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꿈의 해석 ㅣ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8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허영이야말로 인간 개별자를 통틀어 인류가 진보할 수 있었던 제1원리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확장된 연산과정을 누리며 죽도록 피상적인 재산, 허영심으로 큰 집을 사거나 보트나 고급 스포츠카 혹은 리무진 이외의 초고가의 에스프레소 머신, 오디오, 많은 고가의 골동장식품들을 사는 이유는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에 근거한, 아니 남들보다 특출나고 싶은 인간의 개별적 특질에 의해서이다. 어떻게 해서 시카고 시티에 초고층 건물이 즐비할 수 있었는지, 미국에 운영되는 리무진의 엄청난 개수만 보더라도 우리는 허영이, 어찌 보면 성욕의 승화로서의 발전 형태인 그것이, 전시 때의 과학의 발달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더 큰 속도로 진일보를 거듭해가는 현대 기술의 역사를 체감할 수 있다.
허영은 소비욕구의 상부구조이면서 고가품의 유혹을 발현시키는 심리적인 형태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건 어쩌면 소유냐 존재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한 기틀이 될 수 있다고도 여겨지기도 한다. 허영 그 자체만으로 인간은 평생의 자신 생을 투자할 수 있는 근거의 당위성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니까. 허영이 인류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고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모종의 준칙이 될 수 있다는 시점에서 멀리 떨어져, 자연의 지배라는 것 즉 인간으로 말미암은 자연파괴를 우리는 과소비에서 검색해나갈 수 있다.
인간은 인과관계에 의해 세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에 조응하는데, 극소수의 비범한 인간들은 외양과 내양의 통일성을 지양시키는 완전무구한 최고도의 총화를 재배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 행복한 인간이란, 아니 진정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자란, 삶의 열정을 소유하는 걸 뛰어넘어 그 자체를 사랑할 줄 아는 자일 테다.
사회는 돈이라는 윤활유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 원동력은 돈 자체가 아니라 허영이라는 욕구며, 한 인간의 로망과 원대한 꿈도 사실상 허영의 시장에 예속되는 것이리라. 이리하여 필자처럼 지知를 추구하는 부류의 사람은 허영의 영역에 속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리라. 계속해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풀어나가는 능력 즉 변증법적 제과정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참선이나 공무화성과는 완전히 쌍극이다. 무엇이 옳다고 볼 수 있는가? 현대는 서양식 정보화 사회이며, 모든 문명 전체가 현재 미국을 기준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에 얼마나 카페가 많아졌는지 예전에 피시방 열풍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몸에 딱 붙거나 힙합 스타일의 서양복을 입고 서구식 자동차와 아팔먼트(아파트), 거리의 구조적 배열과 도로의 합법칙적인 연결은 이제 전세계가 서양에 입각해 변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내가 귀류법으로서 이를 거부하려는 동양식 신비주의를 내세워도 역사의 흐름은 이미 미국의 중심지인 L.A에서 명멸하고 있다. 그리고 이게 분화되어 전세계를 하나로 흡수한다. 이는 범지구화를 가리키며 허영을 획일화시켜 하나의 동일성을 창출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부의 쟁취에 다름 아니고, 학문이라는 지적 재산은 취직과 창업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이것이 바로 필자의 뉴하이데거식 패러다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론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우리가 사는 시간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또는 현재인가. 우리는 과거에서 자기동일성과 뿌리적 의미를 캐내며 현재를 누릴 줄 알고 미래에 대비할 줄 안다.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광학적 패턴의 지각’은 이렇게 분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허영 역시 과거와 현재, 미래 이 삼고봉의 어느 곳 하나에도 부유해 있으니 우리는 이 영광스럽고 거대한 욕망적 분출구인 허영감을 견지하고 사랑해야 한다. 허영은 어찌 보면 멋있는 하나의 관념이기도 하다. 허영이 있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이며 하향식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유일한 심원의 하나의 관념에 전혀하다. 나 역시 허영심이 있고 그러기에 인간이다. 허영이 없다면 삶이 가치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