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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ㅣ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평점 :

현대 러시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삶과 운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이 대작은 독일군이 스딸린그라드를 포위한 1942년 9월 말부터 1943년 4월까지 약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을 담고 있다. 국내의 많은 작가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올해 6월 창비 출판사의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3권 세트로 출간되었다. 『삶과 운명』은 두 전체주의 세력인 독일의 파시즘과 스탈린 체제의 공산주의 정권, 그리고 전쟁에 희생된 인간의 삶과 찢겨 나간 시대를 다룬다.
『삶과 운명』은 총 3부로 이루어졌고 각 장은 독립된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방대한 작품을 요약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세 가지 축을 들자면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 스딸린그라드 전투, 물리학자 시뜨롬과 그 가족들이다. 이 대작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며 실존했던 인명도 언급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한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시대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전체주의 체제는 인간성 자체를 벗겨냈다. 그간 프리모 레비의 책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에디트 에바 에바 에거의 <나는 마음감옥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등 수용소 문학을 통해 나치가 벌인 제노사이드는 글로는 접했다. 인간은 '우리'와 '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종이다. 인간성이 미치는 영역은 '우리'에 한정한다. 거칠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간 나치를 통해 우리가 '그들'을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목격했다면, 이번 작품을 통해 스딸린 정권이 보여준 우리가 '우리'를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알게 되었다. 가령 스딸린의 집단화 정책은 그의 체제에 속한 농민들을 굶겨 죽였다. 배를 곯다가 미쳐 버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가족 내 식인 행위가 상상 이상으로 빈번했던 시기였다. 스딸린 체제에서 나름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굶지는 않았겠지만 스딸린의 신임,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우정, 사랑, 관계 같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즉 진정한 당성 의식은 역설적으로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인간이 당성 의식과 충돌될만한 것 자체를 보존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라도 당의 노선에 위배되는 언행의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아주 사소할지라도 언제든지 신고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현대 러시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삶과 운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이 대작은 독일군이 스딸린그라드를 포위한 1942년 9월 말부터 1943년 4월까지 약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을 담고 있다. 국내의 많은 작가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올해 6월 창비 출판사의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3권 세트로 출간되었다. 『삶과 운명』은 두 전체주의 세력인 독일의 파시즘과 스탈린 체제의 공산주의 정권, 그리고 전쟁에 희생된 인간의 삶과 찢겨 나간 시대를 다룬다.
『삶과 운명』은 총 3부로 이루어졌고 각 장은 독립된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방대한 작품을 요약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세 가지 축을 들자면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 스딸린그라드 전투, 물리학자 시뜨롬과 그 가족들이다. 이 대작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며 실존했던 인명도 언급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한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시대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전체주의 체제는 인간성 자체를 벗겨냈다. 그간 프리모 레비의 책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에디트 에바 에바 에거의 <나는 마음감옥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등 수용소 문학을 통해 나치가 벌인 제노사이드는 글로는 접했다. 인간은 '우리'와 '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종이다. 인간성이 미치는 영역은 '우리'에 한정한다. 거칠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간 나치를 통해 우리가 '그들'을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목격했다면, 이번 작품을 통해 스딸린 정권이 보여준 우리가 '우리'를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알게 되었다. 가령 스딸린의 집단화 정책은 그의 체제에 속한 농민들을 굶겨 죽였다. 배를 곯다가 미쳐 버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가족 내 식인 행위가 상상 이상으로 빈번했던 시기였다. 스딸린 체제에서 나름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굶지는 않았겠지만 스딸린의 신임,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우정, 사랑, 관계 같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즉 진정한 당성 의식은 역설적으로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인간이 당성 의식과 충돌될만한 것 자체를 보존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라도 당의 노선에 위배되는 언행의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아주 사소할지라도 언제든지 신고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은 군인과 시민이 모두 동원된 총력전이었고, 전무후무한 무차별 살육이 자행된 전쟁이었다. 저자 바실리 그로스만은 우끄라이나 유대인 지식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평생 스딸린 체재의 검열과 압제에 시달렸다. 저자가 처음부터 반체제 작가는 아니었다. 처음엔 친체제 작가였고,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자원하여 종군기자가 되었다. 그는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치가 저지는 만행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한 뒤 독일인들에게 저지른 만행도 목격했다. 저자는 나치즘과 스딸린주의를 거울처럼 비추고, 히틀러와 스딸린을 형제로 간주한다. 전체주의는 개개인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고 영혼까지 노예화시켜 체제 유지의 도구로 활용한다. 전체주의가 인간성을 벗겨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까지 대할 수 있는지 『삶과 운명』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이 작품이 인간의 악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강을 불태우고 인간의 육신을 찢어 발기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과 낭만을 잃지 않는 소련군과 부하들을 뻔히 보이는 사지에 내몰지 않기 위해 당의 지시를 거역하는 간부도 있다. 수용소에서도 서로에게 빵을 양보하는 이들은 존재했다. 사람들이 낙관적이면 낙관적일수록 더 작은 것에 연연하고 이기적으로 구는 모습을 보인다는 문장을, 속에 지닌 슬픔이 크면 클수록 생존의 희망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많음이 넓고 더 선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더라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삶과 운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문장들이 형태를 갖추어가며 조금씩 뭉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역사 관련 책들도 다시 펼쳤다. 스딸린그라드의 강이 불타는 장면을 읽다 보니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가 상세히 알고 싶어졌다. 『삶과 운명』은 역사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깊게 읽고 싶은 마음을 안겨주었다. 양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시대가 저버렸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냈던 인간들의 삶과 이 평범한 인간들이 행한 선악을 읽고 나니 이전의 나에서 몇 발짝 옆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책은 읽기 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도록 한다. 『삶과 운명』은 내게 그런 책이다.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하여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