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에서 인격성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점들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만 간주될 때 교육의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를 다른 전문직과 같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역할 수행자로 자리매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교육의 위기가 배태된다. 가르치는 행위를 가르치는 존재의 인격성과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이제 교사의 몸과 품성으로부터 배우는 교육의 전통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근대교육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여기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38쪽)

 

스승에서 교사로, 교사에서 로봇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근대 교육의 불안한 묵시록을 접하게 된다. (40쪽)

 

이에 대한 해법의 하나로, 그가 프랑스 교육학자 랑시에르의《무지한 스승》에서 소개한  조세프 자코트의 예를 든 것은 퍽 인상적이다. 정치적인 상황으로 네덜란드로 망명한 자코트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자코트 자신은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 권의 프랑스-네덜란드 대역판만으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무지한 스승은 도대체 어떻게 학생들에게 성공적인 학습이 일어나도록 만들었을까?     

 

그가 가르친 것은 구체적인 학습 내용이 아니다. 그가 유일하게 무엇인가를 가르쳤다면 그것은 누구나 스스로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환기시키고, 배우는 것이 가치 있다고 학습자의 의지를 각성시킨 것이다. 이 무지한 스승의 모습에서 필자는 미래 교육의 출구를 본다. 교사가 학생보다 많은 것을 알고 지적인 우위에 서서 계몽적인 가르침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역할에서 휴먼로이드 로봇은 인간의 능력을 곧 뛰어넘을 지도 모른다.(42쪽)

 

학생, 배우는 존재에 대한 성찰
 
학생이란 어떤 존재일까? 솔직히 이런 물음은 좀 생뚱맞다. 물음을 던지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는 그런 물음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사도 학생도 어떤 역사적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동의 탄생은 학교라는 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학교의 성립은 성장기 아이들의 감금(!) 과정이 제도화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견 과격한 주장 같지만 다음 글을 읽어보면 십분 수긍이 간다.  

 

학교 교육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교육은 아이들이 성인과 함께 살고 더불어 배우고  생산 활동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던 현재적 시제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해 근대 학교는 아이들을 사회에서 분리하여 학교에 수용함으로써 교육의 의미를 성인기를 위한 준비 과정, 즉 '미래'를 위한 것으로 변모시켰다.(46쪽)

 

학생 개개인의 입장에서도 학생기의 지속적인 연장은 점점 감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욕망을 억제해야하는 기간이 길어지는데도 유예를 통해서 얻는 이익이 점점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52쪽)

 

이혁규의 교실 이야기《수업》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책의 미덕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게 하는 데 있다.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답을 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하여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미덕은 물음을 던지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는 결코 몽상가가 아니다. 다분히 진보적이지만 사유의 결이 온유한 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해야 할 일도 꼼꼼히 챙겨서 제시한다.  

 

학습은 미래를 위한 준비일까 현재를 충실하게 영위하기 위한 것일까?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동물보다 오랜 시간 동안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인간 종의 특성을 고려할 때 교육의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특성을 지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정도이다. (…) 현재 한국 학교의 학생들은 미래의 욕망을 위해서 현재를 거의 100%로 유보하기를 강요받는다.(58쪽)

 

학생들이 지닌 각자의 생각이 무시되지 않고 교실에서 다양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아름답게 퍼져 나가는 그런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닫힌 상호작용 패턴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 학생들이 먼저 발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그런 능동적인 탐구적 대화가 가능하다도록 하는 것! 교사와 학생의 불평등한 관계를 변화시켜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상호 간에 대화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92쪽)

 

이혁규의《수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2부 <가까이서 멀리서>는 행동적 수업 목표', '수업 지도안', '수업연구대회', '수업 방식과 입시의 관계', '교실 테크놀로지'를 다룬다. 이런 요소들도 반성의 소재로 잘 부각되지 않을 만큼 교사 사회의 익숙한 일상 혹은 관행들과 관계 맺고 있다. 이런 요소를 때론 밀착해서 때론 원거리에서 살펴봄으로써 교사 문화의 낡은 습속에 대해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3부〈새로운 성찰과 실천을 위하여〉에서는 '교과를 넘어서는 상상력', '가르치는 활동의 예술성', '학습자 중심 교육의 의미', '교원양성체제의 문제', '혁신학교로 상징되는 학교개혁 문제'를 다룬다. 1부와 2부에서 다룬 주제들과 비교해 볼 때 교실이나 단위 학교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미래의 학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들을 모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지만 우리 교육의 난맥상은 풀리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심화될 조짐이다. 교육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 아마도 그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 너머를 상상하거나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자기 성찰과 상상력의 빈곤은 우정의 연대와 협동의 노력으로 넉넉히 넘어설 수도 있는 현실의 장벽을 소름끼치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둔갑시켜놓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소망한다. 내가 혹시라도 빠져 있을 지도 모를 낡은 습속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이를 위해 내게 익숙해진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무엇보다도 내일이면 만날 아이들을 위해 가르치는 존재로서의 성찰을 통해 새로이 태어날 수 있기를. 

 

중요한 것은 자기 성찰이나 상상력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모르는 이혁규의 <수업> 이야기를 독자들께 강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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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지 않을 권리 - 교과서에는 없는 세상을 만나다 청소년 벗
한다솜.서수민.김해솔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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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아침은 아주 조용합니다. 주택가엔 저만치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그런데 왜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어르신들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요? 밤마다 분노를 삼키는 울음도 듣지 못한 채 죄 많고 가벼운 아침을 보내왔습니다.’

 

글이 퍽 서정적이면서도 결기가 느껴진다. 누가 쓴 글일까? 그리고 글쓴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글을 좀 더 따라가 보자.

 

‘제가 송전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지난 1월 이치우 할아버지께서 분신하신 일을 신문 사이에 있는 전단지에서 보고 나서부터입니다. 하루 종일 용역과 몸싸움을 하신 이치우 할아버지께서는 “오늘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몸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바로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깨닫고는 친구들에게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 한동안 무엇에 짓눌린 듯한 느낌에 답답했습니다. 곧 저는 그것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을 덜 느끼기 위해서라도 저는 무언가는 해야만 했습니다.’

 

‘하늘 아래 가장 높다는’ 고3 여학생인 한다솜(밀양 밀성고) 양이 쓴 글이다. 배우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밀양(密陽)으로 한 때 인구에 회자되었던 경남 밀양은 지금 그곳에 세워질 송전탑 문제로 한참 속앓이 중이다.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도시로 공급하기 위한 총 162개의 송전탑 중에 69개가 밀양에 세워진다는 것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글쓴이도 밀양에 살고 있으니 그걸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고3인 여학생이 그 사실을 안다고 어쩌겠는가? 코앞에 닥친 대학입시를 핑계로 외면해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한다솜 양을 비롯한 이 책을 집필한 17명의 청소년 필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직 학생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에겐 우리의 삶과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사회에 대해 외면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온갖 고초를 다 겪어 내면서 교과서에는 없는,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던 세상을 만난다. 한다솜 양의 증언이다.

 

‘송전선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데에도 공통된 의견을 보였습니다.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송전탑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는 기대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율학습이고 계발활동이었지요. 나뚜레 활동을 하면서 저희는 학교가 가르쳐 주지 않은 사회의 이면을 스스로 찾고 개선하려 노력하면서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20쪽)

 

‘불량 학생’ 클럽 나뚜레(NATURE)는 학교 환경동아리 이름이다. 나뚜레 회원의 90% 이상은 고3학생이다. 무한 경쟁인 사회의 첫 관문인 입시 전쟁을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지칠 법한데도 주말을 아껴 동아리 활동을 했다. 부족하면 점심시간도 반납했단다. 오직 공부, 성적 명문대 입시만을 바라는 학교 안에서 말이다. 그러니 그들 스스로 ‘불량 학생’ 클럽이라고 이름 붙일만하지도 않은가.

 

동두천 외고 중국어과 학생인 유호준 군도 역시 고3이다. 그는 ‘마음이 가는대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에서 ‘나름’ 연대하고 있으며, 항상 씩씩해보여도 나름대로 감상적이고 마음이 여린, 눈물이 많은 18세 소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가 쓴 글을 읽다보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도 한다.

 

‘밤에 분향소에서 잠을 잘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쌍용차 분향소가 아니었으면 제가 언제 덕수궁 돌담 옆에 누워 서울광장을 마당으로 삼고 환상의 스카이라인과 함께 잠을 잘 수 있겠어요.” 그렇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학민국에서 많지 않을 것입니다.’(33쪽)

 

그렇다고 그의 사회참여가 청소년의 감상이나 치기의 산물인 건 결코 아니었다. 오랜 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던 2009년 7월, 그는 뉴스를 통해 쌍용차 평택 공장에서의 정리 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옥쇄 파업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이돌 그룹의 신곡발표나 프로야구에 관심을 쏟으며 외고에 진학하고자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는 평범한 한국의 중학생일 뿐이었다. 그의 증언이다.

 

‘그리하여 외고 진학에는 성공했는데, 외고에서 상상을 초월한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처사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인권운동에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인권운동을 통해서 서울대학교 법인화 반대 투쟁을 우연히 알게 돼 연대활동도 하였고, 이 투쟁을 통해 만난 여러 동지들과 지난해 희망버스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37쪽)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만약 그가 외국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그는 남다른 외국 유학의 경험을 통해 산소의 맛이 다른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으리라. 마치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말이다. 물론 그에게도 갈등과 혼란의 순간들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그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그는 ‘순진하게도 1차, 2차, 3차 희망 텐트를 이어가다보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더 이상의 죽음도 없으리라’ 생각하며 1차 희망 텐트에 참여했고, 지난 3월, 스물두 번째 비보를 접하면서 결국은 고3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그래도 가끔 들러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어느 날 제가 외고 중국어과라는 것을 기억하고 계시던 분께서 분향소를 소개하는 글을 중국어로 번역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해서 그분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번역하는 게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글 속에서 마주한, 공권력에 의해, 자본에 의해, 이 사회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스물두 분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살아남은 분들의 외롭다는 절규,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절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규를 더 이상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38쪽)

 

다양한 사회 문제를 직접 보고 경험한 청소년들의 기록이자 증언인 이 책에는 우리 사회의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성찰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다. 때론 거친 목소리로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우리 사회의 병폐에 대한 통찰력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예리하다. 필자들은 그들의 사회 참여를 못마땅해 하는 어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대견하다”, “기특하다”고 하는 시선도 거부한다. 그들은 입시가 전부인 학교에서 인간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다름 아닌 ‘건강한’이라는 형용사였다. 또한, 오래 전 청소년 시절에 본 ‘그로잉 업’이라는 영화의 장면들도 함께 떠올랐다.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과 성장을 다룬 이 영화는 한마디로 ‘엄청’ 야한 영화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 영화를 갑자기 떠올리게 된 것도 바로 ‘건강한’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당시 한 영화평론가가 이 영화를 ‘건강한’ 영화라고 평한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청소년들의 성적 일탈을 그린 야한 영화가 건강하다니?

 

‘건강’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몸이나 정신에 아무 탈 없이 튼튼함’이라고 나와 있다. 이 말은 곧 ‘제대로 된 자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영화평론가는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이나 일탈을 ‘제대로 된 자람’을 나타내는 한 증표로 여겼음직하다. 어려운 추론도 아닌데 그땐 왜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무지했던 탓이리라. 다행히도 그 후 나는 지적으로 조금씩 성장하면서 그 영화평론가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험한 사회적 일탈로 이해될 수도 있는 청소년 필자들의 불온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제대로 된 자람’을 목도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불의한 현실에 맞서다’는 국가와 그 비호 아래에 있는 자본의 폭력성을 이야기한다. 2부 ‘공존을 생각한다’는 개발로 인한 환경문제를 다뤘다. 3부 ‘대안을 찾아 나서다’는 교육과 사회의 한계에 맞선 청소년들의 권리 찾기 움직임을 담았다. 물론 청소년 필자들이 직접 체험하고 발품을 팔아 쓴 생생한 증언의 기록들이다. 몇 개의 제목이나 몇 구절의 글만 뽑아보아도, 건강하고 싱싱한 냄새가 확 풍긴다.

 

-소비하는 삶에서 자립하는 삶으로-탈핵, 새로운 문명에의 길

-도요새는 떠나고 짱뚱어는 운다-파괴된 생명의 고향 새만금을 걷다

-미래에 대한 불안의 끈을 놓다-비판은 기본, 거부는 전략! 대학입시거부

-정치는 왜 19금인가요?-내놔라! 청소년 참정권

-자급자족의 가능성을 찾아나서다-나의 농사 유학기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자립’이다. 올해부터, 도시 속의 조그만 땅과 자투리 공간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먹거리 자급을 위한 농사는 자립에 매우 중요하다.(101쪽)’

 

‘사실 대학입시거부의 대안은 ‘아직’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대학입시거부운동이 존재한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 삶은 지금으로서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곳에 길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대안은 우리가 들고 나와서 내밀어야하는 숙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당연히 보장해야하는 것이다.(186쪽)’

 

‘위대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한다.’

 

니체가 한 말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외면해도 좋을, 오히려 외면하는 것이 학생답고, 모범적이고, 심지어는 건강한 징후로까지 여겨지는 상황에서 외면하지 않겠다고, 외면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사랑하지 않아도 탓할 사람이 없는데도 그들은 굳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하여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어른들이 먼저 읽기를 바란다. 물론 그 중에는 교사도 포함된다. 이 책을 펴낸 ‘교육공동체 벗’ 편집부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학교와 교사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직면할 현실을 말해줄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교육에는 탈정치의 굴레가 견고하게 씌워져 있고, 교과서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런 상황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사들 또한 현실을 배운 바 없고, 재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 경쟁의 승자로서 교단위에 서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책을 덮으면서 문득 ‘진정성의 혁명’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책의 어린 필자들이 내게 전해준 일종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를 혁명을 하고 싶어졌다. 그들이 손수 모범을 보여주었듯이, 입시교육에 병들어 더 이상 손보고 말 것도 없이 돼버린 현실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싶어졌다. 그런 갈망과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해준 이 책과 청소년 필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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