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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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다』는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멀리 일본의 북단 홋카이도에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희생당한 분들의 유골을 30여 년에 걸쳐 발굴하고 그 유골을 고국으로 송환하여 유족을 찾아주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일본, 동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우정을 쌓아온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도노히라 스님이 정병호 교수를 유골발굴에 이끌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류학자 故 정병호 한양대학교 교수가 서있다. 1988년 그는 박사 논문을 위해 일본 어린이집들을 비교하는 현장 연구의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운명처럼 도노히라 스님을 만나게 된다. 1945년생 도노히라 스님은 청년 시절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방문했다가 유골 문제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게 되었다. 故 정병호 교수가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발굴 프로젝트에 깊숙이 연루되게 된 것은 바로 도노히라 스님의 영향이었다. 도노히라 스님은 교육 철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고향 홋카이도로 돌아왔다. 그는 홋카이도 아이누 선주민 문제와 조선인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연구하다가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수많은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고된 노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매장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노히라 스님은 1976년에 우연히 슈마리나이 우류댐 근처에 있는 절인 광현사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위패를 발견하게 된다. 이 위패는 우연한 발견이 아니었고 그를 강제노동 희생자 문제를 자신의 주제로 삼아 그들의 흔적을 발굴하는 움직임을 시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도노히라 스님은 한참 뒤 박사 과정에 있는 정병호를 만나게 된다. 스님은 그의 일본 체류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면서 여기저기 이끌고 다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뜻깊은 만남은 이어진다. 1988년 일본에서의 현장 연구가 마무리되고 1989년 크리스마스 즈음 미국에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1994년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됐고 1995년부터는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일로도 바빠진다. 그러다가 일본 평화교육 쪽에 연락을 받는다. 슈마리나이 유골발굴 관련 건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바쁜 그가 유골 발굴에까지 관여할 수 있을까? 그는 아내에게 조언을 듣는다. 아내는 말한다. " 당신 같은 인류학자에게 이런 중요한 일이 찾아왔는데 언젠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 정병호 교수는 학생들을 데리고 슈마리나이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도노히라 스님과 <한일 유골발굴 실행 위원회>를 꾸려 본격적으로 유골발굴을 시작한다.

❝ 이 인식은 '연루' 개념과 연결된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과거사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범죄 행위의 결과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삶의 기반으로 삼아 누리고 있다. 비록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이는 '사후 종범'에 해당될 수 있다. 나는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가 과거사 문제에 참여하도록 언어화하고 이해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유골이 출토되던 날,
가해자의 자손과 피해자의 자손들이 함께 울었다

유해발굴이 시작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첫 번째 유골이 출토됐다. 무려 영하 42도를 기록한 적이 있는 이 혹한의 땅에 세운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까.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되어버린 현장에서 네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관도 없이 구덩이 속에 쪼그린 자세로 꺾여 들어가 있는 참혹한 주검. 이 유골이 발굴되든 순간 함께 작업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고 한다. 가해자의 자손과 피해자의 자손, 그리고 아직도 차별의 역사를 현실로 안고 사는 재일동포와 조선인 자손들은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도 함께 울었다. 안전한 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던 내가 감히 희생자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울었고, 유골현장에서 함께 울었던 그 젊은이들의 눈물이 또 나를 울렸다.

유골발굴은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이어졌다. 발굴된 115구의 유골은 광복 70주년에 맞춰 고국으로 모셔하는 '70년 만의 귀향' 프로젝트를 통해 드디어 한국의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강제노동 현장에 세워진 첫 번째 박물관 이야기로 이어진다. '70년 만의 귀향'이 끝난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와 아베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라고 발표했다. 양국 관계를 정리하려는 시도에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이해관계는 기억을 외면하고 서둘러 지우려고 했지만, 양국의 시민 사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아픔의 역사에 휘말렸던 양국의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화해하고 손잡고 함께 우는 기록을 보여준다. 희망의 증거를 보여준다.

❝일본에는 여전히 수많은 양심적인 시민이 있다. 홋카이도의 민중사발굴운동,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노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십 년을 묵묵히 싸워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과 일본 정부가 담합이라도 하듯 문제를 덮어버리고 일본 언론이 일제히 "모든 게 해결됐다"라는 분위기로 보도해버리면 그들 또한 얼마나 허탈할까?❞

✅인간동물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뉴스에 더 이끌린다고 한다. 우리의 주의력을 훔치는 뉴스들에는 온통 폭력과 살인과 강간과 사기와 타락과 부패가 가득하다. 그러나 각종 매체의 첫 화면을 장식하는 커다란 뉴스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스크롤 하여 내리고, 다른 탭들을 눌러 연재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의외로 다양한 소식들을 접할 수 있다. 그것도 뭉클하고 인류애가 충전되는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정병호 교수와 도노히라 스님, 여러 국가에서 온 청년들, 그리고 일본 지역 주민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유골발굴에 한창일 때 당시의 한국 언론은 이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유골발굴 작업이 여러 매체의 연재기획 뉴스가 되어 널리 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이야기는 한참 뒤에 이 책으로 엮였다. 고통의 역사 앞에 선 선한 마음들이 눈물을 흘리며 단단해지고 어우러져가는 이 여정을 담은 이 책이 최대한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SNS를 가득 메운 혐한 혐중 혐일 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글들을 퍼나르는 젊은이들과 이들을 길러낸 부모들이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유골발굴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의 과거를 파내는 어둡고 무거운 행사가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이 만나 교류하고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는 역동적인 현장입니다.❞

✍️ 인간동물은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국가폭력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국가폭력의 희생자에서 국가폭력의 가담자/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복잡한 기억들은 쉬운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잊는 쪽을 택한다. 기억하는 것은 시인과 소설가와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몫이 된다. 한편 집단적 침묵과 망각을 택한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온전한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기억할 몫이 있다. 알고 나서도 침묵하는 것은 전후 공범이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아픔이 더 아프도록 만드는 가해자/공범이 되는 것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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