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책세상 세계문학 12
샬럿 브론테 지음, 신해경 옮김 / 책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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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나는 학급문고에 꽂혀 있는 청소년용 『제인 에어』를 읽었었다. 그때 읽었던 『제인 에어』는 원작을 편집되고 각색되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굳센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성장 서사였다. 그리고 제인 에어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남성 로체스터와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둘만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의 부모 나이가 된 지금 나는, 『제인 에어』를 다시 읽었다.


1847년 31살의 샬럿 브론테는 '커러 벨'이라는 남자 가명으로 『제인 에어』를 출간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어여쁜 외모를 가진 순종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주인공이 대세였다. 반면 소설 『제인 에어』 속 주인공 제인은 눈길을 잡아끄는 금발의 상냥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에 당시 기준엔 드센 성격(오늘날 우리는 이를 '독립적'이며 '의지가 강하다'라고 표현한다)을 가졌다. "어려서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 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종속되어 일평생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환경에서 『제인 에어』는 처음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정신, 욕망하고 능동적 주체의 여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P760, 신해경).



『제인 에어』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성인 독자인 나는 먼저 신해경 번역가가 쓴 작품 해설부터 읽었다. 신해경 번역가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제인 에어』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초 영국으로 산업혁명에 따른 상공업 발달과 식민지 경영 등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부에 기반한 중산계급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지던 시기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젠트리 계급 출신으로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부에 기반하여 그들의 사회 경제적 삶을 영위한다. 당시 시대에서 경제적 곤궁이나 몰락은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착각하는) 인간적인 품위나 존엄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또 당시 영국 사회의 법은 결혼한 여성에게 어떠한 법적 지위나 권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부유한 계급의 여성이라도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소유물이 되었다. 한편 제인 에어가 가정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제인 에어의 계급 덕분이다. 제인이 학교에 입학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아무리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아가씨’였어도 어쨌거나 ‘제인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가 보여주는 강인한 정신력과 삶에 대한 의지는 학교 교육을 받기 전부터 두드러지며, 학교에 입학해서도 제인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제인이 학교에서 받는 처우를 읽다 보니 예전에 구입해서 읽었던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중 그의 학창 시절에 대한 글 《정말, 정말 좋았지》가 떠올랐다. 조지 오웰이 학교를 다니던 20세기 초 영국 사회는 아동이나 학생에 대한 인권 개념이 지금과 달랐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을 계급에 따라 특혜를 주거나 철저하게 차별했다. 이 가혹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무척 심란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이 형식적인 존엄이 얼마나 역사적이며 최신의 발명품인지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다시금 떠올렸다.
한편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제인 에어가 학교 교육을 무려 8년이나 받았다는 점이다. <작품 해설>을 보면 ‘당시로서는 상류계급의 여성들도 받기 힘든 학교 교육을 8년이나 받은 제인 에어는 말투와 억양만으로도 어디를 가나 상류계급 출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라고 나와있다. 제인 에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직업인 가정교사는 제인 에어가 상류계급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제인 에어가 세상이 불합리한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태도는 이러한 환경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이해할 수 있다.

제인 에어가 겪었던 삶의 난관들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근대적 여성의 주제적 삶을 다룬 최초의 소설이었고, 주류의 억압적 질서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용기 있게 냈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온갖 것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깨닫게 된다.
제인 에어 겪었던 삶의 난관들 중 어떤 것들은 이제는 꽤 낯선 것이 되었고 어떤 것들은 표출되는 형식이 조금 변했을 뿐 여전히 현실에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시공간과 환경과 계급에 따라 각자 다른 것을 겪는다. 누군가는 겪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누군가는 겪어야만 한다. 누군가는 삶에서 당연시되는 것들이 누군가는 오직 상상에서만 존재한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소설 『제인 에어』는 인간의 역사에서 개개인별로 삶의 조건들이 얼마나 우연적인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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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 소설, 향
최정나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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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는 출판사 작가정신의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 향'의 열 번째 작품으로 젊은작가상 수상자인 최정나 소설가의 첫 중편소설이다. 출판사 책 소개에 따르면 이 소설은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고 가해자는 없는 세계 폭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이 소설의 시작은 아동학대의 피해자인 주인공 로아가 병실에 누워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아는 어느 날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아 병실에 입원했다. 로아는 아동학대를 비롯하여 학교폭력, 아동성추행 등 여러 학대의 피해자였다. 로아는 의식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학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로아는 이 시도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보기 위함이다. 로아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로아는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는 방법으로 자신을 학대했던 가해자(그녀의 언니, 상은)가 되어보기로 한다. 로아는 상은의 눈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회상한다. 소설은 로아가 "너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본다"라고 말한 이후부터는 로아를 가혹하게 학대한 로아의 일곱 살 많은 언니 상은이 화자가 되어 전개된다.

열네 살 상은은 일곱 살 어린 동생 로아를 잔인하게 폭행한다. 아주 계획적이고 주도 면밀하게. 열네 살짜리 소녀 상은은 폭력이 주는 통제감과 쾌감을 순식간에 깨우친다. 


상은은 왜 이런 괴물이 되었을까. 저자는 상은을 방치한 부모를 등장시킨다. 먼저 상은에겐 자신을 방치한 엄마 기주가 있다. 기주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져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엄마다. 기주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던 엄마이며 상은에게 가혹하게  폭행을 당해도 죽지 않기 위해 거짓 미소를 짓는 로아를 보고도 "태어나자마자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얻은 생존법과 같은 거라고 기주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기주는 상은이 악다구니를 쓰고 날뛰어도 로아를 그 지경으로 폭행했어도 방치한다. 기주에게 엄마 역할은 용돈이나 쥐여주면 되는 것이다. 즉 돈을 쓰면 할 일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기주는 자기 연민에 빠져 위로가 필요할 땐 남자를 찾는다. 그런 엄마를 두고 상은은 "자신의 쾌락과 생명 유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생존을 이어갔다"라고 표현한다. 상은의 아빠는 한때 주목받은 신진 예술가로 거리의 풍경을 기록사진으로 남기던 사람이었다. 그의 사진은 군중이 모인 거리에서 발생한 다툼과 폭력을 찍었다. 상은의 아빠는 유서도 없이 다리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삶을 끝냈다. 상은은 아빠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던 그날 밤 아빠와 다투다가 그에게 "나가...... 나가 죽어버려!"라고 발작하듯 외쳤었다. 이 기억은 오로지 상은에게만 있는 것이고 엄마 기주는 왜 남편이 자살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상은은 아빠가 죽은 이유를 로아의 탓으로 돌린다. 상은은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내게 결핍을 주는 존재였지만 죽은 후에는 아니었다.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죽어서 내 것이 되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되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라며 아빠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의 욕망에 맞게끔 편집하여 간직한다. 상은은 부모의 애정을 갈구했지만 받지 못했고 이 결핍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로아에게 돌린다. 상은은 결핍에서 시작되어 동생 로아를 때렸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가 주는 쾌감과 통제력 권능감에 빠져든다. 상은은  폭력이라는 인간악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엄마 기주는 그런 딸 상은을 내버려둔다. 상은이 로아를 잔인하게 폭행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둔다. 




왜 이 세상에는 피해자만 있을까,

가해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로아의 언니 상은은 본인이 받았어야 했을 사랑을 로아 때문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상은은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불안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상은은 본인이 느끼는 결핍과 불행의 원인을 로아에게 찾는다. 상은에겐 자신을 방치한 부모가 있다. 상은은 본인이 받았어야 할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했고 로아가 이를 빼었었다고 생각한다. 상은은 스스로 슬퍼하고 분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빌미로 동생 로아를 잔인하게 폭행하지만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상은은 스스로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하니까.


이 소설을 다 읽으면 김이설 소설가의 말처럼 곧바로 소설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읽게 된다. 상은의 목소리와 로아의 목소리를 조금 더 예민하게 구분하면서 읽는다. 나는 이 소설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 방치, 무관심, 용인 등에 대해 죄를 묻고 심판하는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인간악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나는 인간 동물의 본성에 기인한 폭력성에도 주목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주로 들리는 목소리와 이로 인해 구성되는 우리 의식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로아는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길래 때리면 맞고 살기 위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을까. 상은은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길래 인간 삶에 따라붙는 불행과 슬픔을 다른 사람에 전가했을까. 기주는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길래 그의 배에서 나온 두 딸을 그렇게 방치했을까. 우리 모두는 지금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길래 이러한 폭력의 연쇄를 읽고 또 읽는 것일까.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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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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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은 『북극을 꿈꾸다』로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배리 로페즈(1945-2020)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역작이다.
배리 로페즈는 리베카 솔닛, 마거릿 애트우드 등 걸출한 작가들의 작가이자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 등으로 불린다. 배리 로페즈는 전 세계 약 70여 개 국을 여행하며 평생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국내에서는 이 책을 포함하여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와 『북극을 꿈꾸다』 총 세 권이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북태평양 동부, 캐나다 북극권, 갈라파고스 제도, 아프리카 케냐, 호주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겪고 사유한 것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그가 주로 사오십 대 시절에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

배리 로페즈는 평생 동안 전 세계를 방랑하고 여행하며 묻고 또 묻는다. 인간, 자연, 문명, 시간, 장소, 관계, 협력, 연민, 삶의 의미 또는 무의미 등. 극히 좁은 장소에서 극히 적은 경험만을 하고 사는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준다. 현대의 억압적 사고방식 중 하나로 우리가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다는 것조차 쉽게 인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익숙한 장소를 벗어났을 때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관찰한다.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역작 『호라이즌』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여행 에세이로도 읽을 수 있고 인문 에세이로도 읽을 수 있다. 나는 저자의 책 세 권을 모두를 현대 서구 문명에 대한 비평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들과 함께 꽂아 두었다. 그 근처에는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와 웨이드 데이비스의 『사물의 표면 아래』가 있다. 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질문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배리 로페즈의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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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와 무민의 첫 겨울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
이유진 옮김, 토베 얀손 원작 / 어린이작가정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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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무민이 탄생한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무민은 핀란드 작가 토베 얀슨이 1945년 『무민 가족과 대홍수』를 출간하면서 세상에 선보인 캐릭터이다.
이 책 『무민 골짜기와 무민의 첫 겨울』은 어린이작가정신 출판사에서 나온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으로 명품 고전인 무민 시리즈를 어린이의 눈높이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번 책에서는 무민 골짜기의 어느 추운 겨울밤 무민 가족들은 긴 겨울잠에 빠져 있는데 무민은 혼자 깨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겨울이 무민에게 첫 겨울인 이유는 무민 가족은 언제나 11월부터 4월까지는 긴 겨울잠을 잤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야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무민에게 홀로 겨울잠에서 깬 것은 처음 겪는 일이다.
깜짝 놀란 무민은 우선 무민마마를 깨워보려 한다. 그러나 엄마인 무민마마는 일어나지 않는다. 호기심이 강한 무민은 혼자 집 밖을 나가보기로 결정한다. 집을 나서면서 무민은 집 밖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을 겪는다.

한편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조금 이상한 밤 동물들이 무민 골짜기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무민은 “가족들이 자는 동안 우리 가족 물건은 내가 지킬 거야”라고 말하지만 곧바로 이 동물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집에 있는 잼을 대접하기로 결정한다.

이 조금 이상한 밤 동물들은 아무도 존재를 믿지 않던 온갖 생명들이다. 편견 없고 다정한 무민은 밤 손님들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 하나를 깨트리기도 하고 혹시 누가 밖에 남아 있나 살피러 나가기도 한다. 이 다정하고 착한 무민은 모두를 환대한다.

한편 무민의 손님들 사이에는 환대 받지 못하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는 ‘헤물렌’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놋쇠 호른을 부르고 스키처럼 생긴 것을 탄다. 다른 손님들은 헤물렌이 시끄럽다고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무민도 처음에는 헤물렌을 집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물렌이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집 밖에 스키 타기에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속여 헤물렌이 스스로 나가게끔 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그 장소는 ‘외로운 산’에 있는 위험한 언덕이다. 이것을 모르는 헤물렌은 기뻐하며 그 장소로 떠난다.
헤물렌과 다른 밤 손님들 간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 속에서 무민의 갈등과 결정들은 이 동화책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


무민 캐릭터의 귀여움은 알고 있었지만 동화책을 직접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화책을 읽다가 문득 무민은 무슨 동물일까 궁금해서 찾아 보았더니 무민은 저자의 가족이 만들어낸 상상속의 캐릭터이며 원래는 무민트롤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늘 모험을 떠나고 누군가를 만나고 성장하여 돌아온다. 무민 역시 이 동화책에 집 밖을 나서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갈등을 겪고 선택을 내린다. 무민마마가 다시 깨어났을 때의 무민은 이전의 무민이 아니다. 질서와 규칙을 세우고 보호를 제공하는 무민파파와 무민마마가 잠든 집에서 무민은 집을 보호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무민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낯선 밤 손님들을 환대해야한다는 마음이다. 무민이 타인을 향해 베푸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기억에 남는다.
얼굴은 하마와 닮았지만 직립보행하는 이 새하얗고 평화롭게 생긴 캐릭터 무민을 만약 어린 시절에 만났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결이 고운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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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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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예찬
앙리 라보리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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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예찬』은 로베르라퐁출판사가 기획한 사상총서 가운데 하나로 1976년에 출간되었다. 이 총서는 ‘삶의 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생각’이라는 주제를 사유하기 위해 각계 저명인사에게 주제 20개를 제시하였다. 이 책의 저자인 앙리 라보리는 외과 의사이자 신경생물학자, 철학자이다(그는 최초의 신경안정제 클로르프로마진을 개발하여 의학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이 맺는 사회적 관계, 사회 구조에 관해 이야기한다. 국내에서 특히 사랑받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이 책 『도피 예찬』을 인생 책으로 꼽았다고 한다. 


출판사 책소개 페이지에서는 이 책을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사회적 상황에 놓인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분야를 해석한 책’이라 소개한다.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을 두루 섭렵한 라보리는 이 책에서 인간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나 목적, 우리가 맺는 사회적 관계 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라보리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생물학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고, 수정란일 때부터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프로그래밍 됐으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것 말고는 존재 이유가 없다.”(p12)고 말한다. 또 1장 <자화상>에서 그가 얻은 유일한 확신은 “모든 생각과 판단, 논리(적이라고 자평하는) 분석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구, 다시 말해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 자기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노력이 지나지 않는다”(p11-12)고 말한다. 신경생물학자 다운 통찰이다. 인간은 생태적 환경의 구성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고 생태적 환경은 우리에게 스며들고 고착되며,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우리의 신경계는 우리가 인간으로 구실하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과 아닌 것을 배워나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에밀리 부틀의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병행하여 읽었다. 진정성 문화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진정한 자아’, ‘진짜 나’란 라보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발현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다른 인간들과 공유한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한 대립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대립은 반드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서열을 만든다. 한 사람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인의 욕구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저항하거나 도피할 수 있다. 저항은 보통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고 ‘독자적인 저항은 정상을 자처하는 비정상적 다수에 의해 신속하게 그 싹이 제거되기 때문’(p17-18)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도피뿐이다.



라보리에 따르면 도피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향정신성으로 분류되는 의약품을 먹을 수도 있고 정신 줄을 놓기도 한다.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고 홀로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한편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즉 상상 속으로 도피하는 방법도 있는데 라보리에 따르면 이 방법은 뒤쫓길 위험이 거의 없고 심지어 광활하고 만족스러운 영토를 손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보리는 이 책에서 사랑, 인간 존재, 유년기, 타인, 자유, 죽음, 쾌락, 행복, 노동, 일상, 정치, 신앙 등 우리 삶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과학주의를 강조하는 신경생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내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종(동물)인 동시에 흔히들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동물임을 줄곧 의식하게 된다. 그의 글은 이 책의 출판사에서 말한 것처럼 ‘과학적인 동시에 시적’이다. 



라보리의 『도피 예찬』을 읽다 보니 수십 연간의 학문과 경험을 녹여낸 묵직하고 밀도 높은 에세이라는 점에서 제롬 케이건의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가 떠올랐다. 석학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본인의 연구 분야를 넘어 다양한 학문을 횡단하며 촘촘하게 연결된 사유를 보여준다. 이런 책들을 읽고 또 읽는 순간 내 신경계에는 ‘인류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지식의 상속’(p119)이 일어난다.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에 지친 흔하디흔한 현대인 중 한 명인 나는 이러한 책으로 도피를 한다.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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