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사회는 소유의 사회다. 개개인의 자아는 자본주의에 함몰되었고, 비전은 부르주아들이 신자유시대라는 표어를 최면시의 회중시계처럼 사용하여 거는 목적론적인 음모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게 사실 허구라는 걸 모르고 노동기계로 몰락했다. 세계의 1%가 39%의 부를 차지하고, 유대인들이 배후에서 정치와 매스컴을 조작하여 자본주의를 더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런 몰, 가치(의미)의 사회에서 우리는 숙주하고 있고 개인은 노동과 그로 얻은 소유권을 담보로 인간 실존의 물리적인 조건인 시간을 전부 소비하고 있다. 이런 정신적으로 국지적이고 편협한 패러다임을 괄시하며 도리어 혁명적인 의문을 제기한 사람인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는 과연 소유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이분법적인 것에서 양자택일을 선택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인류는 소유하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나쁜 천성을 갖고 있어서 사실 소유하는 문제에서 오는 쾌감과 보람이란 어떠한 방법론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인 자본의 시원을 존재케하는 매커니즘이다. 우리는 책을, 가전제품을, 자동차를, 집을, 개를 심지어 인간까지도 소유하려들면서 인류는 희대의 악마적 위치까지 등극되었다. 과연 인류의 소유욕은 언제 종식될 것인가. 인류는 언제까지 자연지배를 원칙으로 계속 인공의 첨단을 달릴 것인가? 부르주아들은 언제까지 자본주의 체제를 지반으로 우리를 노동의 노예로 만들 것인가. 점차 개인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돈을 향한 갈망이 커짐에 따라, 그리고 각종 매체가 출세, 성공을 지향하는 모토를 내세움에 따라 인류는 점차 피폐해지고 허황됨에 시달릴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기만을 자초하는 몰지각한 행위의 실천이 가당하게 되고 유는 결국 무가 될 것이며 인간이라는 대자존재는 결국 즉자존재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존을 누리는 부류는 ‘열심히’ 사는 클래스가 아니라 단지 ‘자기 본질을 철저하게 사는’ 클래스일 것이다. 왜 지금 실존인가? 실존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소급되어 진다. 그는 인간실존이란 당연지사 “본질을 사는 것”이라고 진리의 차원에서 해명했고, 그를 따르는 학파의 명맥이 최근의 21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그의 실존론이 얼마나 명증하고 실재적이었는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의 이론은 만민의 귀감이 되었고, 그는 역사 이래 최초로 ‘논리학’이라는 미증유의 논리이론체계를 수립했고 이것이 수학, 철학에서의 논리학, 모든 과학의 뼈대가 되는 논리체계, 사회의 건설에 필요한 기본이론의 바탕이 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아포리즘을 거스르고 자신의 상대적인 소중한 시간을 모두 노동에 퍼붓는다. 이는 단순히 돈을 위해서다. 인간은 자본의 노예가 된지 오래고, 자본의 노예가 아닌 인간은 히말라야의 도인 이외에는 찾아보래야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리라.

다시 한 번 묻겠다. 소유냐 존재냐? 존재의 차원을 유지하는 문제가 단지 학술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심지어 심미적인 범주에 예속되는 건 아니다. 왜 꼭 형이상학적인 분야에 이르러서야 실존에 당착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는 엘리트주의자적인 오만함의 소리이다. 단순하고 멍청한 사람도 실존의 차원에 국한될 수 있으며, 농사일을 하거나 춤을 추는 것도 가히 실존의 영역에 도착하는 정합적인 실천적 행위일 따름이리라.

이리하여 우리는 먼저 소유->실천으로까지 전회해야 우리의 명분을 합리화하는 기본 명제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모든 혁명의 시작이 원지적으로 합산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자기 안의 개별 분야들이 종합되고 총체돼 전인적인 인간으로서 선험으로서의 인간의 생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까지인가? 아니다, 결코 실존 하나만으로 인간의 정신적 퇴락은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의 차원은 당신이 실존을 전제하고 나서 자신의 방향감각, 즉 인식론적인 골자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돌려야만 한다. 왜 방향감각이 중요한가? 삶은 방향감각의 맥을 따라 움직이는 시공의 착란에 다름 아니다. 실존은 물론 방향감각이 개입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방향감각과 실존을 떨어뜨려 놓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나의 이런 이론이 어쩌면 낯설거나 생경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주장하려는 건 실존이 선행되고 나서야 방향감각의 회전이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내가 구구절절 장황히 얘기하는 것과 달리 단순하고 논리적이며 명쾌하다. 하기야 실존조차도 어려운데 어찌 그 다음 단계를 얘기하리요? 실존을 넘어서는 건 신의 영역, 인간 피안의 세계이지 아니한가? 아니다. 대부분의 실존주의자들이 실존을 마지막 단계로 구분 짓는 게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현대담론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분석철학이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빗발치는 현대철학에서 실존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란 이미 진부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진부함에 +1을 더하고자 하는 지루함을 선사하는 사유표명을 머뭇거리지 않겠다. 방향감각의 회전은 우리가 지양해야 할 새로운 정신의 긍정적 연쇄폭발이며 이는 비단 학자에만 국한하는 차원이 아닌 무릇 모든 일반인이 개설해나가야 할 하나의 카르마요, 살고자 하는 행위의 일종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 찌그러진 영혼을 뻣뻣이 펴서 즉 재활하고 개화되어 ‘진실되고 새로운 생’을 살아갈 하나의 보편성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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